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가 출범하며 밝힌 청사진에는 책이 빠져 있었다. 제20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발표한 「윤석열 정부 110대 국정과제」2022.5.에는 ‘독서’라는 단어가 단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출판’은 생뚱맞은 ‘남북 언론·출판 교류’에서, ‘도서관’은 ‘장애인 도서관 조성’에서 각각 한 번씩만 등장한다. 반면 ‘콘텐츠’는 미디어 공공성 확립, 글로벌 미디어 강국 실현, K-컬처 등의 항목에서 총 26회 언급된다. 여기서 ‘K-컬처’는 K-팝, 게임, 드라마, 영화, 웹툰을 의미할 뿐 책과 출판은 그 대상이 아니었다. 그 뒤에 K-북, K-문학 등이 정책 용어로 쓰이고 있지만 달라진 것은 거의 없다. 물론 국정과제가 모든 정책을 포괄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책적으로 방점을 찍는 정부정권의 관심사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책과 출판, 서점, 도서관, 독서가 거의 언급조차 되지 않은 것은 우려할 만한 일이었다.
현재 한국 출판과 책 생태계가 직면한 불안정성과 위기 구조는 매우 복합적이다. 학령인구 및 독서인구의 지속적인 감소, 대학가의 심각한 불법복제와 저작권 문제들, 각종 관종별 도서관의 도서구입비 감소, 출판시장의 양극화와 ‘기울어진 운동장’을 만든 도서 가격 제도 등은 물론이고, 교육부가 내년부터 도입하는 디지털 인공지능AI 교과서라는 강력한 미래 리스크도 크다. 산업과 시장, 출판문화를 선도하는 대기업은 없고 절대다수의 중소기업과 1인 기업들로 구성된 ‘영세성의 세포분열’이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는 출판산업에서 정부 정책에 대한 수요와 기대치는 매우 높고 다양하다. 정책 구상은 다양하게 이루어질 수 있지만, 관건은 정부가 현안을 해결하려는 의지와 정책 수단을 얼마나 발휘하는가에 달려 있다.
국내 독서문화 기반을 바로 세워 출판을 매개로 한 지속 가능 책 생태계를 조성하고, 디지털 환경과 글로벌 시장에 대응하며 미디어-콘텐츠 융복합 시대에 신성장동력을 마련하는 일, 산업의 고도화와 재구조화를 이끄는 정책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렇지만 현실을 보면 단순히 기존 정책을 유지하거나 부분적으로 수정하는 데 그치는 경우가 많아, 정책 수요자인 책 생태계 이해관계자들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능동적인 출판정책의 패러다임 변화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가 밝힌 「2025년 예산안 중점 투자 방향 및 주요 내용」2024.8.28.에 따르면, 문체부 예산은 7조 1,214억 원으로 전년 대비 2.4% 증가했다. 이 가운데 출판 관련 예산의 편성은 ▲도서 보급·나눔 사업 확대131억 원, 16억 원 증액하고, ▲독서 기반 지역 활성화7억 원, 신규, 디지털 독서 확산 지원3억 원, 신규 등을 통한 책읽기 수요 창출32억 원, 10억 원 증액, ▲범출판계 책문화 캠페인 ‘책 읽는 대한민국’10억 원, 신규 추진, ▲출판유통 경쟁력 제고를 위한 권역별 선도서점 육성11억 원, 신규, 디지털도서 물류 지원14억 원, 2억 원 증액 등 총 460억 원 규모2024년 대비 31억 원 증이며, 이를 통해 출판 생태계 전반에 활력을 높일 계획이라고 한다. 2024년약 429억 원 대비 7.3% 증액한 규모다. 그런데 이는 2023년 예산이던 ‘국민독서문화 증진 지원’59억 6,500만 원이 올해 통째로 삭감된 것을 감안하면, 2023년약 474억 원 대비 기준 2.8%가 감소한 것이다. 따라서 ‘증액’이란 표현은 조삼모사朝三暮四의 수사에 불과하다.
출판 관련 예산의 사업 영역별 2024년 대비 2025년 예산 내역을 보면 ▲우수 출판콘텐츠 육성세종도서, 디지털 기반 출판 지원 등 : 174억 8,900만 원 → 188억 5,300만 원세종도서·문학나눔 131억 2,900만 원, 디지털 기반 제작 지원 48억 2,400만 원, 웹소설 산업 지원 9억 원, ▲출판산업 유통 지원출판유통통합전산망 운영, 도서물류 디지털화, 불법복제 대응, 해외 수출 지원 등 : 114억 5,100만 원 → 106억 5,100만 원디지털 도서물류 지원 14억1,500만 원, 출판 수출 및 인력양성 지원 68억 9,200만 원, 출판물 공정유통환경 조성 지원 5억 4,400만 원, 출판유통통합전산망 운영 18억 원, ▲출판산업 기반 조성도서문화 향유권 증진, 중소·지역출판사 지원, 인쇄산업 지원, 실태조사 및 연구 지원 : 74억 4,600만 원 → 97억 8,900만 원소외계층 전자책 접근성 제고 14억 원, 중소출판사 성장도약 지원 30억 원, 인쇄문화산업 지원 5억 300만 원, 지역문화사회 기반 책 읽기 수요 창출 19억 8,600만 원, 책 읽는 대한민국 10억 원, 지역서점 활성화 지원 11억 원, 출판산업 기초통계조사 및 정책개발 6억 원, 대구특화출판산업육성 지원 2억 원, 부산국제도서전 4억 원,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운영 지원 : 65억 4,300만 원 → 67억 5,400만 원 등이다.
이 가운데 출판산업 기반 조성 분야의 신규 사업인 ‘책 읽는 대한민국’ 10억 원, ‘지역문화사회 기반 책 읽기 수요 창출’독서 기반 지역 활성화 6억 5,000만 원, 디지털 독서 지원 = QR 활용 공공시설 전자책 열람 3억 원, ‘지역서점 활성화 지원’권역별 선도서점 육성 11억 원 등은 그 세부 내역을 알기 어려워 출판과 미래 사회의 기반인 독서 및 출판 관련 예산으로 짜임새 있게 편성된 것인지 알기 어렵다. 다른 예산들도 모든 항목에 걸쳐 그 개요와 세부내역이 공개되지 않아 예산 편성의 적정성에 대해 파악하기가 어렵다. 나라 살림을 이렇게 해도 되는지 모를 일이다.
내년 예산안에는 독서율 감소 시대에 책 읽기에 환호하는 ‘텍스트힙Text Hip’의 상징이 된 국내 대표 도서전서울국제도서전에 대한 지원을 전면 배제한 채 부산국제아동도서전만 지원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서울국제도서전 행사 수익금 반환 논란이 정부-출판단체 간 행정소송으로 번졌다고는 하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해외 국제도서전 참가 역시 대한출판문화협회를 배제하고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등이 주관하는 것으로 하여 오랜 기간 국제적으로 쌓인 네트워크들이 무너지고 있다. 또한 국내 유일이자 세계 유일의 국가문화산업단지인 파주출판도시는 아예 배제하고 대구출판산업단지만 지원하는 식의 편파적인 출판산업 지원 행정이 내년 예산안에 담겨 있다. 문체부가 내년에 의욕적으로 ‘문화가 있는 산업단지’5개 사업, 84억 원 사업을 부처 합동으로 추진하면서 정작 하나밖에 없는 국가문화산업단지에는 일체의 예산을 끊어버린 것은 매우 비문화적이다.
무엇보다 국민의 독서 활동을 돕는 ‘국민독서문화 증진 지원’ 사업 예산이 올해 전액 삭감되어 원성이 매우 높았음에도, 내년 예산으로 반영되지 않은 채 명목만 비슷하게 하여 복원이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전국 지자체에서 펼치는 영·유아 북스타트 관련 지원 사업, 방방곡곡 지역서점에서 펼치던 작가 초청 강연회 등의 문화활동 지원, 각계각층의 시민이 참여하던 독서동아리 공모 지원 사업, 중앙정부와 민간단체들이 의기투합해 벌였던 ‘책의 해’ 지원 사업2025년 ‘그림책의 해’ 예정 등 전 국민이 수혜자인 다수의 사업 예산이 반영되지 않아, 올해처럼 내년에도 제대로 시행되기 어려울 전망이다. 문체부 장관이 10월 28일 문체부 소속 기관 청년들과의 정책간담회에서 “출판, 독서 예산이 너무 줄었다는 이야기가 많아 내년 예산은 회복을 시켜놨어요.”라고 말한 것이 오보가 아니길 바란다. 출판계와 서점계, 독서계가 바라는 항목의 예산은 전혀 회복되지 않았다.
예산만의 문제가 아니다. 출판문화산업진흥법에 따른 5년 단위의 중기 법정法定 계획인 「제5차 출판문화산업 진흥계획2022~2026」, 독서문화진흥법에 따른 「제4차 독서문화 진흥 기본계획2024~2028」 등과 내년 사업들과의 연계성이 매우 미흡하여 ‘중기 계획 따로, 매년 시행 사업 따로’인 상황도 개선되지 않고 있다. 국민과 이해관계자들의 총의를 모아 만든 출판 관련 양대 기본계획이라면 사업과 예산에 분명히 반영되어야 하는데, 기본계획이 부실해서인지, 기본계획을 무시해서인지 그 연계성이 뚜렷하지 않다.
매년 예산 수립 과정에서 출판산업계와 독서문화계 등의 참여와 논의를 통해 한정된 예산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 바람직함에도 불구하고, 예산 관련 모든 의사결정을 문체부와 기재부가 폐쇄적으로 독점하는 행정 체계와 정책 수요자 배제 현상은 분명히 혁신할 필요가 있다. 이는 출판 분야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민과 민간을 위해 정부의 정책 행위가 필요한 것인데, 왜 소통하지 않고 과거의 일방통행식 행정 체계를 답습하는지 모를 일이다. 예산만이 아니라 정책의 철학과 방향성, 법과 제도 등 비예산 사업의 시행에서도 정부의 역할은 매우 막중하다. 국민과 충분히 소통하고 설득하며, 국민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문화행정이 되기를 바란다.
나아가 교육부학술원 우수도서 선정·구매 사업, 국방부의 진중문고 배포 사업,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환경부의 우수도서 선정 사업 등과 같은 중앙정부의 도서 수요 창출 정책을 범부처로 확산하고, 책이 부처별 정책에서도 불가결한 일부가 되도록 하는 의욕적인 정책이 필요하다. 외교부해외에 한국 관련 도서 기증, 법무부재소자 교화용 도서 구입 비치, 보건복지부복지시설 등에 기본 도서 지원, 고용노동부고용 창출 관련 도서 구입 지원, 여성가족부다문화가정 도서 지원 등 모든 부처에서 책을 통해 펼칠 수 있는 사업들이 적지 않다. 출판정책이 문체부로만 제한되고 중앙부처 내의 연계 체계가 미비한 현실을 타개할 필요가 있다.
출판 활동에서 비롯되는 책과 독서는 민주주의와 지식복지, 나아가 대한민국의 미래를 만드는 씨앗이자 토대다. 이른바 문화 선진국 중에서 출판 선진국이 아닌 나라가 없다는 사실은 한 나라의 역사와 문화, 교육과 학술, 산업과 예술의 온축이 출판으로 집약되어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출판문화산업이 문화와 콘텐츠의 원천으로서 온전히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정책을 수립하는 것은 산업정책으로서만이 아니라 문화정책, 교육정책, 복지정책이기도 하다. 정부는 출판산업의 성장과 독서복지를 바탕으로 책 읽는 나라를 만드는 데 더 많은 관심과 예산을 투입해야 한다.
문체부 예산에서 출판 관련 예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0.65% 수준으로 여전히 1% 미만이다. 독서 진흥 예산이 포함된 출판산업 예산이 윤석열 정부 임기 안에 문화재정 중에서 최소 1% 이상이 되도록 적극적인 예산 증액 노력이 필요하다. 미래를 여는 원천은 상상력이고 그 기반은 책에 있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책과 담쌓은 나라’에서 ‘책 읽는 나라’로 나아가는 견인차가 되기를 바란다. 노벨상 시대에 윤석열 정부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내년도 출판 예산 관련 요구 사항은 다음과 같다.
1. 올해 전액 삭감된 후 내년 예산안에도 반영되지 않은 ‘국민독서문화 증진 지원’ 사업 예산약 60억 원을 100억 원 수준으로 확대 복원하여, 국민의 삶에서 책과 친화적인 환경이 조성될 수 있도록 국회가 노력해야 한다.
2. 서울국제도서전 및 해외 국제도서전에 대한 민간 주도 지원 사업 예산을 편성하고, 국내 유일의 국가문화산업단지인 파주출판도시의 경쟁력 강화 예산을 편성해야 한다.
★이 글은 문화연대, 블랙리스트 이후, 한국독립영화협회,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회의원 강유정·민형배·이기헌 공동주최로 2024년 11월 4일 국회의원회관 제7간담회실에서 개최된 「윤석열 정부 2025년도 문화체육관광 예산 토론회」에서 발표된 토론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