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탐욕에서 죄악의 의미를 벗겨 중립적 개념으로 순화시킨 작업을 수행한 주체가 다름 아닌 근대경제학이었다. 그 첫 번째 조짐은 버나드 맨더빌Bernard Manderville이 보여준다. 맨더빌은 윤리적으로 돈을 혐오하면서도 현실적으로 돈을 좇는 당대인의 모습을 부각시킨다. 그의 초점은 한편으로는 가난을 덕목으로 찬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물질을 추구하는 당대인의 위선적 윤리를 공격하는 것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저급한 욕망을 까발리면서 ‘그러면 어떻다구? 너라고 달라?’는 식으로 나가는 B급 영화 또는 싸이의 「젠틀맨」과 비슷한 기능이다. 근대경제학은 이 뻔뻔한 B급 영화를 우아한 A급 영화로 보이게 만든다. 아담 스미스는 ‘탐욕’이란 용어를 ‘이기심’이란 단어로 대체함으로써 예전에는 악덕이었던 무한정의 축재를 윤리적으로 중립적인 행위로 변모시켰고, 한발 더 나아가서 개개인이 이기심을 추구할 때 오히려 우리 사회는 물질적 궁핍으로부터 해방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우리말에서 ‘이기심’은 부정적 의미가 너무 강하다. ‘self-interest’의 번역이므로 ‘사익’이라고 옮기면 이해에 도움이 될 듯하다). 이후 정통경제학은 이 우아한 전략의 목록에 ‘효용’과 ‘선택’ 등의 개념을 추가한다. 즉, 경제학은 이기심이라는 용어로 탐욕을 순화함으로써, 효용과 선택은 생산과정을 은폐하고 소비자 개인에게 관심을 집중시킴으로써* 경제학적 논의에서 버거운 윤리적 주제를 사실상 제거한다.
* 저자는 이 사실은 이 저작에서 따로 지적하지는 않는다.
저자들은 이 과정을 자신의 영혼을 팔아 악마로부터 지혜와 쾌락을 구했던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모티브를 빌려와 ‘파우스트적 타협’이라 명명한다. 그런데, ‘파우스트적 타협’이란 사악한 동기도 전체 사회를 위해 유용하게 쓸 수 있다는 믿음에 기초한 것인데, 정작 타협을 만들어 낸 스미스 자신은 자기 이론이 ‘악마’와의 타협이라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다만, 그는 인류가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탐욕이 가진 활력과 생산성을 임시적 징검다리로 이용하려고 생각했다. 그 또한 개인의 물질적 요구는 유한하니만큼 풍요한 사회가 도래하면 탐욕의 본성 자체가 사라질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현재 정통 경제학의 토대를 쌓은 종장 아담 스미스의 경제이론은 극심한 ‘빈곤’과 ‘희소성’이라는 당대적 조건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이제 풍요한 상태에 돌입한 선진국의 현 상황에는 적용되기 어려운 이론이 된다.
그런데, 스미스에게는 그나마 희미하게 남아있던 윤리적 관심은 (예를 들면 케인즈를 비롯한 몇 몇 경우를 제외하면) 주류 경제학은 물론 우리의 일반적 영역에서조차 완전히 밀려나게 되며, “그 결과” 우리는 좋은 삶의 개념을 잊어버리고 목적도 방향도 없이 오직 성장만을 추구하게 되었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근대의 파우스트적 기획은 의도는 좋았으나 지금 우리가 보듯 실패로 끝났다. 저자들은 두 가지 착오를 근본적 이유로 제시한다. 우선, 아담 스미스의 생각과 달리 욕구는 결코 유한한 것이 아니었다. 근대 이전의 철학자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욕구를 의식적으로 통제하려 했었는데, 스미스 이후의 경제학은 이를 무시했던 것이다. 따라서 파우스트적 타협과 실패에 대한 논의의 다음 순서는 당연히 ‘재산’과 ‘욕구’에 대한 근대 이전 시기 철학자들의 논의로 이어진다. 이때 저자들의 논의의 중심은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활동은 궁극telos을 지향하는데, 종착점은 다름 아닌 ‘좋은 삶’이다. 좋은 삶이란 “욕구의 충족을 넘어서, 욕구의 올바른 방향을 포함하는” 개념이며, 그중 최선의 삶의 형태는 ‘여가’이다. 이때 여가란 재생산을 위한 ‘휴식’이나 긴장의 ‘이완’이 아니라 (칸트를 직접 거명하지는 않지만) “외적 목적이 없는 행동”, 즉 “목적 없는 목적성”에 몰입하는 활동으로 규정된다.**
* 다만, 이런 윤리적 관심사가 저자가 생각하는 만큼 서구의 지적 전통에서 처참하게 밀려나지는 않았는데, 뒤에 다시 말하겠지만, 저자들의 이런 과장은 저작의 논의과정에서 논리적 균열을 만들어 내게 된다.
** 실은 여가를 이렇게 정의하기 때문에 ‘재미있는 유급노동’과 ‘여가’의 개념이 하나로 합쳐지는, 내 생각으로는, ‘혼란’이 생겨나기도 한다.
‘좋은 삶’의 개념은 서양문명에서만 아니라 인도와 중국 등 거의 모든 문명에서 존재했지만 근대 이후 점차 약화되더니 이제는 흔적만 남았다. 저자들은 이런 소멸과정에 놀랍게도 괴테, 마르크스, 케인즈, 마르쿠제에게도 일단의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특히, 괴테에 대한 비판은 아주 신랄하다. 그는 ‘인간의 원죄--그러니까 인간의 욕망의 무한성--를 믿지 않는’ 철없는 문학자였고, 악마조차 자신의 의도대로 부릴 수 있다고 생각한 면에서 도덕적으로 진지하지도 않았으니, 『파우스트』는 “악의 실재를 망각한 시대적 방종”의 소산이었다. 괴테에 이어, 좋은 삶 개념의 소멸에 큰 책임을 져야 할 대상은 자유주의 이론과 신고전주의 경제학이다. 개인적으로 이 저작에서 가장 흥미 있는 부분은 롤즈John Rawls의 자유주의 이론을 비판하는 대목이다. 롤즈의 정의론 핵심은 “공적 영역의 탈도덕화”이다. 그러니까, 각 개인의 이념과 생활방식이 상호간 충돌할 때 국가가 그 이념들을 윤리적 측면에서 판단하고 개입해서는 안 된다. 국가의 개입은 한 개인의 생활방식이 타인에게 피해를 끼칠 때만 허용되어야 하며, 따라서 이상적 사회를 구현하려면 개인의 자유가 타인들의 자유와 양립가능한 허용범위를 최대한 확장시키려 노력해야만 한다. 포르노를 예로 들자. 자유주의 이론가들도 포르노가 범람하는 사회를 원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나의 은밀한 포르노 시청이 타인에게 직접 피해를 끼치지 않는 한 윤리적 이유로 국가가 개입하는 것에 찬성하지 않는다. 자유주의 이론만 아니다. 최근의 ‘진보적’ 논리도 마찬가지이다. ‘네 욕망을 포기하자 말라’를 윤리적 명제로 내세우는 라캉주의자나, “지식체계와 윤리 = 권력을 유지시키는 이데올로기 장치” 정도로 인식하는 푸꼬주의자 역시 (비록 욕망은 소비적 욕망이나 생물학적 욕망과 다른 것이며, 전복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그들의 주장을 시인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자유주의자들과 비슷한 입장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 정치적 이념의 측면에서 저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전통은 ‘가톨릭 내의 평등주의적 전통’으로 전반적으로 보수적이다. 보수적 전통에서 출발한 사고가 사회주의적 기획과 점점 유사해지는 과정 자체가 이 책의 매력 가운데 하나이다. 동시에 보수적 사고에서 출발했기에 이 저작에서 전혀 논의되지 않는 대목이 저자 자신이 제기한 평등주의적 제안을 실현할 수 있는 주체를 어떻게 동원할 것인가하는 문제이다. 그 결과, 책을 덮는 순간 위로부터의 시혜적 개량주의에 머무는 감조차 있다.
자유주의 정의론--그리고 탈구조주의 윤리학까지--이 옳으냐 그르냐에 대해서는 논자마다 의견이 다를 것이니 이점에 대해서는 논의를 유보하자. 다만, 저자들이 궁극적으로 ‘좋은 삶’이란 것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다양한 삶은 서로 비교가능하고, 따라서 이 좋은 삶을 구성하는 ‘공통요소’들을 약분해 낼 수 있다는 믿는 대목은 아주 요긴하다. 요즘 학계에 대세로는 본질주의적 혐의가 있다고 비판받기 안성맞춤이다. 저자들은 ‘좋음’에 대해 객관적 내용을 따지지 않고 개인의 주관적 판단에 맡기는 태도, 그러니까 흔히 말하는 ‘다원주의적 자유주의’ 입장에 찬성하지 않는다. 그들은 좋은 삶의 이념은 세계 각 지역에서 상호적 영향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독자적으로 출현한 만큼 ‘보편적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근본적 문제에 들어가면 개인 간에는 물론이고 심지어 문명 간 차이도 생각만큼 크지 않다고 대담하게 주장한다. 지금 우리 학계에는 사물의 본질적 의미란 없으며, 의미는 오로지 관계(=차이) 속에서 주어진다는 구조주의 논리가 대세로 자리 잡은 만큼, 만일 논문 형식으로 학술지에 투고했더라면 게재 거부를 당하지 않았을까?
저자들은 저작 말미에서 국가는 중립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윤리적 문제를 피할 게 아니라, 자신의 윤리적 선택을 명백히 밝혀야 한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간섭주의자일지는 모르지만 간섭주의를 은밀히 숨기기보다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고 당당히 덧붙인다. 이 저작은 이런 솔직함을 바탕으로, 그리고 본질주의라는 비판을 과감하게 뚫고 좋은 삶을 구성하는 요소를 7개로 압축한 다음, 이를 구현하기 위한 구체적 정책 제안으로까지 나아간다. 그리하여 이 저작은 여러 가지 생각거리를 준다. 그러니까, 저자들의 주장 자체는 틀린 수도 있고 실제 약점도 여럿 보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틀린 이유를 생각하다 보면 독자들은 더 진전된 결론에 도달할 가능성을 가지게 된다. 주장 자체는 틀릴 수 있지만 따지다 보면 더 좋은 결론으로 인도하는 것, 이런 책이야말로 진짜 ‘좋은 책’이 아닌가. 인문학 발전이 어떤 방향이 되어야 하는지 또 한 번 생각하게 만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