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2일부터 4일까지, 김해에서는 '제10회 김해 청소년 인문학읽기 전국대회'가 열렸습니다. 전국 44개 학교에서 모여든 220명의 학생들이 김인숙, 정희진, 홍성수, 박재용 작가의 책을 읽고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즐겁고, 의미 있던 그 시간을 아래에 풀어냈습니다.
이성희│사회자
오늘 ‘저자와의 대화’ 시간에는 네 분의 작가님을 모셔야 했으나 아쉽게도 사정상 두 분만 모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두 분 모두 매우 훌륭하고, 재미있는 분들이십니다. 작가님들께서 멀리서 오시는 게 쉽지 않으셨겠죠? 반가운 마음으로 힘찬 환영의 박수 부탁드립니다.
이 시간에 뒤이은 ‘질문하는 독자’와 ‘토론하는 독자’ 시간에는 여러분들이 진지한 토론을 나누는 시간을 가지실 텐데요. ‘저자와의 대화’ 시간에는 가볍게 저자 분들의 내력을 알아볼 겁니다. 저자 분들을 한자리에 모시는 흔치 않은 시간, 다시 오지 않을 시간을 우리 모두 잘 즐겼으면 좋겠습니다.
학생들
네!
사회자
작가님들, 안녕하십니까? 저희 앞에 220쌍의 별빛처럼 초롱초롱 눈 뜨고 있는 이 친구들에게 인사 말씀 부탁드립니다.
박재용│작가
안녕하세요? 『모든 진화는 공진화다』엠아이디, 2017를 쓴 박재용입니다. 뜻하지 않게 오늘 센터에 앉게 되었는데 매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반갑습니다.
홍성수│작가
안녕하세요? 『말이 칼이 될 때』어크로스, 2018를 쓴 홍성수입니다. 지난 대회에 참가하셨던 저자 분께서 하신 말씀을 전해 듣고 오늘 이 자리에 오게 되었습니다. 열정적인 학생들의 토론에 오히려 작가인 본인께서 힘을 받아서 돌아갔다는 말씀이었습니다. 2박3일 동안 저도 많이 배우고, 여러분들도 많이 생각하시고 토론하실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반갑습니다.
사회자
이 자리에 안 계시는 또 한분의 인사 말씀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화면을 보시겠습니다.
김인숙│작가
안녕하세요? 『모든 빛깔들의 밤』문학동네, 2014을 쓴 김인숙입니다. 지금 여러분들과 그 자리에 같이 있어야 하는데 공교롭게도 문제가 조금 생겨서 다른 곳에서 영상을 통해서 인사를 드립니다. 많이 죄송하고, 그에 앞서 많이 서운하고 안타깝네요. 여러분을 뵙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제 책을 읽고 거기에 대해서 질문을 가져와주신 분들이기 때문에 그 질문이 뭘까 궁금하고 설레는 마음이었습니다. 오늘 저녁에야 그 자리에 도착할 텐데 여러분들께서 저에게 쏟아 부어주실 질문들, 저를 난처하게 만들어주실 많은 질문들을 기대하겠습니다. 이따 뵙겠습니다.
사회자
여러분들께서 이 앞에 미리 질문을 적어서 붙여주셨는데요. 질문이 뽑히거나 혹은 문제를 맞히시는 친구들에게는 작가와의 식사권이 선물로 준비되어 입니다. 작가님들과 아침, 점심, 저녁을 같이 드실 수 식사권입니다. 그리고 두 작가님들께서 식사권 말고 산책권도 준비해주셨는데요. 산책을 하며 맛있는 간식을 사주기로 약속하셨습니다. 작가님들께서 직접 사주실 겁니다. (웃음)
사회자
산책권이 달려 있는 첫 번째 문제입니다. 두 분의 공통점에 뭐가 있을까요?
학생
남자다, 머리카락이 있다, 다리가 두 개다!
학생
작가다, 사람이다, 의자에 앉아 있다!
사회자
맞기는 맞아요.
학생
멋지다! 똑똑하다! 책이 좋다!
사회자
이 학생처럼 하셔야 되는 거예요. 왜들 그렇게 눈치가 없어요? 작가님들, 혹시 마음에 드는 답변이 있었나요?
박재용
멋지다고 해주신 학생이요. (웃음)
사회자
학생께는 박재용 작가님과의 산책권을 선물로 드립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하는 ‘김해 청소년 인문학읽기 전국대회’는 10회째 열리고 있는 뜻깊은 행사인데요. 작가님들께서는 이곳 김해나 인제대학교와 특별한 인연이 있으신지요?
박재용
처음 와보는 곳이라는 인연이 있습니다. 제가 태어난 부산이 바로 옆에 있고요.
홍성수
김해랑 특별한 인연은 없고요. 인제대에도 아는 분이 없습니다.
사회자
괜한 질문을 드렸습니다. (웃음) 올해의 주제는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입니다. 공존의 삶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있다면 한 가지씩 말씀해주시겠습니까?
홍성수
제 책 『말이 칼이 될 때』의 주제도 ‘어떻게 공존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라고 할 수 있는데요. 공존의 삶은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고 생각해요. 이것은 꼭 타인에 대해 많이 안다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니에요. 어떤 부분에서는 무관심해야 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충분히 이해를 해야 하죠. 적절히 강약조절을 해가면서 적절한 수준에서 타인의 삶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이 공존의 삶을 위한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박재용
반대로 저는 ‘자기를 잘 아는 것’이 출발점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자기 자신에 대해 너무 과대하게, 혹은 과소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먼저라고요. ‘적당한 개인주의’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고요. 너는 너고 나는 나니까 우리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 이것이 공존의 가장 중요한 조건 아닐까요? 사실 우리는 너무나 싫은 애들과도 오랫동안 공존하고 있어요. 삼억 년째 살고 있는 바퀴벌레와 모기가 그들인데요. 인간이 출현한 지 이백만 년밖에 안 됐으니 우리보다 훨씬 먼저 살기 시작하긴 했죠. 태어날 때부터 바퀴벌레, 모기, 쥐와 공존하고 있는 우리들이기 때문에요. 나와 다르다고 해서 타인과 공존하는 것이 크게 힘들지는 않을 거예요.
사회자
좋습니다. 학생 여러분, 작가님들의 고등학생 시절은 어떠셨을 것 같아요? 두 분의 별명이 궁금하지 않으세요? 별명을 들어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잖아요.
홍성수
요즘은 치아교정을 많이 하는데 제가 어릴 적에는 치아교정이 드물었어요. 미적인 관점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가 있을 때에야 드물게 치아교정을 했는데 제 앞니가 바로 그런 구조적인 문제를 갖고 있었어요. 너무 튀어나와서 입을 다물 수가 없었어요. 미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입을 다물기 위한 치료로써 당시 생소했던 치아교정을 했었거든요. 그 치아교정을 하기 전에는 저는 콜라 캔을 앞니로 다 땄어요. 저는 그게 편하더라고요. 친구들이 많이 놀랐었는데 여러분, 생각보다 어렵지 않습니다. (웃음) 그런 제 모습 때문에 비버라는 별명이 있었어요. 하필 나중에 유학 간 학교의 상징 동물도 비버였어요. 학보 제목이 ‘The Beaver’였거든요. 비버와 인연이 깊습니다.
사회자
갈갈이 삼형제라는 개그가 떠오릅니다.
홍성수
그것도 제가 잘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 동작에 굉장히 익숙합니다. (웃음)
박재용
고등학교 때 제 별명은 잠을 너무 많이 잔다고 해서 ‘잠보’였어요. 시험 기간이면 친구들과 독서실에서 공부하다가 잠자다가 아침에 일어나면 책가방만 들고 학교에 갔었는데, 그 독서실에서 제가 제일 먼저 잠들었고 깨워야만 일어났어요. 대학교 때의 별명은 ‘빵빵이’였어요. 급속도로 살이 찌면서 무게가 0.1t을 돌파하게 되면서 굴러다녔습니다. 빵빵거리면서.
사회자
0.1t이요? 지금 모습으로는 상상이 안 됩니다.
박재용
지금도 얇진 않습니다. (웃음)
사회자
박재용 작가님에 대해서는 물리학을 공부하셨으나 그 밖의 여러 다른 길을 걸으시다 다시 과학을 만났다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어떤 다른 길을 걸으셨는지 궁금해서 여쭤보겠습니다.
박재용
제가 1985년에 대학을 들어갔는데 4년을 다니긴 했지만 성적 대부분이 빵꾸가 나서 졸업을 못 했어요. 대학을 더 다녀야 했지만 다니지 않고 울산으로 갔죠. 1989년 당시에는 노동운동이 활발할 때였고 저는 스물다섯부터 서른두 살까지 8년을 공장에서 일을 했어요. 노동단체교육협회라고 하는 노동단체에서도 일했고요. 그리고 그사이에 결혼을 했는데 저도 모르게 쌍둥이가 생겨서 먹고 살기가 힘들어졌어요. 다시 서울로 올라가서 학원에서 처음에는 과학을 가르치다가, 과학논술을 가르치다가, 이제는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글을 쓰다가,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과학 강연을 하다가, 재작년부터 전업 작가를 하게 되었습니다.
학생들
(박수)
사회자
노동운동을 하셨군요. 어떤 공장에서 일하셨습니까?
박재용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는데 언양에 현대 알루미늄 공장이 있었어요. 낮밤 교대하여 용광로에서 알루미늄 집어 던지는 일도 했고, 현대 알루미늄 하청 공장에서 용접도 했습니다.
사회자
용접공이셨군요. 홍성수 작가님께서는 인권법을 공부하시고 관련된 일을 활발히 하고 계시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으셨던 건지 여쭙겠습니다.
홍성수
저는 학부에서는 법학을 전공했는데요. 박재용 선생님처럼 중간에 그만두지는 않았지만 법학이라는 제 전공이 너무 싫었어요. 법이라는 학문의 현실 순응적인 부분이 답답하기도 했고요. 물론 법에도 창의적인 부분이 필요한데, 처음 수련 과정에서는 닥치는 대로 외워야 되고, 교수님께서 말씀해주시는 대로 따라야만 되는 부분이 싫어서 사실 법 공부를 거의 안 했고 대학원에 가서 전공을 바꾸려고 생각했습니다. 철학이나 사회학이나 정치학 같은 전공 ─ 당시 제 생각으로는 이런 기술 따위 말고 학문다운 학문을 해야겠다는 생각이었어요. ─ 으로 바꾸려는 생각으로 학부 때는 수업도 거의 안 들어갔어요. 솔직히 1학년 이후로는 강의실에 들어간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학점은 말을 하기 어려울 정도였어요. 지금 대학과 달리 당시 대학들은 허술했기에 졸업이 간신히 되는 정도였어요.
전공을 바꿔 대학원에 진학하려고 할 때 학부 때 법을 전공하다 다른 전공으로 바꾼 선배들이 전공을 바꾸면 고생이 많으니 원래 하던 걸 하라고 저를 말렸죠. 이런저런 다른 길을 찾았고 그러다 법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법학과 사회학의 중간에서 가교 역할을 하는 학문으로서의 접근 방법을 통해서 이왕이면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탐구해보자고 생각했죠. 제게 법학이 재미없었던 것은 법은 항상 결과거든요. 근본적인 성찰의 과정을 모두 거쳐서 나온 최종 결과물을 다루는 것이 법학이었어요. 저는 근저에 있는 논증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때 ‘인간의 권리’라는 주제가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될 수 있겠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공부하게 된 것이 인권이었습니다. 지금은 법학이라는 학문도 생각보다 재미가 있어서 후회하지 않습니다만 법사회학과 인권법을 전공하게 된 계기는 당시 전공이 싫어서 찾았던 탈출구였습니다.
사회자
서울시 교육청과도 일을 하셨던데요? 어떤 일을 하신 건가요?
홍성수
교육청에서 제가 학생인권조례를 만드는 일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학생들
(박수)
사회자
이제 학생들의 질문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뒷담화에 관해 질문을 주신 학생이 있어요.
학생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뒷담화하는 경우가 흔한데요. 이런 것도 혐오표현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홍성수
당사자를 공격하여 직접적인 피해를 야기하는 혐오표현도 있고요. 때로는 당사자를 특정하지 않고 당사자가 없는 데서 이야기를 하더라도 얼마든지 혐오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사실 혐오표현이라는 말이 생긴 것도 그런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것이기도 해요. 당사자를 직접 공격하면 현행법으로도 모욕과 명예훼손에 걸리거든요. 그런 경우에는 특별히 혐오표현이라는 말을 굳이 쓰지 않아도 대처가 되지만, 당사자가 없거나 당사자가 특정되지 않을 때에는 모욕이나 명예훼손이 되지 않거든요. 혐오표현이라는 시각으로 접근할 때에야 법의 범위에서 다룰 여지가 생기는 거지요.
사회자
홍성수 작가님이 혐오표현을 들으신다면 어떻게 대응하실 건가 질문하신 학생도 있어요.
학생
저도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있고, 페미니스트들에 대해서도 요즘 많이 이슈가 되고 있어요. 그런데 여기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제가 직접적으로 여성혐오 표현을 들었을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작가님께 여쭙고 싶었어요.
홍성수
혐오표현에 대해서는 그 자리에서 직접 문제를 지적해야 되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그 자리를 일단 모면한 다음 나중에 공식적으로 문제제기를 해야 하는 경우도 있어요. 정답이 있다기보다는 상황에 맞춰서 대응하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요. 지금 이 말은 ‘알아서 해라’라는 말로 들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이를테면 회사에서 혐오표현의 문제가 벌어졌을 때 구성원들이 각각 어떻게 행동해야 될지 실제 시뮬레이션도 해보고, 훈련도 해보고, 혐오표현에 대한 대응력을 키우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예요. 혐오표현이 발화되었을 때 어떻게 반박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신고를 할 수 있을까, 또 선생님께는 어떻게 도움을 요청할 것인가 상황을 놓고 훈련해보는 것이 중요해요.
2013년부터 혐오표현에 관련된 기사들은 굉장히 많이 나왔어요. 제가 인터뷰한 기사만 해도 백 편 가까이 될 텐데요. 2017년 12월, 경향신문에서 혐오표현에 대한 대응 방법에 초점을 맞춘 특집 기사를 쓰고 싶다며 저에게 자문을 청해 와서 기획 과정에서부터 제가 관여한 기사가 있었는데 그 기사 제목이 ‘혐오에 대응하는 것’이었습니다. 관심이 있으시다면, 그 기사를 통해서 실제 혐오표현이 벌어졌을 때 어떻게 대응하는 게 가능했었고, 어떻게 문제가 완화되었는지 사례를 보면서 나의 경우의 대응방법을 생각해보실 수 있을 겁니다.
사회자
문득 궁금해지는데 작가님께서도 혐오표현을 당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홍성수
혐오표현을 당하려면 제가 소수자의 성격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한국에서는 유감스러운 건지 다행스러운 건지 저는 대부분 다수자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직장도 있고, 남성이기도 하고, 이성애자이기도 하고, 장애도 없고요. 소수자성을 가진 게 거의 없는데 유학 갔을 때 이런 게 혐오구나 하는 걸 처음 느꼈습니다. 지도교수님께서 저에게 처음에 매우 박한 대우를 하시는 거예요. 교수님께서 저에게 인종차별을 하시는 게 아닐까 문득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생각이 한번 드니까 모든 게 그쪽으로 해석이 되더라고요. 상점에 가서 점원이 불친절하면 동양인이라서 차별받는구나 하고요. 소수자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 차별을 당한다는 것, 혐오를 당한다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거구나 하고 그때 느꼈어요. 모든 일상에서 위축되었고요. 지금도 그 장소에만 가면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나는데, 나중에 보니까 인종차별이 아니라 그냥 제가 공부를 못해서 불친절하셨던 거였어요. (웃음) 하지만 소수자의 고통스러움을 처음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생활 자체가 마비되고 위축되는 경험이었죠.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