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이자 본인이 영국 귀족이기도 했던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유명한 평론 <게으름에 대한 찬양In Praise of Idleness>에 자기와 같은 부유층을 어떻게 보는지를 고스란히 담아냈다. “일이 고결하다고 생각하는 믿음이 현대 사회에 엄청난 해를 끼친다. 행복과 번영으로 가는 길은 일을 체계적으로 줄이는 데 있다.” 러셀이 보기에 유한계급은 “우리가 문명이라 부르는 거의 모든 것에 이바지했다. …유한계급이 없었다면 인류는 결코 미개함을 떨쳐 내지 못했을 것이다.” 러셀은 누구도 하루 네 시간 넘게 일하지 않도록 하여 사람들이 마음껏 예술, 과학, 문학, 경제학에 전념하도록 내버려 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잘사는 사람들의 생활양식을 들여다봐도 특별히 중요한 사실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얼마나 지혜롭게 일상을 보냈는지가(또는 보내는지를) 미화하곤 한다. 소스타인 베블런Thorstein Veblen은 과시적 소비 이론으로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부유층이 어떻게 돈을 썼는지를 비웃었을뿐더러(“좋은 평판을 얻으려면 돈을 물 쓰듯 써야 한다.”). ‘과시적 여가’라는 말로 그들이 자유 시간을 어떻게 사용했는지도 비웃었다. 그들에게는 화려한 사치품에 소득을 물 쓰듯 써 버리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시간도 그렇게 낭비해야만 했다. 그렇게 보면 ‘유한계급’이 고대 언어를 배우는 것부터 격식과 예의를 갖춘 화려한 전시회를 여는 것까지를 중요하게 여긴 이유가 드러난다. 물론 배블런은 일부러 상류층을 자극하고 있었다. 하지만 중대한 핵심도 짚었다. 상류층은 시간을 괴이한 방식으로 쓰기 일쑤였다.
사실 시간을 유익하게 쓸 방법을 떠올리기란 몹시 어렵다. 마르크스는 그 이유를 알려 주는 유명한 구절을 남겼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이 구절은 흔히 성직자와 상류층을 공격하는 말로 해석된다. 즉, 성직자와 상류층이 노동자들의 분노를 가라앉힐 교리를 꾸며내, 경제 불평등을 보지 못하게 눈을 가리고 혁명을 일으키지 못하게 가로막는다고 비난한 말로 본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종교는 상류층이 꾸며내 하층 계급으로 전파한 것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이었다. 달리 말해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삶에 의미를 더하고자 종교라는 보이지 않는 무엇을 스스로 꾸며낸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종교는 분명히 그런 역할을 더는 수행하지 못한다. 물론 어떤 공동체에서는 독실한 신앙이 증가하고, 종교 경전에 사이언톨로지 성서 같은 새로운 경전이 추가되기도 했다. 하지만 곳곳에서 교회를 세우고 열심히 성직자를 모집하던 마르크스 시대에 견주면 현대 사회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인다. 이제 종교는 더는 지난날처럼 일상을 지배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 자리를 차지했을까? 바로 일이다. 우리 대다수에게 일은 새로운 아편이다. 마약과 마찬가지로, 일도 어떤 사람들에게 기분 좋은 목적의식이 솟구치게 한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일에 취해 갈피를 못 잡게 함으로써 주의를 흩뜨려 다른 곳에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게 막는다. 그런 까닭에 다른 방식으로 살아갈 방법을 떠올리기가 어렵다. 일이 우리 마음속에 워낙 깊숙이 뿌리내린 탓에, 우리가 일에 몹시 의존하는 탓에, 일이 줄어든 세상이 다가오리라는 생각을 흔히들 본능적으로 거부하고 실제로 생각을 하더라도 중요한 내용을 전혀 표현하지 못한다.
우리 대다수는 유익한 고용 상태로 사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안다. 하지만 유익한 실업 상태로 사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안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말대로 우리는 “노동이라는 족쇄에서 이제 막 벗어나려는 노동자 사회에서” 산다. “그런데 이 사회는 이런 자류를 얻어낼 만큼 값진 더 고귀하고 의미 있는 활동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케인스가 걱정한 대로 “어떤 나라도, 어떤 사람도 여가의 시대와 풍요의 시대를 두려움 없이 기쁜 마음으로 기대할 능력이 없다. 우리가 즐기기보다 죽어라 애쓰도록 너무 오랫동안 길들여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