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인문학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한 지방 도시의 체육관에 들어서면서 깜짝 놀랐다. 청소년 수백명이 체육관을 가득 메운 채 웅성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서 어떻게 인문학을 공부하나?’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게 가능했다. 1박2일 동안 청소년들이 저자들의 간단한 강의를 들은 뒤 수십개의 토론 카페를 직접 운영하며 모였다 흩어지기를 되풀이하면서 서로 다른 생각들을 모아가는 과정이 마치 물 흐르듯 진행됐다.
마무리 발언을 하는 시간에 저자들은 모두 자신이 받은 감동을 표현하기에 바빴다. 교수 한 분은 “이러한 모습이 바로 집단지성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체육관을 가득 메운 청소년들의 모습은 마치 각각 다른 동작을 하면서도 훌륭한 조화를 이루는 군무처럼 아름다웠다. 그 뒤 비슷한 행사에 참석해 달라는 연락을 가끔 받을 때마다 열 일 제쳐두고 달려가 매번 같은 감동을 받고 돌아오곤 했다.
며칠 전, 규모가 비교적 작은 비슷한 행사에 다녀왔다. 아홉 개의 토론 카페가 열렸고 그중 세 개가 노동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카페였다. 순서가 진행될수록 카페 입구에 적어 놓은 청소년들의 생각이 몇 줄씩 늘어났다.
“여성도 차별을 받고 노동자도 차별을 받는 현실에서 여성 노동자의 문제는 어떠한 측면으로 접근해야 할까? 여성 노동자에 대한 차별이 과연 ‘인식’만의 문제일까? 여성 노동자를 우대하는 정책들이 혹시 남성 노동자에 대한 역차별을 불러오지는 않을까? 성에 대한 고정관념에 대해서 비판적 사고를 할 필요가 있고 그 해결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비정규직이 당한 산업재해, 정규직과 똑같은 보상을 받아야 하는가? 비정규직이 차별을 받지 않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 ‘노동’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을 개혁하기 위해 어떤 방법이 있을까? 어릴 때부터 노동자 권리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여 올바른 인식을 심는 것이 중요하다. 단, 과도한 노동자 이권에 대한 집중은 피해야 한다.”
교사들은 일체 개입하지 않고 강당 한쪽 구석에서 철저히 참관만 하는 상황에서 학생들이 몇 번이나 모였다 흩어지면서 스스로 모은 의견들이었다. 다소 모호한 표현도 있지만 얼마나 훌륭한가? 그런데 나머지 한 조의 토론 내용이 좀 색달랐다.
“현재 비정규직이 늘고 있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규직 채용을 늘리는 방안이 대두되고 있는데, 정규직 채용에 따른 사회적 문제는? 비정규직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있을까? 비정규직의 좋은 점은? 비정규직은 직장을 자유롭게 옮길 수 있다는 점에서 좋지만 고용의 불안정한 속성 때문에 비정규직 노동자의 책임감 문제와 기업의 입장에서는 더 좋은 인재를 갖기 어렵다는 점이 있다.”
지켜보던 한 교수는 “배가 산으로 가고 있는데요”라고 걱정을 하기도 했다. 그 토론을 주도한 학생이 기업 경영자의 자녀가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 내 짐작이다.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는 드라마 〈송곳〉 주인공의 명대사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는 거야”라는 말은 진리다. 그 학생은 아마 기업의 노동비용이 늘어나는 것을 걱정하는 부모님을 지켜보며 마음 졸였던 착한 자녀였을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고 기업의 시각으로 사회를 분석하는 보수적 학자의 책을 탐독했을 수도 있다. 그 학생의 생각이 꼭 틀린 것만도 아니다. 서로 다른 주장들이 잘 어울리며 조화를 이루는 것이 바람직한 사회다.
‘인문학대회’ 행사 자리에서는 그 주장이 ‘소수’였으나 일상으로 복귀하는 순간 만나는 우리 사회에서는 그러한 생각이 ‘절대다수’다. 서민의 자리에 발 딛고 서 있으면서 부자들이 그려주는 풍경만 보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그 다수의 생각에 힘입어 박근혜 정부는 노동시장 구조개혁을 밀어붙이고 있다. 그 삭막한 풍경들 속에서 <송곳>처럼 뚫고 나온 “어릴 때부터 노동자 권리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여 올바른 인식을 심는 것이 중요하다”는 청소년들의 생각에서 희망을 본다.(*)
★ 본 기고글은 한겨레신문에 실린 칼럼으로서, 필자의 동의 아래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