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즈비언과 게이들에 대한 공격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은 흑인들에 대한 공격 역시 늘어날 것임을 알리는 서막일 뿐이다. 왜냐하면 이 나라에서 억압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곳마다 흑인들은 잠재적 피해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억압받는 집단의 구성원들이 서로 반목하도록 부추기는 것이야말로 우파 냉소주의의 전형적 수법이며, 우리가 각자의 고유한 정체성으로 인해 분열되는 한 우리는 효과적인 정치적 행동을 함께할 수 없게 된다.
레즈비언 공동체에서 나는 흑인이고, 흑인 공동체에서 나는 레즈비언이다. 흑인에 대한 어떤 공격도 레즈비언과 게이 이슈다. 나와 수천 명의 흑인 여성들은 레즈비언 공동체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레즈비언과 게이에 대한 어떤 공격도 흑인 이슈다. 수천 명의 레즈비언과 게이는 흑인이기 때문이다. 억압에 위계란 없다.
지독히도 여성 혐오적이고 흑인 혐오적인 가족보호법안Family Protection Act이 동성애 혐오적이기도 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흑인으로서 나는 내 적이 누군지 잘 알고 있으며, KKK가 (자신들이 보기에) “동성애를 암시하는” 책들을 교육과정에서 배제하기 위해 디트로이트 법정으로 가고 있을 때, 나는 내가 억압의 한 형태에만 맞서 싸우는 사치를 부릴 여유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에게는 관용의 자유가 오로지 특정 한 집단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라고 믿고 있을 여유도 없다. 또 나는 이런 차별 세력들과의 전투에서 어느 전장에서 나가 싸워야 할지 선택할 여유도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디서나 나타나 날 파괴하려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날 파괴하려 나타났다는 것은 곧 그들이 당신을 파괴하러 나타날 날도 멀지 않았다는 뜻이다.
- 억압의 위계란 없다There is hierarchy of oppression (198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