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을 한날에 삼십 명이나 사십 명을 받으라고 하면 어떻게 받는가? 밥도 잘 먹지 못하고, 군인들이 끌고 가서 아래가 조그마하니까 그게 어떻게 하겠는가? 자기 맘대로 못 하니까 성숙하지 못했다고 해서 여자 거기를 칼로 자르는 거야. 싫다고 하니까 너의 같은 것들이 뭣이냐고, 우리 부속품이라든가? 부속품으로 온 것인데 너희들이 뭣이냐고 일본 말로 하면서 때려.” 김봉이 할머니
…
“안 당하려고 반항하면 반항한다고 때리고, 때리는 것이 아파서 울면 운다고 때리고, 어쩔 수 없이 저는 당하고 말았어요. 너무 어려서부터 그런 몹쓸 짓을 당해서 그런지 얼마 못 지나 성병이 생겼어요. 군인들을 못 받게 생겼으니까 병원에 가서 치료를 해 주더라고요. 그런데 그 병만 치료하면 되지 나팔관 양쪽을 묶어 버린 거예요. 그것 때문에 아기도 못 낳고 20대에 자궁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어요. ……얼마를 있었는지, 처음으로 생리라는 것을 하게 되었어요.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나는 이제 죽을병에 걸렸구나 하면서 놀라서 얼마나 울었던지. 걸레로도 막아 보고 옷을 찢어서 막아 봤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그때 저보다 나이가 많은 언니가 그것은 병이 아니라고, 이제 비로소 여자가 된 것이라고 알려 주었어요. 그런데 그런 날은 쉬게 할 줄 알았는데, 소용이 없었어요. 군인이 한 명 왔다 가고 나면 밑의 요가 벌겋게 피로 물들고…….”
할머니는 겨우 하던 말을 마치고는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조용한 회의실에는 할머니의 울음소리만이 가득했지요. 냉랭하게 바라보고 있던 의원들의 눈가에도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지요. 특히 여성들은 대부분 고개를 숙인 채 슬픔에 잠겨 있었습니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계속되었습니다.
“저는 해방되고서도 아주 긴 세월을 제 과거가 부끄러워서,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피해 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용기를 내어 모든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수요시위에서 지금 한창 자라고 있는 아이들을 많이 만났어요. 그 아이들을 보면서 제게는 큰 숙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저 아이들만큼은 내가 겪은 것을 다시 겪게 해서는 안 된다.’는 간절한 소망이었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진실을 올바르게 밝혀야 합니다. 힘들지만, 제 경험을 통해서 일본이 어떤 일을 했고, 지금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여러분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길원옥 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