… 연차가 높아질수록 의사들의 공감력이 떨어지는 것은 어느 의료 집단이나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연구 결과가 많다. 의사들이 건강한 적응이라 믿는 것이 실은 악질 문화변용일 수도 있다는 소리다. 그런 문화에 완전히 동화된 의사는 환자를 더 이상 인격체로 보지 않고 기껏해야 업무의 연장선 혹은 걸림돌이나 골칫거리로만 인식한다. 한 직업군 안에서 적지 않은 구성원이 일 때문에 타자의 기본 인간성 침해에 무감각해진다면 그 직업 문화는 전체적으로 병든 것이다.
공감력을 좌우하는 가장 큰 두 요소는 맥락과 스트레스다. 전후 맥락은 언제나 중요하고 스트레스는 공감력을 증발시킨다는 점에서다. 맥락을 얼마나 아는가와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한가에 따라 같은 현상을 두고도 사람에 따라 보고 느끼는 바가 달라질 수 있다. 한 주를 시간으로 환산하면 168시간인데, 레지던트 시절 나는 거의 매일 주당 100시간씩 근무했다. 문화변용은 이렇듯 업무가 과중한 환경에서 보다 쉽고 빠르게 일어나기 마련이다. 여기에 먹고 마시고 배설하고 쉬고 싶을 때 쉬고 졸릴 때 자는 기본 욕구까지 제한될 경우, 거의 그냥 세뇌된다고 보면 된다.(23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