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1
언젠가 넘치는 열정으로 지었던 노래들을
아아, 눈물 흘리며 슬픔 가득한 운율로 시작해야겠구나.
보라, 눈물로 찢긴1) 카메나2) 여신들이 내게 지으라 명하시니
비가悲歌 3)는 진실한 눈물이 되어 얼굴을 적신다.
어떠한 두려움4)도, 여신들이 나의 동료가 되어
이 길을 함께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한때 행복하고 파릇파릇했던 젊은 시절의 영광으로,
지금은 슬픈 늙은이의 운명이 위로받는다.
불행을 겪으며 노년이 생각지도 못하게 서둘러 찾아왔고,
슬픔도 자신의 나이를 내게 주었으니
때 이른 백발이 이마에서 흘러내리며
육신이 소진되어 피부가 주름져 떨리는구나.
인간에게 죽음이란 달콤한 시절에 닥쳐오지 않으며
슬퍼하는 자들이 불러올 때에 행복한 것이거늘!5)
아아, 허나 지금 죽음은 얼마나 눈이 멀었기에 가련한 자들에게서
눈을 돌리고
잔인하게도 눈물 흘리는 눈을 감지 못하게 하는가!
운명이 보잘것없는 행복들로 거짓 믿음을 주며
내게 미소 짓는 동안
그 비통한 시간은 나를 거의 파멸시켰다.
이제 어두운 운명이 그 거짓된 표정을 바꿨으니
나의 불운한 삶은 고맙지도 않을 시간만 늘리고 있다.
어찌 그토록 자주 나를 두고 행복한 자라 하였는가, 친구들이여!
몰락한 자는 안전한 받침 위에 서 있었던 것이 아니었구나.
1) 눈물이 흘러내려 뺨에 자국을 남긴 모습을 찢겼다고 표현하였다.
2) 카메나(Camena) 여신들은 원래 라틴 상고기에는 미래를 예언하는 물의 요정인 뉨파(Nympha)에 속한 여신들이었으나 후에 리비우스 안드로니쿠스와 나이비우스 같은 작가들부터는 희랍의 무사(Mousa, 뮤즈) 여신들과 동일시되었다.
3) 이 책에 나오는 시들은 각기 다른 운율을 지니고 있다. 라틴어로 된 시들은 대체로 길고 짧은 음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운율이 분류되는데, 처음 등장하는 이 시는 육각 음보와 오각 음보가 번갈아 가며 나타나는 엘레기(elegi, 비가) 운율로 이루어져 있다.
4) 아마도 동고트 왕국의 황제인 테오도리쿠스에 대한 두려움으로 보인다.
5) 슬퍼하는 자들은 죽음을 맞이할 때 비로소 슬픔에서 벗어나게 된다.
산문 1
이렇게 혼자서 가만히 되새기고 철필로 눈물 섞인 한탄을 써 내려갈 무렵, 내 머리 위쪽으로 한 여인이 대단히 위엄 있는 표정으로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불타는 듯한 눈빛에는 보통 사람들의 능력을 뛰어넘는 날카로움이 서려 있었으며, 혈색은 생생하고 그 힘은 지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어떻게 봐도 우리 시대의 사람이라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오랜 삶을 살아온 것으로 보였고, 그 몸집을 어림하기가 모호하였다. 어찌 보면 스스로를 인간들의 보통 키에 맞추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어찌 보면 정수리로 하늘을 밀어 올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머리를 더 들었다면 하늘을 뚫어서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헛되이 만들었을 것이다. 옷은 아주 얇은 실로 짜여 있었는데, 이는 절대 풀리지 않는 재료6)로 정교한 기술을 사용하여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 옷이 손수 짠 것이라는 것을 후에 그녀가 보여줘 알게 되었다.7) 옷의 표면은 헤아릴 수 없는 세월로 인해 마치 동상이 그을린 듯 어떤 흐릿함에 덮여 있었다. 이 옷의 맨 아랫단에는 희랍 문자 Π 가, 가장 윗단에는 Θ가 수놓아져 있었고8) 두 글자들 쪽을 향해 사다리 문양이 찍혀 있는 것이 보였다. 또한 이 사다리를 통해 가장 아래에서 가장 위쪽의 글자로 올라갈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9) 하지만 어떤 난폭한 자들의 손길이 그 옷을 찢어 놓았고 각자 가져갈 수 있는 만큼 옷 조각들을 가져가 버린 모습이었다.10) 또한 오른손에는 몇 권의 책을, 왼손에는 홀을 쥐고 있었다.
그녀는 내 슬픔을 위로하려고 침대 곁에서 시어들을 이야기해주고 있던 시의 무사 여신11)들을 보고서는 잠시 격분하였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불타올라서12) 말해다.13) 누가 이 거짓된 매춘부들을 여기 병든 자에게 다가가도록 내버려두었는가? 이 여자들은 이 사람의 고통을 어떤 약으로도 달래지 못한다. 오히려 달콤한 독으로 고통을 키울 뿐이다. 이들은 격전이라는 열매 맺지 못하는 가시들로 풍요로운 이성의 비옥한 들판을 망가뜨리며, 인간의 정신을 병에 익숙해지게 할 뿐, 자유롭게 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항상 그랬듯 너희만의 감언이설로 배우지 못한 자14)를 끌어들였다면, 나의 일이 해를 입지 않을 것이니 내가 신경 쓸 바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나, 이 사람은 엘레아와 아카데미아15) 학파의 공부로 키워진 자다. 그러니 너희는 떠나라, 파멸로 유혹하려는 세이렌16)들이여, 우리 여신들17)이 그를 달래고 치유하도록 남겨 놓아라!
이렇게 꾸짖음을 당한 저 무리는 한탄하며 고개를 바닥으로 떨구었고,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며 낙심하여 문밖으로 떠나갔다. 그러나 나는 얼굴이 눈물로 뒤범벅이 되어 그토록 강력한 권위를 가진 여인이 도대체 누구인지 알 수조차 없었다. 그저 깜짝 놀라 시선을 땅바닥에 고정시킨 채로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조용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녀가 내 침대 끄트머리로 다가와 앉았다. 그러고는 슬픔으로 무거워지고 한숨으로 가라앉은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내 마음의 혼란에 대해 다음과 같은 시로 비탄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6) 바로 뒤에 옷 조각을 스토아와 에피쿠로스 학파 사람들이 가져갔다는 언급이 나오긴 하지만, 어쨌든 옷의 재질에 대해 찢기거나 풀리지 않는다고 표현하였다. 이는 철학의 가르침이 어떤 공격에도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7) 그 옷을 철학 자신이 짰다는 내용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5권 734에서 지혜의 여신인 아테네가 자신의 옷을 손수 짰다는 데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아테네는 자신이 손수 공들여 만든 다채롭게 수놓은 부드러운 옷을…” (천병희 역)
8) 여기서 희랍 문자 Π와 Θ는 보에티우스가 포르퓌리우스에 대해 쓴 주석에 따르면, Parxis와 Theoria를 뜻하는 것으로 철학이 실천적인 철학과 관조적인 철학으로 나눠짐을 보여준다.
9)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옮겨갈 수 있는 사다리는 4학(산술, 기하, 천문학, 음악)의 단계를 의미한다.
10) 난폭한 자들은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보에티우스는 이 학파들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철학의 참된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고 보았다.
11) 무사(희: mousa) 여신은 로마에서는 카메나 여신으로 불리기도 했다. 영어권에서 뮤즈라고 부르는 이 여신들은 원래 서사시, 서정시, 비극 등 문학과 관련된 여신들이나 여기서 철학은 시의 무사 여신들과 철학의 무사 여신들을 구별하여 지칭하고 있다.
12) torvis inflammata luminibus, 실제로 불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눈빛이겠지만 좀 더 확장하여 그녀 자신이 그 정도로 격분하였음을 생생하게 나타내려는 표현이다.
13) 철학이 무사 여신들을 쫓아내는 장면으로, 플라톤과 소크라테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철학과 문학 사이의 대립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대립은 로마 제정기에도 이어졌지만, 수사학-시학으로 대표되는 문학의 경우는 철학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았다.
14) 철학을 공부하지 않은 자를 뜻한다.
15) 고대 희랍의 엘레아 학파는 기원전 6세기 중반의 철학 학파로 파르메니데스와 그의 제자인 제논으로 대표된다. 아카데미 학파는 기원전 3세기에서 2세기까지 나타났던 학파로, 회의주의를 주로 다루었던 학파였다. 가장 중요한 인물은 플라톤이다. 소크라테스와 변증법과 플라톤의 영혼론은 《철학의 위안》의 본질적인 부분을 이룬다. 다만 엘레아와 아카데미아의 철학은 신플라톤주의에 심취했던 보에티우스가 받은 교육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 보에티우스, 『철학의 위안』, 이세운 옮김, 필로소픽, 2014, 26~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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