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제2회 북스타트 주간 ─ 올해의 테마 '집' |
집이란 무엇인가
어릴 적, 제가 살았던 바닷가 도시에는 일제강점기에 지은 적산가옥이 많았습니다. 우리 집에도 다다미방과 함께 일본식 공간이 여럿 있었고, 벽장과 다락은 까다로운 울보 막내의 전용 쉘터shelter였지요. 다락은 오빠들이 무동을 태워 올려줘야 했지만, 벽장은 언제든 마음껏 누릴 수 있었어요. 옆으로 기다란 이 공간은 대여섯 짝의 문으로 쉽게 여닫을 수 있어 친구와 함께 소꿉놀이를 하거나 혼자 숨어들기 좋았습니다. 이런저런 울분을 홀로 중얼거리거나 나른히 한숨 잘 수도 있었던 진정한 ‘나의 집’, 나만의 완벽한 안식처였던 그곳이 이따금 떠오르곤 합니다.
0세부터 100세가 함께 즐기는 예술품, 상상과 현실 이야기를 누리기에 더없이 좋은 그림책으로 ‘집’ 주제 목록을 만들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과 어제 및 내일의 꿈을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나의 집’ 그림책
『새들이 노래하는 집』(신시아 라일런트 글, 케이티 하네트 그림, 김경희 옮김) |
『안녕, 우리 집』(스테파니 파슬리 레디어드 글, 크리스 사사키 그림, 이상희 옮김) |
‘나의 집’을 노래하는 그림책들에는 집에 대한 보편적 정보와 작가만의 감성이 글과 그림으로 녹아 있습니다. 『새들이 노래하는 집』에서는 신시아 라일런트가 ‘집이란 비를 피해/ 후다닥 달려 들어가는 곳.’이라고 쓴 시에 케이티 하네트는 채 닫히지 않은 현관문 안쪽에서 비옷을 입은 엄마가 무릎을 꿇은 채 아이들의 장화를 벗기는 장면을 그렸어요. 거실로 통하는 문간에는 노란 꽃과 물방울무늬 깔개와 비 내리는 풍경 그림과, 등장인물이 후다닥 달려 들어왔음을 보여주는 가방들, 읽다 만 책과 아이들이 들여온 나뭇잎과 조약돌, 이제 곧 엄마가 내어줄 따스한 간식을 기대하는 듯한 아이들 모습과 비 냄새 풍기는 소동을 물끄러미 돌아보는 개가 보입니다. 스테파니 파슬리 레디어드와 크리스 사사키의 『안녕, 우리 집』에서는 강아지와 함께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아이가 ‘창문, 현관문, 깔개, 내 신발상자’라고 ‘나의 집’을 시로 노래하는 장면에서 눈앞에 펼쳐진 집안 풍경을 그대로 그리고 있어요. 우리 아이들이 집안으로 들어올 때 무엇이 보일지, ‘나의 집’에 들어선 안도감이 어떨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만희네 집』(권윤덕 지음) |
『우리 집에 유령이 살고 있어요!』(올리버 제퍼스 지음, 신수진 옮김) |
『낮잠 자는 집』(오드리 우드 글, 돈 우드 그림, 조숙은 옮김) |
주인공을 따라 집안 곳곳을 탐색하고 구경할 수 있는 그림책도 있습니다. 권윤덕의 『만희네 집』에서는 조부모, 부모와 함께 살아가는 아이 만희의 시점으로 1990년대 단독주택 안팎을 샅샅이 들여다보게 해줍니다. 『우리 집에 유령이 살고 있어요!』는 반투명 트레이싱지에 숨어있는 유령 찾기를 즐기는 가운데, 작가 올리버 제퍼스가 40권이 넘는 문헌을 참고해 그려낸 300년 전 고딕풍 저택을 감상할 수 있어요. 부부 작가 오드리 우드와 돈 우드의 『낮잠 자는 집』에서는 작가들의 침실을 재현한 공간 단 한 군데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무려 열세 장면의 즐거운 소동을 즐길 수 있습니다.
이사와 이주,
잠깐 또는 영영 집을 떠나거나 잃은 이야기
『이사 안 가기 대작전』(수지 모건스턴 글, 세르주 블로크 그림, 이정주 옮김) |
『집으로 돌아가는 길』(리타 시네이루 글, 라이아 도메네크 그림, 김현균 옮김) |
포근하고 안전한 집에 돌아오기 위해 바깥으로 나가고 떠나는 이야기가 필요한 걸지도 모릅니다. 한 존재가 머물며 살아가는 공간으로서의 집은 주인공을 가까이 또는 멀리 떠나게 하고, 조만간에 혹은 오랜만에 돌아오게 해요. 어른들의 결정으로 이사하고 이주하는 일, 즉 ‘집’을 떠나는 데에는 무엇보다 어린 구성원을 위한 충분한 사전 설명이 필요합니다. 수지 모건스턴과 세르주 블로크의 『이사 안 가기 대작전』에서는 주인공 아이가 자기 집과 그 일상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세세히 이야기해요. 어느 날 갑자기 아빠의 새 직장을 따라 집을 옮겨야 한다는 통보에 ‘이 집을 절대로 떠나지 않기’로 결심하며 침대 밑으로 숨지요. 리타 시네이루와 라이아 도메네크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전쟁으로 집을 떠나 난민수용소에서 생활하며 ‘집으로 데려다 줄 행렬에 서길 꿈꾸는’ 주인공 아이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오래된 집
이야기
『작은 집 이야기』(버지니아 리 버튼 지음, 홍연미 옮김) |
『그 집 이야기』(존 패트릭 루이스 글, 로베르토 인노첸티 그림, 백계문 옮김) |
『안녕, 우리들의 집』(김한울 지음) |
『나의 작은 집』(김선진 지음) |
『나의 둔촌 아파트』(김민지 지음) |
그림책의 고전이 된 버지니아 리 버튼의 『작은 집 이야기』는 사과나무 언덕의 작은 집 한 채가 세월의 흐름을 겪으면서 대도시 한복판으로 나앉게 됩니다. 다행히 비슷한 풍경 속으로 옮겨진다는 해피엔딩 이야기 속에 미국의 문명사가 음각돼 있어요. 100년에 걸쳐 변모하는 이탈리아의 한 농가를 그려 보인 존 패트릭 루이스와 로베르토 인노첸티의 『그 집 이야기』에서는 사람과 자연과 공간의 역사가 펼쳐집니다. 김한울의 『안녕, 우리들의 집』, 김선진의 『나의 작은 집』, 김민지의 『나의 둔촌 아파트』도 각각 주인공의 거처와 함께 변모하는 풍경과 삶을 그려냄으로써 ‘집’이란 공간이자 장소이며 생명을 지닌 유기체라는 사실을 성찰하게 합니다.
우화의 주요 배경 공간이 되는
집 이야기
『늑대가 들려주는 아기 돼지 삼형제 이야기』(존 셰스카 글, 레인 스미스 그림) |
『집 나가자 꿀꿀꿀』 (야규 마치코 지음) |
『우리 집은 너무 좁아』(마고 제마크 지음, 이미영 옮김) |
존 셰스카와 레인 스미스의 『늑대가 들려주는 아기 돼지 삼형제 이야기』는 옛이야기 『아기 돼지 삼형제』의 안타고니스트로 등장하는 늑대 입장에서 상황을 재화한 패러디 그림책이에요. 안정된 독립을 구현하는 공간으로 집을 건축합니다. 역시 『아기 돼지 삼형제』의 패러디 그림책인 야규 마치코의 『집 나가자 꿀꿀꿀』에서는 개구지게 굴다가 엄마한테 야단맞은 삼형제가 집을 떠나요. 토끼네, 악어네, 까마귀네 집에서 각각 살아본 다음에 엄마가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는 낯익고도 새로운 이야기를 발랄한 그림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마고 제마크의 『우리 집은 너무 좁아』는 단칸 오두막집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가난한 불행과 넉넉한 행복에 대한 이스라엘 옛이야기입니다. 능란한 드로잉과 투명한 채색 그림으로 이름난 작품이지요.
옆집 앞집 뒷집
윗집 아랫집 이야기
『뒷집 준범이』 (이혜란 지음) |
『아랫집 윗집 사이에』(최명숙 지음) |
『층간소음의 비밀』(변정원 지음) |
『쿵쿵 아파트』(전승배, 강인숙 지음) |
『텅 빈 냉장고』(가에탕 도레뮈스 지음, 박상은 옮김) |
『모두를 위한 단풍나무집』(임정은 지음, 문종훈 그림) |
집을 중심으로 타자화된 이웃과의 관계 맺기를 보여주는 그림책들은 다양한 사회문제를 조명합니다. 이혜란의 『뒷집 준범이』에서는 일 나간 할머니가 돌아올 때까지 홀로 지내는 조손가정의 어린 준범이가 앞뒷집 아이들과 어울리면서 자연스레 이웃 어른의 보살핌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가 담백한 연필 그림으로 펼쳐져요. 최명숙의 『아랫집 윗집 사이에』, 변정원의 『층간소음의 비밀』, 전승배와 강인숙의 『쿵쿵 아파트』는 층간소음 문제를 중심에 놓고 공동주택이라는 동시대 주거 공간으로서의 ‘집’을 성찰할 수 있게 해요. 가에탕 도레뮈스의 『텅 빈 냉장고』 또한 공동주택을 냉장고 이미지로 상징하면서 이웃이 함께 음식을 만들어 먹는 어느 저녁의 작고 다정한 공동체를 그려 보이고요. 임정은과 문종훈의 『모두를 위한 단풍나무집』에서는 주거 문제를 겪는 청년들이 함께 대안적인 공동주택을 구현하고 진정한 ‘모두의 집’을 만들어나가는 노력을 담고 있어요. 집이 경제적 자산이기보다 개인과 공동체 모두를 위한 진정한 처소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집에 대해 좀더 넓고 깊게
생각할 수 있는 그림책
『이 집은 나를 위한 집』(마리 앤 호버맨 지음, 베티 프레이저 그림, 엄혜숙 옮김) |
『나의 집』(다비드 칼리 지음, 세바스티앙 무랭 그림, 바람숲아이 옮김) |
‘장갑은 손, 손의 집/ 긴 양말은 무릎의 집’이라고 노래하는 마리 앤 호버맨과 베티 프레이저의 『이 집은 나를 위한 집』은 세상 모든 생명과 물건이 깃들어 사는 거처로서 집을 바라볼 수 있게 해줘요. 다비드 칼리와 세바스티앙 무랭의 『나의 집』은 주인공이 고향을 떠나 생애주기 및 변화하는 직업에 따라 떠도는 가운데 이상적인 거처를 찾는 시간을 그리고 있지요.
다시,
집이란 무엇인가
그림책은 아이와 어른이 함께 바람직한 생각을 익히고 나누기에 더없이 좋은 일상 예술입니다. ‘집’ 주제 그림책을 통해 무엇보다도 집이란 서로를 존중하고 보살피는 가족공동체의 공유 공간임을 상기할 수 있길 바랍니다. 그림책 장면 그대로 책과 꽃과 베개가 있고, 정성껏 차린 식탁에 가족이 모여 앉는 건강한 일상의 공간― 그것이 벽 너머 옆집과 앞집과 뒷집, 윗집과 아랫집에도 구현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