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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박스쿨’의 문제
‘리박스쿨’이란 명칭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적 존재였던 이승만이=Rhee과 박정희박=Park의 성씨를 딴 것이다. 이 단체는, “아이들에게 올바른 자유민주주의 역사관을 심어주는” 역할을 자임했으나, 실제는 이승만과 박정희의 역사적 유산을 계승하자는 주장을 일삼았다. 요컨대 극히 보수적 관점에서 현대사 교육에 매달린 것이다.
이 단체는 ‘늘봄학교’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늘봄학교는 교육부가 주관하는 초등학교의 방과 후 돌봄 서비스인데, 리박스쿨은 서울 한 도시에서만도 10여 개의 학교에서 역사 수업을 맡았다. 윤석열 정권의 비호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 리박스쿨은 ‘자손군’자유손가락군대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온라인에서 정치 댓글을 조직적으로 조작한 혐의가 있다. 대선 때 특정한 후보를 무조건 지지하고, 상대 후보를 악의적으로 비방하는 댓글을 달았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이 단체는 서울교육대학교와도 협약을 맺어, 공교육 영역으로 본격적인 진출을 준비한 것으로 알려졌다.
위와 같은 정황이 드러나자 리박스쿨이 청소년에게 편향적 정치 교육을 했다는 비난이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교육 내용은 물론 다양해야 하겠지만 편향된 내용을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강요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필자 역시 리박스쿨의 교육활동을 비판하는 바이다.
하지만 리박스쿨의 교재라든가 또는 그들이 추천한 도서라는 이유만으로 몇몇 도서를 금서처럼 취급한다면 되겠는가. 이를 필자는 단호히 반대한다. 누구나 특정 도서를 지지하거나 추천할 수 있다. 또 그와 반대로 비판할 자유도 있다. 그런데 만약 차원을 달리해 특정 도서를 금서로 정해 독자의 접근을 근원적으로 차단한다면, 이는 출판과 사상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으로, 민주사회가 허용할 수 없는 일이다.
역사상의 수많은 금서,
사회적 비용이 너무 무거웠다
『금서, 시대를 읽다』산처럼, 2012라는 책에서 필자는, 금서란 “시대와의 불화를 알리는 불만과 저항의 목소리”라고 정의하였다. 금서를 통해 한 시대의 일탈과 혐오, 저주와 선동, 좌절과 소망의 문화 공간이 열릴 때가 많았다. 지난날 권력자들은 금서에서 음란과 퇴폐, 사상적 불온의 징후를 읽어냈고, 그들 도서를 제거와 격리의 대상으로 삼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민주주의가 정착하기 이전에는 금서 조치가 광범위하게 존재했다. 그 이유도 천차만별이어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요한 볼프강 폰 괴테은 자살을 조장했다고 금지했고, 『보바리 부인』귀스타프 플로베르은 불륜을 미화했다며 탄압했다. 『사회계약론』장 자크 루소은 사회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금했으며, 『정감록』미상은 조선의 멸망을 예언했다는 이유로 낙인을 찍었다. 또, 『태백산맥』조정래은 빨치산의 이야기를 다뤘다는 이유로 금서 취급을 하였다. 어이없게도,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막스 베버은 제목에 자본주의라는 용어가 들어있는 데다 저자 이름이 막스라서 금서로 취급되기도 했다. 참으로 실소를 자아내는 일이었다.
금서가 탄압받은 과정을 살펴보면, 한쪽에는 새로운 사상과 관점을 주장하는 저자들이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그들을 억압하는 지배 세력 또는 기득권층이 있었다. 양자 간에 문화적 충돌이 심하게 일어날 때마다 금서 조치가 발생하였다고 볼 수 있다. 책을 사이에 두고 문화적 헤게모니를 둘러싼 투쟁 전선이 형성되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한 시대가 직면한 과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한 책일수록 금서로 내몰릴 가능성이 컸다. 권력자들은 해당 서적이 인간 사회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탄압했으나, 실제로는 그들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보호하려는 조치에 불과했다.
표현의 자유, 출판의 자유, 사상의 자유는 인간의 기본권이다. 그러나 이해관계 때문에 그 기본권을 제대로 보장하지 못할 때가 빈번하였다. 지금도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출판물을 검열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현실이다.
서구에서 정치 권력이 검열을 체계적으로 도입한 것은 16세기였다. 금속활자의 등장으로 인쇄술이 발달하고 어느 때보다 출판이 활발해지자 교황청이 앞장서 검열을 체계화했다. 1501년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모든 책은 출판에 앞서 교황청의 허가를 얻어야 한다는 법령을 공포했다. 이단 종교의 유행을 막기 위해서라고 했다.
1546년에 열린 트리엔트공의회는 교황의 이름 아래 최초로 「금서목록Index Librorum Prohibitorum」을 작성했다. 초기의 금서는 천동설을 부정하거나 태양 중심설을 주장하는 책들, 가톨릭교회의 권위를 부정하는 도서가 대종을 이루었다. 이후 「금서목록」은 시일이 흐를수록 두꺼워져, 유럽의 손꼽히는 지식인은 대부분이 금서의 저자가 되고 말았다. 케플러, 갈릴레이, 몽테뉴, 단테, 브루노, 데카르트, 흄, 로크에 이어, 스피노자, 볼테르, 디드로, 장 자크 루소, 칸트도 금서를 썼다며 죄악시했다. 나중에는 세계문학의 발전에 이바지한 근대 유럽의 대표작도 상당수가 금서도 지정되어, 빅토르 위고, 장 폴 사르트르, 앙드레 지드 등의 저작도 한때는 「금서목록」에 등재되었다.
교황청의 「금서목록」은 300차례나 수정 증보되었으나, 1966년 6월 14일에 이르러 전면 폐기되었다. ‘제2바티칸 공의회’1959~1965의 결정에 따른 변화였다.
돌이켜보면, 금서의 저자는 자신이 속한 사회에 변화의 물결을 불러일으키고자 했다. 그들이 일으킨 문화투쟁Kulturkampf이야말로 인류 역사에 진보를 가져온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때로 지배 권력은 그럴싸한 이유를 내세워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였지만, 긴 역사적 흐름에서 보면 그 한계를 노출하기 마련이었다. 때가 되면 역사의 주인공은 바뀌기 마련인데, 그러한 시대의 전환을 앞당긴 것이 곧 금서의 저자들이었다. 한국 근현대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인 중요한 동력 또한 금서를 둘러싼 문화투쟁이었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여기서 한 가지 깊이 성찰할 지점이 있다. 역사상 금서 조치가 되풀이될 때마다 막대한 사회적 비용이 발생했다는 사실이다. 권력자들은 그들의 이익을 해치는 도서를 금서로 지정해 다양한 방법으로 탄압하였으나, 역사의 도도한 흐름을 차단하기란 불가능하였다. 바뀌어야 할 것이라면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결국에는 그렇게 되고야 마는 것이 역사의 힘이다. 그 힘을 무시하고 공연히 금서 논쟁을 일으켜 탄압을 일삼으면 인적, 물적 희생만 발생할 뿐이었다. 이는 금서의 역사에서 우리가 얻은 소중한 교훈이다.
민주시민의 ‘숙의’가 필요
지난 2008년에 이명박 정권은 장하준 교수의 저서 등을 국방부 금서로 지정한 적이 있었다. 보수 정권이 자본주의에 관한 성찰을 금지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결과적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런가 하면 문재인 정부에서는 여성가족부가 보수단체의 주장을 받아들여 성교육 및 아동 인권교육에 관한 몇몇 추천 도서를 교육 현장에서 사실상 추방하였다. 그때도 사회적 반발이 적지 않았고, 금지 효과도 거의 없었다.
오늘날 이재명 정부는 지난날 윤석열 정권의 비호 아래 성장한 리박스쿨의 사상적 교과서를 금서로 지정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이에 대해 식자층의 반대가 적지 않을 것은 당연하다.
사람의 생각을 통제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지난 역사를 보아도 그런 일은 불가능했으며, 앞으로도 마찬가지라고 확신한다. 만약에 해당 도서의 내용에 심각한 오류가 있다면 시민사회가 중심이 되어 그 내용을 차분히 검토하고, 시민들과 더불어 충분히 토론할 시간적 여유를 가져야 한다.
민주사회에서는 중요한 사안일수록 숙의熟議의 과정이 꼭 필요하다. 관점과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해당 서적의 옳고 그름을 깊이 있게 논의하면, 공정하고 객관적인 평가가 이뤄질 것은 자명하다. 좋은 책이라면 오래도록 우리 곁에 남아 유익한 영향을 줄 것이요, 그게 아니라면 곧 잊히고 말 것이다.
★ 이 글은 2025년 9월 23일, 책읽는사회문화재단에서 열린 ‘바람직한독서문화를위한시민연대’ 입장 표명 행사에서 최근 도서 폐기 사태와 관련해 발표된 원고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