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에서 진리를 깨닫고 나서 (불교 용어로 ‘성불’하시고 나서, 혹은 부처님이 되시고 나서) 한참 동안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궁리를 하셨다 한다. 자신이 깨친 진리를 가지고 나가 사람들에게 가르칠까말까 하는 문제 때문이었다. 이렇게 망설이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사람들이 진리니 뭐니 하는 것에 관심이 없을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먹고살기 바빠 ‘그냥 지금까지 내려오는 대로 살면 됐지 골치 아프게 무슨 진리고 뭐고 따질 것이 있느냐’ 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다.
둘째 이유는 비록 사람들이 진리니 뭐니 하는 데 관심을 갖는다고 하더라도 부처님 스스로가 깨친 진리가 너무나도 심오하고 신비스러워서 사람들이 도저히 깨닫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발견한 진리는 일반 상식의 세계를 뛰어넘는 것이기 때문에 상식적인 사람은 이해를 못할 뿐 아니라 비웃기나 할 것이었다. 그러니 뭣 하러 나가 입만 아프게 떠들면서 시간과 정력을 낭비할 필요가 있을까 주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브라마Brahma라는 신이 부처님에게 와서 제발 세상에 나가서 불쌍한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또한 부처님 스스로 연못에 피어 있는 연꽃을 보고 느끼는 바가 있었다고 한다. 연못에 세 종류의 연꽃이 피어 있는 것을 본 것이다. 한 종류는 흙탕물 밑에 아주 잠겨 있는 것, 다른 한 종류는 물에 잠겼다 나왔다 하는 것, 또 한 종류는 아주 물 위로 나와서 피어 있는 것.
부처님은 이를 보고 생각했다. 사람들 중에도 이렇게 세 부류의 사람이 있을 것이다. 물 아래 잠긴 꽃이나 물 밖에 나와 있는 꽃은 나의 도움이 필요 없는 사람이다. 물 아래 잠긴 꽃은 당분간 아무리 도와줘도 희망이 없고, 밖에 나와 있는 꽃은 나의 도움이 없이도 벌써 나와 있는 것.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물에 잠겼다 나왔다하는 사람. 이들을 위해서 나가 진리를 가르쳐야 하겠다. 이렇게 마음을 먹고 세상에 나와 80세로 돌아가시기까지 (불교 용어로 하면 입멸하기까지, 혹은 열반에 들기까지) 사십오 년 간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쳤다.
─ 오강남, 『예수는 없다』, 2001, 현암사, 45~46면
한국의 예에서 보듯이 이런 지적, 영적, 도덕적 성장을 막는 교회가 아무리 커져서 아무리 많은 수의 교인을 확보한다 하더라도, 그 많은 수의 교인 때문에 한국 사회가 좀더 정의롭고 평화롭고 화기애애한 사회로 탈바꿈하는 데 도움이 되느냐 하는 것과는 거의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잘 믿어서 혼자 잘살게 될 것으로 착각하고, 잘 믿어서 자기들만 천당 갈 것으로 꿈꾸는 사람 때문에 더욱 극심한 물질중심주의, 이기주의, 과시제일주의의 사고방식이 팽배되고 있는 것이 현실 아닌가? 쓸데없이 사람을 내 편 네 편,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 등으로 나누어 분열과 위화감만 조장하게 된다. 한국과 캐나다에서 오랫동안 종교학을 강의하신 정대위 박사님이 내게 하신 말씀, “어느 면에서 교회가 많다고 하는 것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라는 데 슬프지만 동감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의 성공을 교인의 머리 수로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초등학교 학생 수가 대학원 학생 수보다 많다고 하여 초등학교가 대학원보다 더 성공적이고 더 훌륭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성공한 초등학교란 사실 학생을 잘 가르침으로 빨리 졸업하여 중고등학교, 대학교로 계속 진학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들어오는 학생을 끝까지 가두어 두고 학생 숫자만 증가시키는 학교란 사실 가장 실패한 학교인 셈이다. 교회도 성공적인 교회라면 교인이 계속 자라나 목사나 교회의 도움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의 독립적 사고, 독립적 믿음을 갖도록 해주는 곳이어야 한다. 숫자가 적다고 물론 다 성공적인 교회는 아니지만, 이런 활동 때문에 숫자가 적은 교회는 진정한 의미로 성공적인 교회라 할 수 있다. 극단적으로 말해 정말로 교회가 비었다고 하자. 내가 보기에는 빈 교회가 차라리 머리가 빈 사람으로 가득찬 교회보다 낫다. 빈 교회는 적어도 많은 사람을 끌어모아 그들의 머리를 비게 하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공한 교회, 잘되는 교회를 오로지 사람 머리 수로만 보는 것은 천박한 물질주의적 가치에 입각한 사업적 발상이다. 머리가 무슨 생각으로 찼는가, 머리가 건강한가, 머리가 온전해서 정말 사람다운 사람 노릇하면서 사는가 등의 문제에는 관심도 없고 오로지 비었든 썩었든 머리 수만 많으면 장땡이다. 종교의 핵심을 ‘숫자놀음’numbers game이라 보는 태도이다. 이른바 ‘교회성장학’의 허구성이 바로 이런 데 있는 것이다. 노벨 문학상을 받을 수 있을 만큼 훌륭한 소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삼류소설을 쓰든, 아이들 만화책을 내든, 심지어 포르노 잡지를 내든 많이만 팔리면 장땡이라고 하는 발상이다. 교회에 만연한 이런 상업주의적 발상이 예수님의 정신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이런 교회에 과연 예수님이 계실까?
신학자 폴 틸리히가 말했듯이 예수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고 초대했을 때 예수님이 약속한 쉼은 그가 새로운 종교를 창설하고 그것을 ‘가벼운 멍에’로 씌어주려는 것이 아니라, ‘종교 자체로부터의 해방’이었다. 우리를 얽매는 종교는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주려고 하는 종교 본연의 목적과 정면으로 상충되는 것으로서, 이제 그 존립 이유가 뿌리째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이런 종교에 사람의 발길이 뜸하다고 하여 걱정하거나 슬퍼할 일이 있겠는가?
─ 같은 책, 266~26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