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사회
그래서 두 분 다 마을문고 현장을 떠나셨군요. 교수님은 훨씬 더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았지만 선생님은 그때 이미 은퇴할 나이인 60대가 되셨는데 그런데도 또 새로운 일을 하셨지요. 그게 바로 대한도서관연구회인데, 연구회가 발족한 시기가 1983년 1월이었습니다. 준비하는 시기까지 감안하면 한시도 쉬지 않으셨다는 것이 짐작됩니다. 처음부터 대한도서관연구회를 만들 생각을 하지 않으셨을 텐데 어떻게 하게 되었습니까?
이용남
처음엔 시간도 있고 하니 산책하듯이 지역 공공도서관을 돌아보셨어요. 그때 우리나라에 공공도서관이 160개 정도였어요. 마을문고운동 20년 만에 공공도서관은 10배가량 늘었지요. 그런데 도서관 시설과 운영 실태를 보니 형편없었어요. 선생님은 말 그대로 도서관에서 산전수전 다 겪으신 분이니 무척 안타까우셨겠지요.
사회
경주도서관장부터 도협 사무국장, 마을문고운동까지 정말 그러네요. 더구나 선생님은 마을문고운동이 성장해서 공공도서관으로 발전하거나 연계망을 형성하기를 기대하셨다는 것을 여러 글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그렇게 되지 못했으니 실망도 많이 하셨겠네요.
이용남
그래서 이제는 도서관을 제 목적에 맞게 바꿔내야겠다는 생각을 하시고 사람들을 모았어요. 그런데 쉽게 모이지 않았어요. 저야 선생님을 오랫동안 모셨으니 선생님 뜻에 따랐던 거고, 지금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이 된 당시 국립중앙도서관 역삼분관장이던 조원호 선생하고 셋이서 의기투합한 겁니다.
사회
조원호 선생님은 얼마 전에 돌아가셨지요?
이용남
네, 오랜 투병 끝에 지난 7월에 돌아가셨습니다. 건강하게 살아계셨다면 이 자리에 꼭 나오셨어야 할 분이죠.
사회
대한도서관연구회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당시에 간사로 활동하셨던 정선애 서울 관악문화관도서관 사서과장님을 모시겠습니다.
정선애
저는 대한도서관연구회 간사로 약 3년간 일을 했고, 지금은 서울 관악문화관도서관 사서과장으로 있습니다.
사회
어떻게 선생님과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까?
정선애
대학 4학년 때 졸업논문을 쓰기 위해 선생님을 찾아뵈었습니다. 논문을 마을문고에 대해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전화드렸는데, 전화드릴 때마다 계속 지방 가신다고 바빠서 시간이 없다 하셔서 뵙기 어려웠습니다. 제가 눈치가 없어서 시간 없다고 하시면 곧이곧대로 듣고 언제 돌아오시냐고 여쭤보고 열흘 후다 그러시면 열흘 후에 또 전화 드리고 또 시간이 없다 하시면 언제쯤 시간 되시냐고 여쭤보고 보름이나 지나야 된다고 하시면 보름 후에 또 전화 드렸습니다. 열 번쯤 전화 드려서 정말 어렵게 교보문고에서 만났습니다. 차 한 잔 사주시고 찬찬히 살펴보시더니 그 자리에서 바로 “지금부터 내 조수 할래?” 하시는데, 대한도서관연구회가 있는지도 뭘 하는지도 모르고 무조건 “네.” 하고 그 자리에서 조수로 채용돼서 그길로 청진동에 있는 잡지회관 가시는데 따라가서 시키시는 대로 조수 노릇했습니다. 나중에 보니 회보 발간 준비하시는 거였더라고요.
사회
정선애 과장님께서 느끼신 선생님에 대한 인상에 대해 말씀해주시죠.
정선애
처음 만나 뵌 날 조수하면서 잡지회관이랑 인쇄소 등 몇 군데 볼일 보시고, 역삼동 국립중앙도서관 분관 사무실에 들어오셔서 한 시간 가량 말씀하셨는데 처음으로 제가 도서관에 대하여 고민하게 된 계기였어요. 그때 하신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사회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정선애
우리나라 공공도서관은 도서관으로 역할을 못하고 국민의 세금으로 독서실을 운영하고 있다. 도서관 현실이 어떠한지도 모르고 대학에서 분류, 목록, 학문 배워봤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도서관이 제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학문이나 기술적인 실무가 필요한 것이다. 공공도서관 정상화는 정부에서 알아서 해주면 좋지만 우리 현실이 그렇지 못하니 도서관의 변화를 위해서 사서들 스스로 노력해서 쟁취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행정기관만 원망하고 있는데 공무원들은 스쳐가는 자리일 뿐이다. 사서들이 노력해서 권리를 찾아야 한다. 그런 말씀하시는데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라 충격이었습니다. 도서관의 기본은 공공도서관과 학교 도서관이다. 누구나 손쉽게 책을 읽을 수 있는 곳에 공공도서관 있어야 하고 제 역할을 해야 하지만, 우리 현실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공공도서관이 목적에 맞는 역할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필생사업으로 공공도서관 운동을 시작했는데, 개인이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대한도서관연구회란 단체를 만들어서 하는 거다. 누구도 우리 단체에 관심 없지만 그래도 우리는 우리가 할 일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회
대한도서관연구회 회보는 지금 봐도 참 볼품없습니다. 그냥 버리기 쉽게 만들어졌는데요. 사실은 이 회보에는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회보 때문에 겪은 이야기를 좀 해주시죠.
정선애
제가 눈물이 굉장히 흔한 편인데요. 〈오늘의 도서관〉 발간하고 배포할 때,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려고 하네요. 회장님하고 이용남 교수님, 조원호 분관장님 세 분이서 편집회의 하시고, 원고 쓰시고, 교수님이 레이아웃 정하시면 회장님께서 다음날 인쇄소 넘기시고 주로 전국 공공도서관 순회 가세요. 회보 발송할 때 지방 언론사와 관공서에는 우편으로 발송했지만, 중앙에는 언론사 담당 부장과 논설위원실, 서울시교육청 등 행정관청 계장급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는 담당자 개개인 책상에 직접 배달했습니다. 직접 배달할 때는 회장님께서 정문까지 차로 태워다 주시는 경우도 있지만, 지방 공공도서관 순회 가시면 혼자 그 무거운 보따리 들고 버스 타고 갔는데 정문 들어가서 잡상인 취급받고 경비한테 쫓겨날 때 정말 창피해서 울면서 버스도 못 타고 택시 타고 사무실 들어온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동아일보는 경비가 제 얼굴을 외워서 나중에 정문 안에 들어서기만 하면 바로 내쫓더라고요. 이런 일로 제가 싫어하는 내색하면 회장님은 “네가 뿌린 회보 중에서 한 부라도 중요한 사람 눈에 띄어서 작은 불씨가 되면 도서관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 그러시면 아무 말도 못하고 또 해야 했지요.
사회
대한도서관연구회 활동을 하시면서 가장 먼저 하신 것이 이동도서관 사업인데 이동도서관을 만든 이야기를 좀 해주시죠.
이용남
그때 이미 일본에는 이동도서관이 활성화되어 있었고, 저도 1970년대 미국 연수를 통해 이동도서관을 경험했습니다. 선생님은 전국 공공도서관을 직접 찾아다니면서 문제점을 고민하셨어요. 가장 큰 문제가 도서관이 공부방으로 인식되고 있는 문제였어요. 그걸 바꾸려면 도서관이 자료 중심으로 바뀌어야 하는데 쉽지 않았어요. 대부분 도서관 자료실이 폐가제로 운영되고 있었고, 입관료도 받고 있는 등 많은 문제점이 있었어요. 그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기 위한 것이 이동도서관이었지요. 그래서 제가 세계 각국의 이동도서관 관련 자료를 조사하고, 선생님은 일본으로 가서 일본의 이동도서관 실태를 파악하고, 이동도서관 차량 제작공장까지 가서 도면을 얻었지요. 그리고 그걸 바탕으로 역삼분관에서 타이탄 트럭을 개조해서 시범 운영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법도 문제가 됐었고, 우리나라 자동차 회사에서는 이동도서관 차량이 제작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신문광고를 보던 중 우리는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바로 ‘북모빌’이란 문구였습니다. 아시아자동차 ─ 지금 기아자동차지요. ─ 특장차 광고였는데 그걸 보고 바로 찾아갔지요. 그랬더니 담당자가 당황해 하는 겁니다. 아마 외국의 특장차 광고를 참고해서 문안을 만든 것 같았어요. 이런 우여곡절 끝에 이동도서관이 나온 겁니다.
사회
요즘에는 전부 이동도서관이라는 말을 쓰고 있지만, 그때는 자동차도서관이란 말을 쓰셨습니다. 뭔가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말씀해주시죠.
이용남
당시는 자동차에 책을 싣고 집 가까이 가서 운영하는 이동도서관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동도서관이라고 하면 순회문고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 자동차라는 이미지를 직접적으로 강조하기 위해 선택한 용어였습니다. 물론 요즘에는 이동도서관이라고 하면 전부 자동차도서관을 말하지요.
사회
이 이동도서관을 전국적으로 활성화한 데는 도서관과 별 상관없을 것 같은 회사가 등장합니다. 바로 MBC 문화방송인데요. 방송국에서 이동도서관을 운영했다니, 그것도 무료로요. 참 특이한 일인데요. 어떻게 하게 되었습니까?
이용남
선생님은 오래전부터 언론의 중요성을 잘 알고 계셨고, 또 잘 이용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이동도서관 모델을 만들고 언론사 기업체들과 접촉을 열심히 했어요. 그때 MBC 관리 이사로 있었던 김병주란 분이 적극적으로 나섰지요. 관리 이사라고 하면 운영비를 책임지던 중요한 자리였거든요. 이분과 선생님이 함께하셔서 전국 20여 개 지방 방송국을 중심으로 총 64개의 이동도서관을 설치할 계획을 세우고, 가장 먼저 1984년 2월에 안동방송국을 시작으로 강릉, 청주, 대구 등에도 이동도서관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이후 김병주 씨가 지방 방송국 사장으로 가고 계획대로 제대로 운영되지는 못했지요.
사회
김병주 씨하고 교수님하고는 잘 알고 지내셨습니까?
이용남
저는 잘 몰라요. 아마 조원호 선생은 알 수도 있었겠지요. 저는 학교생활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학과도 신설학과여서 학교 일에 많이 신경을 썼고, 가끔씩 도와드렸지요. 그 대신 조원호 선생과 엄 선생님은 자주 만나서 일을 하셨지요.
사회
이밖에도 대한도서관연구회에서는 여러 일을 했습니다. 개가제 및 관외대출운동, 입관료 폐지운동, 도서관법 개정운동, 도서관 평가 작업에 간송도서관문화상까지 많은 일을 했는데 여기에 대해 말씀해주시죠.
이용남
당시 대부분 공공도서관은 자료이용보다는 공부방 중심이었어요. 도서관 건물을 지을 때도 공부방에 초점을 맞추어 건물을 지었어요. 그러니 자료 확충이나 자료실 운영은 엉망이었지요. 심지어는 자물쇠로 서고를 잠가 놓는 일이 비일비재했지요. 그래서 정확한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2년에 걸쳐 선생님께서 전국 모든 공공도서관을 방문하셨어요. 그리고 문제점과 함께 해결책을 만들었지요. 심지어는 울릉도 도서관 한 곳을 보기 위해 3박 4일 출장을 다녀오셨지요.
사회
그것이 언론과 방송을 탄 것이군요.
이용남
네, 중앙 일간지들은 대부분 보도를 했고, KBS 〈뉴스파노라마〉, 〈추적 60분〉에서도 방송을 했지요. 이런 노력 때문에 1980년대 중반 이후 설립된 도서관에서는 처음부터 개가제로 운영했습니다. 울산중부도서관, 김해도서관이 대표적이죠.
사회
이밖에 도서관법 개정은 법이 제정된 지 24년 만인 1987년에 개정이 되어 의미가 큰 활동이었고, 입관료 폐지운동도 꾸준히 펼친 끝에 1991년에 완전히 폐지 시켰지 않습니까?
이용남
대한도서관연구회에서 전적으로 했다는 건 아니고, 중심이 되어 여러 도서관인들이 힘을 모아 이루어낸 것이지요.
사회
앞의 일은 도서관인들이 함께 했지만, 도서관 평가 작업과 간송도서관문화상 시상은 거의 선생님 혼자서 하신 것으로 생각되는데 어떻습니까?
이용남
거의 혼자서 하셨어요. 처음 우리나라 도서관 실태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전국공공도서관을 돌면서 이 도서관은 이런 문제점, 저런 문제점 등 꼼꼼히 정리하셨어요. 그걸 대한도서관연구회 사무실에 상황판을 만들어 걸어두셨어요. 지도 위에 핀으로 꽂아가면서요. 이렇게 조사한 것을 바탕으로 공공도서관 평가 작업을 하신 거지요.
사회
정선애 과장님은 그때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 텐데 말씀해주시죠.
정선애
회장님께서 전국 도서관을 순회하시면서 조사해 온 자료를 기초로 하고, 부족한 것은 국립중앙도서관 공공도서관협의회에서 나오는 통계조사를 참고해서 점수를 줘서 총점을 가지고 등급을 매겼습니다. 전국 도서관 지도를 벽면에 꽉 차게 만들었는데 그렇게 큰 지도가 없으니까 전지 9장 정도에 직접 도서관 지도를 그려서 모아 붙여 놓았습니다. 도서관을 A, B, C, D 등급으로 구분해서 색깔과 모양을 다르게 꽃을 꽂아서 한눈에 등급을 알 수 있게 평가표시를 했습니다. 전국에서 처음이었기 때문에 등급 보러 오시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그때 전국 공공도서관 순회하시면서 발굴하신 분이 울진도서관 이이종 관장님이신데 서울 오시면 선생님 댁에서 함께 머무르시면서 도서관을 어떻게 할까 많은 이야기를 하셨지요. 그리고 이이종 관장님을 서울로 불러올릴 계획도 가지셨는데 공무원을 불러올렸다가 생활 보장을 못 해 드리면 안 되니까 결국 못하셨어요.
사회
지금은 해마다 한국도서관협회에서 도서관 평가 작업을 하고 있지만 그때는 연구회에서 했으니 평가를 인정하지 않는 도서관도 많았겠습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지금은 당연시되는 관외대출 여부, 개가제 여부가 중요한 평가항목으로 되어있습니다.
이용남
당연히 안 좋아했지요. 반발이 아주 심했어요. 맨날 언론을 통해 공격만 하는 단체를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사회
그래도 이 평가 작업이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도된 공공도서관 평가라는데 큰 의미를 가집니다. 또한, 이것이 바탕이 되어 요즘처럼 상시적인 평가가 이루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용남
그렇지요.
사회
간송도서관문화상은 개인이 제정한 최초의 도서관 관련 상이라는 데 큰 의미를 가지는데 어떻게 만들었고 어떤 분들이 받았습니까?
이용남
선생님이 전국 도서관을 돌면서 그래도 제대로 도서관을 운영하려는 의지와 노력을 보인 도서관을 발견했어요. 대표적인 분이 울진도서관의 이이종 관장이었지요. 울진 하면 지금도 외진 곳인데 거기서 도서관은 좀 더 외진 초등학교 뒤에 있었어요. 그런데 정말 도서관을 훌륭히 운영했지요. 그리고 수원도서관도 마찬가지였고요. 선생님께 막사이사이상 받은 상금이 조금 남아 있었어요. 그래서 이 상금을 운영기금으로 해서 시상했습니다. 1986년 1회는 이이종 관장이, 2회는 1987년에 수원도서관이 단체상을 수상했지요.
사회
사실 간송도서관문화상은 2회까지만 수상자가 나오고 더이상 나오지 않았습니다. 또한, 대한도서관연구회의 마지막 공식 활동이고요. 어떻게 된 것입니까?
이용남
재정도 많이 어려웠고, 더구나 선생님 건강이 많이 안 좋아지셨어요. 그래서 아드님이 계신 미국으로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셨어요. 그래서 1988년 무렵 미국으로 가신 거지요.
사회
그렇게 선생님의 도서관활동이 막을 내린 것이군요. 30대에 처음 도서관운동에 발을 내디딘 이래 무려 37년이나 도서관운동에 헌신하신 선생님을 생각하면 존경심이 저절로 생깁니다. 저도 도서관운동 언저리에 있지만 그렇게 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선생님의 활동을 도서관운동가로 이야기했습니다. 엄대섭 선생님을 단순한 운동가가 아닌 도서관사상가로 이야기하는 분도 있습니다. 사실 선생님의 활동을 살펴보면 그때그때 상황에 맞추어 대처한 운동이 아니라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활동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이런 것에 대해 이야기해주실 분을 모시겠습니다. 부산대학교 이용재 교수님 나와 주시죠.
이용재
(무대에 나오며) 반갑습니다.
사회
이용재 교수님은 제가 알기로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도서관운동론을 강의하시는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이용재
제가 학부에서는 도서관운동론을, 대학원에서는 도서관 사상을 강의하고 있는데, 여기서 엄대섭 선생님은 빼놓을 수 없지요. 그리고 대신 사과의 말씀을 드리면 이 자리에 제 스승이자 부산대학교 문헌정보학과를 세우신 김정근 교수님께서 참석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만, 김정근 교수님이 올해 부산문화상 수상자가 되셨는데 마침 오늘이 수상식 날입니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참석하지 못한 점 아쉽게 생각합니다.
사회
김정근 교수님은 엄대섭 선생님과 인연도 꽤 있으시죠?
이용재
네, 엄대섭 선생의 ‘우리 학계에 외인부대 용병의 체취를 느낀다’는 말에 김정근 교수님이 적극 호응하셔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셨습니다. 우리나라에 계실 때 부산에 오시면 교수님 댁에서 주무시면서 학생들과 함께 토론도 하셨답니다.
사회
외인부대 용병의 체취라! 여기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말씀해주시죠.
이용재
1980년대 각 문헌정보학과에는 공공도서관에 대한 과목이 정규과목으로 채택되어 있긴 했지만 비중이 아주 적었습니다. 또한, 졸업생 가운데 공공도서관으로 취업하는 이들도 많지 않았고요. 당시 공공도서관 수도 절대적으로 적었고, 사서직 공무원에 대한 대우도 아주 열악했거든요. 학교에서는 구미의 아주 선진적인 공공도서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우리 공공도서관 현실은 그렇지 못하니 학교 수업과 현장의 괴리감이 매우 컸습니다. 그런데 부산대학에서는 김정근 교수님을 중심으로 학생들에게 공공도서관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가르쳤습니다. 학생들에게 직접 공공도서관 현장을 방문하고 느낀 점을 토론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외인부대라는 말이 나온 겁니다.
사회
말씀을 듣고 보니 외인부대 용병론은 문헌정보학뿐만 아니라 외국에서 도입된 많은 학문에서 새겨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김정근 교수님은 선생님 관련 많은 자료도 소장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떤 자료들이 있습니까?
이용재
이 자리에 전시된 〈오늘의 도서관〉 회보, 대한도서관연구회 정관, 대한도서관연구회 회비납부영수증, 친필 편지, 연하장, 간송도서관문화상 자료 등이 김정근 교수님 소장자료입니다.
사회
아무리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라도 대단합니다.
이용재
이 자료들이 그래도 꽤 요긴하게 쓰였습니다. 우리 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연옥 선생의 《한국 공공도서관 운동사》와 석사학위를 받은 최진욱 선생의 〈엄대섭의 공공도서관 사상 연구〉, 두 논문에 기초자료로 아주 요긴하게 쓰였습니다.
사회
교수님은 엄대섭 선생님을 운동가에서 사상가로 끌어올리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습니까?
이용재
네, 저는 오래전부터 엄대섭 선생을 사상가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꾸준히 자료조사를 하고 있었지요. 특히 제가 지도해서 올 2월에 나온 최진욱 선생의 논문 〈엄대섭의 공공도서관 사상 연구〉가 엄대섭 선생님을 공공도서관 사상가로 다룬 논문이죠. 알다시피 우리 문헌정보학은 순수 인문학이 아니라 현장에서 실천을 겸비한 학문입니다. 따라서 문헌정보학 사상가들은 현장을 바탕으로 사상을 정립한 분이죠. 독일의 라이프니츠, 인도의 도서관학자 랑가나단이 그렇고, 우리나라의 박봉석 선생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엄대섭 선생님만큼은 그냥 활동가 정도로만 인식되어 왔지요. 제가 제자와 함께 연구하다 보니 선생님은 분명한 사상가입니다.
사회
그럼 이제 선생님의 도서관 사상에 대해 본격적인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이용남 교수님께서는 1970년대 말에 이미 마을문고 이념을 네 가지로 정리를 하셨습니다. 마을문고운동에 한정된 것이긴 하지만 이 정리는 선생님의 활동을 사상가로 평가하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여기에 대해 이야기해주시죠.
이용남
첫째, 민중도서관운동, 둘째, 지식대중화의 구현, 셋째, 적극적인 도서관봉사공공도서관망의 최일선 거점, 넷째, 소도서관운동으로 이념을 정리했지요. 민중도서관운동은 앞서 말했지만, 이용자 스스로 도서관을 만들고 가꾸어가는 ‘민중에 의한 민중의 도서관운동이요, 상향식 대중도서관운동’입니다. 지식대중화의 구현은 당시 도시와 농촌 간의 정보격차는 매우 컸습니다. 이런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 알 권리를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해야겠다는 민권의식을 구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이었습니다. 또한, 적극적인 도서관봉사는 건물이나 장서량 같이 외형에 치중하기보다는 공공도서관의 본질인 주민들이 필요한 자료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소도서관운동은 당시 공공도서관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열악한 상황에서 마을문고를 거점으로 공공도서관이 만들어지도록 유도하고, 공공도서관이 만들어지면 마을문고는 공공도서관의 분관이나 지역 거점인 배본소나 기탁소 역할을 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회
이 마을문고 이념을 들으니 선생님의 활동이 단순한 활동가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란 느낌이 오네요. 특히 마지막 소도서관 운동은 오늘날 작은도서관이 나갈 길을 제시해 주는 것 같아 의미가 더 특별하게 다가오네요.
이용재 교수님, 선생님의 도서관 사상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왜 교수님은 활동가를 넘어서 사상가로 판단하시는지 말씀해주시죠.
이용재
앞서 말씀드린 대로 우리 학문이 현장을 바탕으로 한 실천적인 학문이다 보니 활동가인지 사상가인지 헷갈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선생님은 처음엔 자신의 경험을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눌 것인지 고민한 끝에 시작한 것이 도서관운동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도서관운동은 결코 즉흥적으로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가며 한 운동이 아니라, 처음부터 장기적인 목표를 가지고 평생에 걸쳐 실천에 옮긴 도서관 사상가로 면모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수시로 닥친 위기 때 한두 번쯤은 쓰러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그런 적 없이 평생을 공공도서관 발전에 헌신해 온 분입니다. 첫째, 한국적 도서관, 둘째, 주민참여형 도서관, 셋째, 지식의 대중화, 넷째, 이용자 중심의 도서관, 다섯째, 평생교육의 거점으로서의 도서관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사회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죠.
이용재
우리나라 공공도서관에는 일제 잔재가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입관료라든지 공부방으로 전락한 것, 폐가제 문제, 사상 통제, 모든 것이 일제 잔재였지요. 이런 것을 해결하고 도서관 본래의 모습으로 돌려놓기 위한 우리 현실에 맞는 도서관을 구상하신 거지요. 그것이 마을문고였습니다. 마을문고는 주민들이 스스로 이용했기 때문에 이용료를 받지 않았고, 구성도 자료 중심이었고, 또한 자신들이 만든 문고였기 때문에 주인의식을 가지고 자유롭게 이용했지요. 이것은 바로 우리 현실에 맞는 한국적 도서관 모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마을문고는 도서관 운영자와 이용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몸이었습니다. 이용자가 수혜자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지요. 셋째, 지식의 대중화는 19세기에 생겨난 공공도서관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지식이 소수에게 독점되었던 때 근대 시민의식의 성장에 따라 지식을 함께 나누자는 의식이 생겨나고 이것이 공공도서관 설립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나라는 많이 늦었지요. 한국전쟁 직후 도시와 농촌 간의 인구는 비슷하지만 정보격차가 매우 컸습니다. 마을문고는 이것을 해결해 주었지요. 또한, 개가제 운동도 사상이 통제되던 시기에 자료를 자유롭게 이용할 있도록 변화시킨 것입니다. 넷째, 이용자 중심의 도서관은 1960~70년대 공공도서관 수도 절대적으로 적었고, 자리잡은 곳도 외진 곳이 많아 이용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마을문고운동은 이용자들이 가장 많이 모이고 쉽게 모여서 마을의 대소사를 의논하고 온갖 정보가 오고 가는 마을회관에 세워졌기 때문에 철저하게 이용자들 속에서 함께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평생교육의 거점으로서의 도서관은 말 그대로 학교가 아닌 모든 사회교육이 이루어지는 곳이 도서관입니다. 도서관에서 하는 전시회, 강좌 등 프로그램이 대변해주지요. 이런 것은 단순한 활동가의 영역을 넘어선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사회
교수님 말씀을 듣고 보니 선생님이 더욱 대단하게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용남, 이용재 교수님 두 분 모두 엄대섭 선생님 관련 책을 준비하고 계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좀 더 자세히 말씀해주시죠.
이용남
허허, 시기가 비슷하게 되었네요. 저는 정년 퇴임한 뒤부터 준비를 하고 있었지요. 그래서 얼마 전 엄대섭 선생님 평전 원고를 마무리하고 인쇄소에 넘겼습니다. 곧 나올 겁니다.
사회
선생님 평전이라 많은 기대가 됩니다. 이용재 교수님이 준비하고 계시는 책도 말씀해주시죠.
이용재
저는 제가 지도한 최진욱 선생의 학위논문 〈엄대섭의 공공도서관 사상 연구〉를 바탕으로 자료를 보강해서 선생님의 활동과 사상 면에서 준비하고 있습니다.
사회
두 분의 책 기대됩니다. 이야기는 아쉽지만 여기까지 하기로 하고 오늘 많은 분들이 함께 하셨는데 청중들과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청중 여러분들 가운데 하고 싶으신 질문이나 이야기가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이번 행사에 물심양면으로 함께하신 분들을 소개하면서 토크콘서트 〈엄대섭, 도서관에 바친 혼〉을 마칠까 합니다. 먼저, 최민련 울산 남목작은도서관 사서님, 최민련 사서님은 1990년대 초 울산지역에서 새마을 이동도서관 사서로 일하시면서 이번 행사에 최초 아이디어를 내주신 분입니다. 두 번째, 이번 행사를 주최하고 기획하신 오만석 울주문화예술회관 기획담당자님, 세 번째, 오영구 새마을 중앙회 문고 과장님, 오영구 과장님은 학생 때부터 엄대섭 선생님의 활동에 관심을 가지고 새마을문고운동에 함께하면서 지금까지 자리를 지켜 오신 분입니다. 특히 이번 행사에 중요한 전시자료와 내용이 만들어지는 데 많은 도움을 주신 분입니다. 그리고 최진욱 울산 북구 기적의도서관 주무관님, 최진욱 님은 엄대섭 선생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이번 행사에 내용적인 면을 정리하신 분입니다.
(다 함께 일어나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