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소년원 이야기 ③
그녀들과의 만남을 고대하며 92일이란 시간이 흘렀다. 드디어 수업이 가능하다는 연락이 왔다. 그녀들도 우리와의 만남을 기다렸을까? 궁금해졌다. 사전모임에서 작성했던 것들을 꺼내 하나씩 다시 읽어보고 얼굴도 떠올려보았다.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만나게 될까? 전날에는 종일 비가 내렸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면서 기다리고 기다리던 수업시간인데 비라니. 소풍 전날의 아이처럼 내일 날씨가 맑기를 기도했다.
오전 내내 비가 와서 걱정했는데 수업 전에 해님이 얼굴을 보여준 덕분일까? 파란 하늘과 흰 구름이 오랜만에 만나는 아이들과의 서먹함도 뽀송뽀송 말려버렸다. 설레는 마음으로 소년원에 도착했다. 출입하기 위한 과정이 복잡하다. 체온을 재고 이름을 적고 신분증을 맡겨 출입증과 바꾸었다. 교무과에 들려 서류에 사인을 하고 담당 선생님께 주의사항과 당부 말씀을 들었다. 아이들이 있는 관사로 들어가 입구에서 휴대전화를 반납하고, 방명록에 자취를 남겼다. 그 다음에 계단을 올라 교실로 향했다.
그녀들을 만나기 십 분 전, 살짝 긴장된 나는 컴퓨터를 켜고 수업준비를 했다. 교실 문이 활짝 열리며 밝게 상기된 친구들의 우렁찬 목소리 떼가 말을 쏟아놓았다. 그동안 심심했다고, 오랜만이라고, 너무 반갑다고, 자기 혹시 달라진 거 없냐고, 오늘은 뭐할 거냐고, 간식은 뭐냐고, 독서수업을 기다렸다고 말을 거는 아이들과 하이파이브로 인사를 나누고 시끌벅적하게 자리정돈을 하고 수업 시작을 알렸다.
오늘의 책 소개를 했다. 가방에서 빨간색의 커다란 책을 꺼내자 아이들은 이내 호기심을 보였다. 책을 받아 펼쳐보고 그것이 그림책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표정관리를 힘들어했다. 각자 책을 읽고 감상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그림책을 읽는 모습들이 각양각색이었다. 작은 글씨를 읽으려고 노력하는 친구, 작은 글씨를 읽다가 짜증을 내는 친구, 그림만 스르륵 보고는 다 읽었다고 하는 친구, 작은 글씨는 읽지 않고 큰 글씨 위주로 읽으면서 “글씨가 별로 없네요” 하는 친구, 뭔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고 내용 연결이 안 된다고 말하는 친구도 있었다. 쉽다, 그림이 성의 없다, 글씨를 그림으로 그리다니 할 일도 없다… 그림책을 읽은 아이들의 첫 소감과 반응은 대체로 뜨악했다. 심지어 뒤표지에 쓰여 있는 ‘4세 이상’이란 말에 꽂혀서 우리한테 왜 이렇게 쉬운 그림책을 주는 거냐고 묻는 친구도 있었다. 그림책은 자기 수준과 맞지 않는 것 같으니 다음에는 소설책이나 수필집으로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저마다의 감상을 발표한 친구들에게 이제 다시 한번 책을 차근차근 읽고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과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에 대해 이야기해보자고 했다. 함께 읽으며 아이들의 감상은 어떻게 바뀔까? 그림책을 다시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 같은 장면을 언급하는 경우도 있었고, 서로 다른 장면을 선택하고는 이야기를 들으며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림책의 각 장면을 보고서 만든 질문에 서로 대답하거나 생각을 나눠보기도 했다. 깊이 있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주제들도 많이 나왔다. 아이들은 관심을 갖고 그림책을 보니까 다시 보인다고, 처음 느낌은 재미없었는데 질문도 만들고 함께 읽으니까 신기하기도 하고 무지 재미있다고 했다.
그녀들의 독서습관과 읽은 책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스마트폰도 없고 텔레비전도 마음대로 볼 수 없고 외부와 단절된 공간에서 책은 그녀들에게 위안이 되기도 했고, 친구가 되기도 했고, 그곳의 무료한 시간을 때우기 좋은 도구가 되기도 했다. 밖에서도 책을 좋아하던 친구도 있었고, 이곳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책을 읽게 된 친구도 있었다. 매일 책을 읽는다는 친구들도 많았고, 이틀에 네 시간 정도 읽는다는 친구도 있었다. 그녀들이 즐겨 읽는 책은 주로 사춘기 소녀들의 감성을 자극하고, 가족이나 친구를 못 만나는 상황에서 그녀들의 감정을 다독여주는 책이었다. 원래 역사 분야에 관심이 많아서 역사 관련 책을 좋아하는 친구는 이곳에서도 여전히 역사책을 본다고 했다. 연애를 시작해서 설레는 마음을 전할 수 있는 말이 담긴 책을 본다는 친구도 있었고, 전과자의 삶을 보여주는 책을 보면서 잘못 살아온 자기 삶을 되돌아본다는 친구도 있었다. 여러 가지 혜택이 주어지기 때문에 책을 읽는다는 솔직한 친구도 있었다. 독서프로그램에 참여해서 책을 읽고 독후감 숙제를 하면 상점을 받는다든지, 국어 교과 시간에 시를 외우거나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면 소년원 생활이 조금 편해지기 때문에 읽는 거라는 친구도 있었다.
상점을 주거나 벌점을 없애는 강화물로서의 책읽기, 혹은 줄거리만 요약하고 재미있었다는 감상평 한 줄을 덧붙이는 숙제로서의 책읽기가 아니라 그림책 한 장면에 머물며 자신의 느낌과 생각과 경험을 서로 나누는 책읽기가 되길 희망한다. 다음 차시 도서시집를 안내할 때 시집은 싫으니 소설책이나 에세이같이 가벼운 책을 함께 읽으면 안 되겠냐는 의견에 도서 선정에 대한 고민이 생겼다. 수기나 에세이, 연애소설류의 편독 현상이 있는 친구들이 스스로는 절대로 고르지 않을 것 같은 책, 고전을 포함해서 혼자 읽기 어려운 책을 함께 읽으면서 행복한 경험을 한다면 어떨까. ― 물론 고전을 알아야만 세상에 나가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 청소년 소설의 경우에는 그녀들의 문제를 다룬 책이기에 자신의 감정이나 행동을 되돌아볼 수 있고, 책 속에서 공감과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녀들이 여기서 나가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나침판이나 지침이 될 수 있는 책, 일상생활에 도움을 주는 경제서나 인권·노동법 관련 책도 읽으면 좋지 않을까. 처음 ‘책 읽는 소년원 프로젝트’를 기획하면서 고민했던, 그러나 아직 답을 찾지 못한 그 문제가 스멀스멀 나를 괴롭힌다.
★ 〈책 읽는 소년원 이야기〉는 '책 읽는 소년원 추진팀'이 릴레이로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