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 좋은 2012년 어느 일요일 나는 김해 기적의 도서관에 앉아 있었다. 돌아가신 정기용 선생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곳이다. 정기용과 겹쳐 떠오른 사람이 하나 더 있다. 네덜란드의 건축가 ‘알도 반 아이크’Aldo van Eyck이다. 이때 어떻게 이 두 사람이 겹쳐 내게 왔는지는 설명을 하지 못하겠다. 분명한 것은 이 두 사람이 내게 ‘놀이터’라는 화두를 던졌다. 정기용은 ‘기적’을 알도 반 아이크는 ‘놀이터’를 건넸다. 그렇게 기적과 놀이터가 하나로 붙으면서 나는 한국의 6만 개 놀이터를 기적의 놀이터로 바꿀 꿈을 꾸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한국의 아이와 놀이와 놀이터에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는 아이들 삶이 나아지기 어렵다. 조금은 가볍지만 ‘기적’이라는 말을 놀이터에 붙여 쓰는 까닭이다.
정기용 선생은 돌아가시면서 그간 해왔던 작업을 책으로 고스란히 남겼다. 그가 도서관을 사랑하고 깊이 이해한 인문주의자라는 것은 이렇게 증명된다. 나는 그 책들을 들고 놀이터 공부를 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는가. 정기용은 놀이터를 만든 적이 없는데 그의 책을 읽으면서 놀이터 공부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만약 놀이터를 짓고 싶은 사람이나 모임이나 단체나 지자체나 회사나 기업이나 기관이 있다면 그 출발을 한국에서는 정기용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마땅하다. 왜냐하면, 그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그것도 아이들을 생각한 건축가였다. 공공건축이 어떻게 아이들 삶을 바꾸어낼 수 있는지 고민한 첫 사람이라는 뜻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설계한 많은 기적의 도서관에 가서 내가 느끼는 첫 번째 느낌은 놀이터에 온 것 같은 착각이다. 아닌 게 아니라 정기용은 실제로 도서관을 아이들의 놀이터처럼 만들려고 했다. 이에 관해서는 기적의 도서관 만드는 일에 함께했던 도정일 선생의 글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정기용과 도정일은 어찌 보면 아이들 놀이터를 만들려고 했는지 모른다.
자유로운 상상과 엉뚱한 몽상이 아니라면 무엇이 아이들을 키울 것인가? 무엇이 그들의 창의력과 호기심과 탐구의 능력을 키울 것인가? 기적의 도서관에는 그래서 다락이 있고 토굴이 있고 여기저기 숨는 공간들이 있다. 그 공간에서 아이들은 숨 돌리며 상상과 공상과 몽상에 잠기고 저희들끼리 놀 시간을 얻는다. 자유로운 상상과 놀이의 시간을 철저히 빼앗기고 있는 지금 이 땅의 아이들에게 그런 자유의 시간, 숨 돌릴 시간, 몽상할 시간을 되찾아 주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정기용은 실제로 어린이 도서관을 처음으로 만들었고 그곳을 아이들의 놀이터로 만들어냈다. 정기용이 만든 도서관에 들어설 때 느끼는 자유의 냄새는 바로 그런 그의 철학에서 나온 것이라 본다. 어린이를 위한 공공건축물에 관해 한국사회에서 앞서 고민한 사람이 있고 그를 본 적도 있고 그가 남긴 책도 있어 다행이다. 내가 김해기적의도서관에 앉아 기적의 놀이터를 꿈꿨던 것은 이런 맥락에서였다. 기적의 놀이터 이해를 위해 기적의 도서관을 좀 더 공부할 필요가 있다. 왜 어린이 전용 도서관인 기적의 도서관이 필요한가에 대해 도정일은 이렇게 썼다.
이 모든 새로운 시도의 핵심부에는 세 가지 기본적인 의도와 정신이 있다. 아이들을 잘 키우는 책임과 육아의 경비는 온 사회가 분담해야 한다는 것, 어린이 도서관은 아이들의 성장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회적 기본 시설이며 우리 사회는 그런 도서관의 설립과 운영에 마땅히 투자해야 한다는 것, 어린이 도서관은 지역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 지역 공동체를 일구는 풀뿌리 운동의 중심부라는 것. (도정일, 「정기용과 기적의 도서관」, 『기적의 도서관』, 현실문화, 12쪽)
내가 여러 해 생각했던 제대로 만들어진 공공놀이터가 세상에 있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 그대로 나와 있다. 나는 책읽는사회문화재단 이경근 선생에게 전화를 걸어 도정일 선생을 봬야겠다고 했다. 그렇게 도정일, 안찬수, 이경근 선생을 만나 ‘기적의 놀이터’를 해야겠는데 이름과 가치를 쓸 수 있도록 해달라고 했고 두말없는 허락을 그 자리에서 받았다. 그리고 조금씩 기적의 놀이터 작업을 해오고 있다. 올해 1호 ‘기적의 놀이터’가 선선한 가을쯤 순천에 만들어진다. 아마도 놀이기구가 없는 첫 번째 놀이터가 될 것이다.
기적의 놀이터 기본 출발 배경은 이렇다. 새로운 사회적 어린이 놀이터, 공공 어린이 놀이터가 필요하다. 우리 아이들에게 이런 놀이터가 있어야 하는데 공공의 놀이터 건축주가 없어 그 놀이터를 ‘기적의 놀이터’라 이름 짓고 어린이, 시민, 관과 함께 거버넌스 형태로 만들어가자는 취지이다. 나는 기적의 놀이터를 이렇게 정의 내린다.
“기적의 놀이터는 아이들이 몸으로 시를 쓰고 몸짓으로 그림을 그리며마음껏 놀 수 있는 너른 마당이다.”
그리고 앞에서 이야기했던 알도 반 아이크의 나라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놀이터 선언을 보았다.
“If you design places that work well for children,they seem to work well for everyone else.”아이를 위한 공간을 만든다는 것은 모두를 위한 공간을 만드는 것과 같다.─ Rotterdam: How to build a Child Friendly City
놀이터의 공공성에 대해 이렇게 짧게 잘 정리된 말이 없다. 어떻게 로테르담은 이런 선언을 할 수 있었을까. 나는 암스테르담에서 오랫동안 놀이터 만들기를 해온 알도 반 아이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영향이 있었다는 생각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또한, 기막힌 일치를 경험했다. 네덜란드가 어떤 나라인가. 『호모루덴스』Homo Ludens를 쓴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의 나라가 아니던가. 하위징아1872~1945의 위대함은 ‘놀이하는 인간’과는 가장 멀리 돌아선 ‘야만적인 인간’과 ‘야만적인 시간’의 한복판에서 놀이에 천착한 데 있다. 어쩌면 하위징아가 살았던 시대는 아이들과 놀이를 가장 멀리 떨어뜨려 놓으려는 지금과 너무 닮았다. 이렇게 세상에 없는 정기용, 알도 반 아이크, 하위징아까지 이어지며 놀이터 공부에 맥을 잡아갔다.
놀이 운동이라는 희극적 운동을 한국사회에서 20년 가까이 해오면서 이따금 같은 질문을 받곤 한다. 왜 이런 일을 하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그럴 때면 한국 아이들이 처해있는 ‘놀이 불가능’의 현실에 대해 길게 이야기해야 한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나아지기는커녕 한국 어린이 놀이지수는 가파르게 곤두박질치고 있다는 이야기로 넘어간다. 놀이 운동하는 사람이 놀이를 이렇게 재미없게 이야기하니 문제이다.
내가 놀이 운동을 꾸준히 해올 수 있도록 버티게 해준 힘에 대해 이야기해보겠다. 만용이라 부르겠지만 나는 ‘소년 편해문’이 되고 싶어 놀이 운동을 한다. 대한민국 아이들이 소년과 소녀의 시기, 다시 말해 ‘childhood’ 시기를 놀이라는 동무와 같이 지나기를 바라기 때문에 놀이 운동을 한다. 그러다 ‘소년 편해문’은 끄덕도 않는 현실에 가끔 지치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소년을 만났다. 나이가 조금 많을 뿐 지치지 않는 놀이터 소년이었다. 그의 이름은 ‘귄터’였다. 그를 만난 후 ‘소년 편해문’에 대한 꿈을 다시 꾸기 시작했다.
놀이와 놀이터 스승을 한 번쯤 만났으면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고 어느새 나는 한국 사회의 놀이 교사, 연구자, 운동가로 대접받고 있었다. 참으로 고역이다. 평소 책이 없어 배우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사는 사람이 없어 배우지 못한다 생각하며 살았다. 20년 넘게 안동 땅에 살면서 권정생이란 사람을 먼발치에서 보며 배운 것이 그 이유였다. 그리고 어딘가에 놀이와 놀이터에 관한 나의 무지를 일깨워줄 스승이 있을 거라 믿었다.
그렇게 귄터를 만났다. 그런데 귄터는 첫 만남에서 스승의 자리나 교사의 자리를 딱 잘라 거절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친구가 되어야 배울 수 있어.” 진정한 배움은 같은 자리에 있을 때만 가능하다고 했다. 이렇게 나의 헛된 스승 찾기는 홀가분하게 막을 내리고 놀이와 놀이터를 사이에 두고 가끔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친구 하나를 얻었다. 귄터를 만나 중요한 것을 하나 알았다. 사랑은 어긋나도 친구는 결국 만난다는 것을. 나아가 놀이와 놀이터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아이뿐이라는 것도 다시 확인했다.
귄터는 오랫동안 놀이 기구와 놀이터를 만들어 온 손자를 둔 할아버지 놀이터 디자이너이다. 그와 나눈 대화 속에 오고 간 질문과 대답을 소개하고 싶다. 하나는 ‘무엇이 과연 잘 만든 놀이터인가’라는 질문이었다. 그는 어떤 것이 잘 만든 것인지 모른다고 했다. 다만, 분명히 아는 것은 ‘자신이 무엇을 잘 못 만들었는지’라고 짧게 답했다. 또 하나는 ‘좋은 놀이터에 대한 평가는 누구의 몫이냐’라는 질문이었다. 귄터는 자신이 만든 놀이 기구나 놀이터에 대한 어른들의 평가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고 했다. 놀이 기구와 놀이터에 대한 평가는 오로지 아이들만이 할 수 있고 자신은 그것에 귀 기울인다고 했다. 크게 놀란 것은 그가 사는 뒷산에 20년을 가꾼 놀이터였다. 40년 동안 놀이 기구를 만든 귄터의 놀이터에서 놀이 기구를 볼 수 없었다.
귄터의 책 이야기를 해야겠다. 이 책을 처음 본 순간 ‘그림책이구나’라고 생각했다. 독일 말을 전혀 몰랐지만 그림으로 귄터의 놀이터에 대한 생각을 헤아리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1987년 독일에서 초판이 나왔을 때 귄터의 나이는 46살이었다. 내가 권터를 처음 만난 것이 2014년 광주였고 우연히도 내 나이 또한 46살이었다. 한국에 머무는 일주일 동안 함께 했고 우리 가족이 귄터의 집으로 찾아가 또 일주일을 머물며 놀이터 이야기를 나누었다. 독일에서 떠나기 전에 귄터의 놀이터 책을 한국에서 출판하면 좋겠다는 부탁을 했고 흔쾌히 허락을 얻어 『놀이터 생각』Das Spielplatzbuch, 2015이란 책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국내외 놀이터에 관한 책들이 몇 권 있지만 그럼에도 이 책을 세상에 애써 내보이는 까닭이 있다. 가장 큰 장점은 어떤 책보다 쉽고 간결하다는 점이다. 그 속에는 오랫동안 귄터가 추구한 놀이터 철학의 고갱이가 담겨있다. 이번에 번역된 한국판에는 독일에서 출간된 책에다, 최근 귄터의 생각이 담긴 글 여러 편이 새롭게 추가되어 내용의 풍부함이 원서를 훌쩍 뛰어넘는다. 이런 경우는 드문 일이다. 한국의 독자들과 함께 귄터의 놀이터 책을 볼 수 있어 기쁘다.
책속으로 잠시 들어가 본다. 나는 번역된 원고를 여러 차례 읽으면서 귄터의 또 다른 모습을 보았다. 소년 귄터에 대해서 이야기했듯이 그의 첫인상은 악동, 개구쟁이라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글은 참 꼼꼼하고 세심하고 배려 깊었다. 책에서 이런 활달함과 동시에 냉철함을 느꼈다. 독자들이 책을 읽으며 하나하나 발견하는 재미를 미리 뺐을 수 없는 일이라 자세히 말하지 않고 한두 가지만 이야기하고 싶다. 장애 아이들 놀이터에 대해 쓴 통합 놀이터 대목은 특히 그의 따뜻한 마음을 한껏 느낄 수 있다. 또 하나는 놀이터에서 생기는 이런저런 문제나 사고의 원인을 이야기하는 대목이다. 귄터는 그 까닭에 대해서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바로 놀이터 설계와 계획의 오류에 첫 번째 까닭이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아이를 깊이 이해하고 배려하는 놀이터 건축가, 조경가, 디자이너의 모습을 보기 어려운 현실에서 이런 주장은 깊이 새길만하다. 책임을 남에게 떠밀기 전에 놀이터를 만든 사람이 스스로 자임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또 하나 이 책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 있다. 놀이 기구와 놀이터의 안전 규정에 관한 귄터의 생각이다. 귄터는 분명히 말한다. 어른들이 보기에 모험적인 요소가 있어 보여도 아이들이 그 위험을 예측할 수 있다면 위험하지 않고, 그런 놀이터는 재미없는 놀이터보다 훨씬 안전하다는 주장이다. 놀이터에서 일어나는 사고 대부분은 놀이 기구 자체가 너무 재미없게 만들어져서 아이들이 다른 방식이나 다른 용도로 가지고 놀다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여러 해 놀이터를 관찰해온 나의 생각과 완전히 일치하는 대목이다. 놀이터의 규정과 표준은 아이들의 놀이 감수성을 제한하는 용도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놀이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대한민국은 유아 수준으로 놀이터를 만들어놓고, 초등 놀이터로 쓰기에 안전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귄터의 말대로 놀이터의 표준화는 틀에 박힌 놀이 내용과 놀이 태도를 만들어낼 뿐이다. 이 책이 이런 놀이터에 관한 굳어진 상식을 깨고 새로운 놀이터를 상상하는 마중물이 되기를 바란다. 놀이터는 내가 여러 번 주장했듯이 아이들이 위험Risk을 만나고 그 위험을 다룰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우리는 미래를 살 아이들이 오늘 놀 놀이터를 만든다는 생각에 충실해야 한다.
귄터와 헤어지고 한국으로 돌아온 후 이따금 아내는 귄터 내외 이야기를 한다. 할머니는 또 놀러 오라고 하지만 귀촌 12년 차인 우리 가족은 여러 해 아껴 모은 돈을 써 독일에 다녀왔고 다시 가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권터 또한 나이가 많고 거리가 멀어 한국에 다시 오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우리는 형편이 그렇고 귄터는 연로하다. 이런 상황이 더 큰 그리움을 낳는다. 놀이터를 공부하는 길에서 만난 귄터는 우리 가족 모두에게 그리움으로 점점 자라나고 있다.
권터를 만나지 않았다면 닿지 못했을 놀이터에 대한 생각 하나를 밝힌다. 나의 놀이 3부작 마지막 책인 놀이터 책을 쓰면서 결론에 썼던 글 제목이기도 하다. 놀이터가 건축이나 조경과 다른 것은, 완공이 곧 완성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놀이터는 아이들이 뛰놀 때 마침내 완성된다. 놀이터는 아이들이 변화를 줄 수 있을 때 살아난다. 이 생각에 닿게 해준 귄터가 고맙고 다른 사람들도 귄터와 놀이터 친구가 되기를 바란다.
아이들은 귄터의 말처럼 어떤 상태이고 어떤 과정이고 어떤 변화이다. 내가 놀이터에 천착하는 까닭은 바로 놀이터가 이런 상태와 과정과 변화의 한복판에 있는 아이들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존중한다는 것은 아이들이 결정과 결과와 완성이 아님을 아는 일과 같다. 아이들은 마치 경유지와 같고 터미널에 머물러 있다고 볼 수 있다. 놀이터는 이런 아이들을 부르고 반기고 격려하며 앞으로 살아갈 힘을 북돋는다.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놀면서 자신의 한계와 만나는 황홀한 순간을 맞이한다.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자신의 육체적·정신적·정서적 한계가 어디쯤인지 알아가고 확장해간다는 것을 나와 같은 놀이터 일을 하는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그 바탕 위에서 놀이터 디자인과 설계와 시공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까닭에 우리가 만든 놀이터에서 놀았던 아이들이 미래의 삶을 사는데 이 놀이터가 어떤 쓸모가 있을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일반 독자도 보면 좋겠지만, 『귄터가 꿈꾸는 놀이터 드로잉』은 놀이터에 관한 좀 더 본격적인 책이다. 실제 놀이터를 만드는 놀이터 건축주와 놀이터를 시공하는 실무자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책은 앞서 독일에 가서 귄터에게 허락을 얻어 번역 출간한 『놀이터 생각』이란 책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놀이터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기획한 귄터의 놀이터 3부작 가운데 첫 번째 『놀이터 생각』이 생각보다 널리 알려지고 읽혀 보람을 느낀다. 그 뒤를 잇는 2부작 『귄터의 꿈꾸는 놀이터 드로잉』 또한 아이들과 가까이 생활하는 교사나 부모가 그림책 보듯 편안하게 보면 더욱 좋을 책이라 생각한다. 아이들을 알고 이해하려면 그들의 놀이와 놀이터를 지나칠 수 없기 때문이다. 내 마음속 놀이터 스승에 대한 오마주와 헌사는 기약하기 힘들지만 귄터의 마지막 3부작으로 정리될 것이다. 그날이 더디 오기를 바란다.
『귄터가 꿈꾸는 놀이터 드로잉』은 아이와 놀이와 놀이터를 평생 고민한 한 사람을 그림으로 만날 수 있다. 그렇지만 조금은 불편한 책이다. 왜 낱장 설명을 하지 않는지 그리고 모두 흑백인지 짧게 말한다면, 한 장 한 장 꼼꼼히 보고 그 속으로 걸어가 놀아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흩어져 있었던 한 놀이터 디자이너가 그린 평생의 놀이터 드로잉을 감히 한 권의 책으로 냈으면 한다고 했을 때, 흔쾌히 그림은 자신이, 글은 내가 쓰라며 흩어진 그림을 여러 차례 모아준 귄터의 담백함이 눈에 선하다. 귄터의 첫 번째 책 『놀이터 생각』 작업을 할 때도 그랬지만 이 책 또한 놀이터를 가르치는 학교와 교사와 교과서를 스스로 만든다는 생각으로 즐겁게 했다. 귄터의 『놀이터 생각』이 나온 지 한 해 정도 지났지만, 놀이터를 새로 짓거나 고치려는 우리나라 곳곳에 끼친 영향을 놀이터 현장에서 몸으로 느낀다. 적어도 한국에서 놀이터 논의를 『놀이터 생각』 수준에서 시작할 수 있어서다. 새롭게 펴내는 『귄터가 꿈꾸는 놀이터 드로잉』은 더 밝은 영향을 끼칠 것이라 기대한다.
여기까지 다 읽는 독자에게 이 책의 제목이 왜 ‘귄터가 꿈꾸는 놀이터 드로잉’인지 설명해야겠다. 귄터가 애써 놀이터가 들어설 장소에 가서 드로잉을 완성했지만, 실제 만들어지지 못한 놀이터가 많았다. 그래서 귄터는 내게 ‘꿈꾸는’ 이라는 부탁을 했다. ‘놀이운동가’를 시작으로 ‘어린이 욕구에 적합한 놀이터 환경 만들기 모더레이터’ ‘놀이터 디자이너’ ‘놀이터 칼럼니스트’ 등등의 일을 오가면서 귄터가 꿈꾸었지만 만들지 못한 놀이터와 받아들여지지 못한 ‘놀이터 생각’을 긴 시간을 두고 조금씩 만들고 실천하려고 한다. 5월 순천시에 첫 번째 「기적의놀이터」를 어린이, 주민, 행정이 어울린 파트너십으로 완공했으니 오며 가며 아이와 함께 들러주시라. 나는 여전히 ‘play’보다 ‘ground’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하는 글쓰기와 놀이터 만들기 작업이 한국의 여기저기서 일고 있는 놀이터 논의에 ‘ground’가 되기를 바란다. 길면 20년 정도 이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놀이터를 오가며 만나는 사람을 그때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놀이터를 바꾸는 일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귄터가 내게 늘 이야기하는 것처럼 끊임없는 접점을 찾는 지난한 과정임을 안다.
귄터는 이 세상이 어른이 어른을 위해 만든 세상이라고 했다. 놀이터 또한 예외가 아니다. 지금보다 나은 세상을 원한다면 어른이 자신들을 위해 만든 세상을 바꾸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의 할 일은 아이들이 자신들의 삶과 성장에 알맞은 환경 속에서 자랄 수 있도록 힘쓰는 일이라고 했다. 아이들은 무능하거나 순응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만약 무능하거나 순응하는 것으로 보인다면 그것은 어른들의 집요한 다그침과 노력의 결과일 뿐이란다. 나아가 아이들이 쑥쑥 구김 없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은 어른들의 계획과 목표로는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먼저 실토해야 한다고 했다. 이 망가진 세상에서 그 증거를 찾기는 어렵지 않다. 아이들 책임으로 돌리지 말고 아이들이 처한 현실 속 문제를 풀 열쇠를 아이들의 놀이와 놀이터 환경에서 찾아보자는 것이 귄터의 놀이터 생각이다.
놀이터란 ‘아이답게 놀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압도적인 유사 놀이와 상업적 놀이터의 범람 속에서 놀이터가 이미 매우 복잡하게 왜곡되어 있다. 나는 다시 한 번 ‘아이답게’에 방점을 두고 싶다. 그 ‘아이답게’를 좀 더 풀어 말하자면 ‘아이다운 몸짓과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이들이 아이답게 행동하는 것에 제지나 금지나 체벌이 없을 때 몸과 마음의 균형을 잡는다. 놀이터가 이렇듯 아이들이 아이다운 몸짓과 행동을 하는데 알맞게 만들어져 있다면 어른들은 아이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으리라. 만약 어른들이 아이들 때문에 힘들다면 아이들이 일상을 보내는 건물과 환경과 놀이터가 아이들의 몸과 몸짓과 욕구에 적합하지 않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내가 ‘어린이 욕구에 적합한 놀이터 환경 만들기 모더레이터’ 일을 하는 까닭이다.
귄터와의 놀이터 여행이 즐거웠기를 바란다. 이 책을 만들기 위해 두 번 독일에 갔고 돌아와 귄터로부터 두 번의 추가 놀이터 그림을 우편물로 받았다. 그 기억이 참 좋았다. 이 책이 출간되면 귄터가 한 번 더 한국에 다녀갈 것 같다. 다음은 기약하기 어렵다. 먼 길 오간 그림이고 내게는 귄터와 나눈 우정의 산물이니 다시 한 번 일독을 바란다. 그리고 어린이집·유치원·학교에 달린 놀이터와 공공놀이터를 조금씩 바꾸는 첫걸음을 디뎌보자. 나는 놀이터가 들어설 곳 가까이 사는 어린이/시민과 놀이터를 설계/시공하는 둘 사이를 오가며 ‘놀이터 모더레이터(중재자)’ 역할을 성실히 하려고 한다.
놀이터는 수전 G, 솔로몬의 말처럼 크나큰 위기에 처했다. 한국과 미국은 그런 점에서 매우 비슷한 처지에 있다. 놀이터 또한 변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수전의 책을 통해 나 또한 하고 싶다. 지루함과 고비용이 지금처럼 함께 간다면 놀이터 공사에 관련된 예산은 점점 설득력을 잃을 수밖에 없고 그것은 미국에서 사실로 확인되고 있다. 예산을 마련할 근거가 희박해진다는 뜻이다. 공공놀이터가 더는 아이들에게 매력적인 공간이 되지 못하고 있다면 관련 업체와 기관은 정신을 가다듬어야 마땅하고 그 대안을 찾아야 한다. 이 일은 놀이터 모더레이터인 나의 일이 아니라 당신들에게 더욱 급한 일이다. 내가 『놀이터, 위험해야 안전하다』(2015)에서 길게 이야기한 놀이터 민영화는 놀이 관련 기업과 기관의 심각한 퇴행을 낳을 것이다. 아이들이 가지도 않는 놀이터를 왜 돈 들여 만들어야 하느냐는 반론에 이제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맨 앞에서 나부터 따져 물을 것이다.
귄터 벨치히의 『놀이터 생각』에 이어 수전 G. 솔로몬Susan G. Solomon의 책 『놀이의 과학』The Science of Play: How to Build Playgrounds That Enhance Children's Development, 2016을 소개한다. 앞서 나온 『놀이터 생각』의 반향은 생각보다 깊고 넓었다. 어린이 놀이터 가까이 있는 많은 사람이 읽었고 곧장 실제 놀이터를 만드는 현장에서 좋은 교과서가 되었다. 적어도 한국 놀이터 이야기가 『놀이터 생각』 정도에서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은 큰 다행이다. ‘서울시 창의놀이터 가이드라인’과 ‘무장애통합놀이터매뉴얼’에도 중요 대목이 인용되고 있어 멀리서 책을 들고 온 사람으로서 기쁘다. 그러나 갈 길은 아직 멀다는 것 또한 귄터의 책 출간 이후 깨달았다. 작년 2015년은 한국에 난데없는 놀이터 광풍이 불었던 해이다. 많은 단체와 정부 기관에서 서로 놀이터에 뛰어들었고 그렇게 구체적인 놀이터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 흐름에 가장 중요한 알맹이가 빠져 있다는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그것은 바로 ‘위험Risk’이다. 위험을 정면에서 다루어야 한국 어린이 놀이터의 물꼬를 틀 수 있는데 모두 외면했다. 그 상황과 처지를 모르는 바 아니다. 내가 놀란 것은 모두가 다 그랬다는 것이다. 나는 한국에서 놀이터 논쟁에 관한 한 ‘급진주의자’로 흔히 매도된다. 단체 또는 매체와 놀이터에 관해 인터뷰했는데, 그중에 몇 곳은 위험의 유익함을 이야기한 부분을 싣지 않거나 얼버무렸다. 그들이 ‘위험’을 말하는 것조차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표적이 되기 싫고 불편해지기 싫고 소송에 휘말리기 싫은 것이다. 그 정도만 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그런 놀이터 짓기를 ‘시혜’의 차원이라고 본다. 놀이터는 아이들에게 가장 큰 선물 중 하나이다. 그래서 몇몇 개인과 단체는 놀이터를 통해 착한 일을 하려고 한다. 때로는 돈을 앞세우며 나서는 정도가 지나쳐 민망할 정도이다. 아무래도 그들은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위험을 만나고 그것을 다룰 수 있도록 디자인과 설계가 되어야 한다는 나의 주장이 불편하고 거북할 것이다.
놀이터는 아이들을 길들이는 동물 ‘우리’가 아니다. 조합놀이기구는 ‘순응’을 강요한다. 사용설명서대로 놀이기구를 쓰라는 것이다. 이리로 올라가고 저리로 내려오라 한다. 놀이터는 자유의 땅이다. 놀이터에서 놀다가 만나는 ‘위험’과 ‘부상’은 한국 사회에서 매우 민감한 주제이다. 그에 따른 보상과 합의라는 기막힌 차례가 아이들 놀이와 놀이터 주변을 어슬렁거리기 때문이다. 부모와 보험회사와 놀이기구제조회사가 어울려 놀이터는 점점 안전하게만 만들어지고 그 결과 한국의 어린이 놀이터는 지루함을 완성했다. 다칠 일도 다칠 수도 없는 놀이터가 지상을 평정한 것이다. 자, 이런 상황에서 어떤 개인과 단체에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놀다가 다치는 것에 대한 긍정과 유용함을 새겨들으라 할 수 있겠는가. 참으로 옴짝달싹할 수 없는 처지다. 이런 상황은 곧바로 한국 아이들을 대하는 어른들의 태도와 아이들이 처한 상황과 일치한다.
나는 수년 동안 그 균열을 내고 그 균열을 파고들어 아이들한테 왜 위험이라는 것이 중요한 교육과정이 되어야 하는지와 그것이 아이들한테 왜 필수불가결한 경험인지 이야기해왔다. 위험인지 아닌지는 아이가 마주하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아이들은 위험을 만날 수 있어야 하고 놀이터는 그런 곳이어야 한다. 아이들을 놀이터에서 위험Hazard에 빠뜨리겠다는 것이 아니라 놀이터 디자인과 설계를 할 때 위험요인Risk을 품고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거듭된 주장의 결과는 ‘외면’과 ‘급진주의자’라는 딱지였다. 우리는 진정 세월호를 건져낼 수 있을까. 매우 의문스럽다. 나는 세월호에 대한 내 생각을 한 권의 책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그 책의 이름은 『놀이터, 위험해야 안전하다』이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와 교사들의 응원도 있었다. 그런데 소위 놀이터 업계에서는 냉소를 보냈다. 한국을 또 한 번 깊이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놀이터에 관해 살아있는 세 분의 스승이 있다. 독일의 귄터 벨치히, 일본의 아마노 히데아키天野秀昭, 미국의 수전 G. 솔로몬이다. 이분들에게 한국 내에서 내가 하는 주장을 이야기하면 뭐라고 할 것 같은가 생각해본다. 마땅한 이야기라 할 것이다. 그런데 나를 위험을 설파하는 위험한 급진주의자라고 여긴다고 하면 이해를 못 한다. 왜냐하면, 상식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위험을 통해 배우고 성장한다는 대명제, 놀이터는 바로 그런 것들로 채워져야 한다. 나의 주장이 한국에서 상식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일본모험놀이터만들기협회日本冒険遊び場づくり協会에서 오래 활동한 아마노 히데아키 선생에게서 시간을 견디는 끈기와 집요함을 배우는 중이다. 일본은 모험놀이터 하나 만드는데 40년이 걸렸고 지금도 고군분투 중이다. 늦고 더디지만 가야 할 길이다. 이 글은 또 한 분의 스승에 관한 이야기를 쓰는 자리다. 멀리 미국에 사는 수전 G. 솔로몬이다. 앞서 이야기한 한국에서의 내 처지를 고민할 때 많은 위로를 받은 책이다.
“오늘날 미국의 놀이터는 아이들이 성장하도록 이끌어 줄 능력도, 막연한 미래의 시련에 대비할 수 있도록 도와줄 능력도 없다.”
미국을 한국으로 바꾸어놓아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미국 놀이터와 한국 놀이터는 생각보다 크게 다르지 않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우리나라 놀이터 또한 유럽 쪽이 아니라 미국에서 배워왔기 때문이다. 중요한 사실은 수전이 이야기하듯이 미국 어린이 놀이터가 형편없다는 것이다. 그런 미국 어린이 놀이터를 베껴온 우리 상황은 어떻겠는가. 이제 상황을 탓하고 진단하는 것에서 나아가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내가 수전을 만난 지점은 바로 여기다. 그녀는 미국의 놀이터가 어쩌다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지 살폈다.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수전의 주장 중 하나는 자발적이지 않은 놀이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겠다는 발언이다. 나 또한 요 몇 년 이 문제로 여러 벗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교사나 부모 주도의 놀이를 엄격히 놀이로 보지 않는다. 오해가 있을 수 있지만, 이것은 나에 대한 고해성사이기도 하다. 놀이가 아닌 놀이를 놀이라 하며 더는 사기를 칠 수 없기 때문이다. 놀이터는 특정인이 주도하는 놀이에서 벗어나 아이들이 놀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내가 놀이터에 주목하는 까닭이다. 사실 현재 한국의 어린이 놀이터는 부모들의 불안을 볼모로 삼아 구성되고 있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아이들의 놀이 욕구는 무시하고 오로지 안전에만 집중한다. 그러나 모든 일이 여기서 그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놀이터까지 나와 간섭을 하고 위험을 만나지 못하게 한 후 세상으로 아이들을 내보내는 것이 정말 위험하기 때문이다. 무엇이 진짜 위험인지 몰라서 그렇다. 위험에 관해서 수전은 앨런 남작 부인의 말을 인용한다.
“영혼이 부러지느니 차라리 다리가 부러지는 게 낫습니다. 다리는 언제든 고칠 수 있지만 영혼은 그렇지 못하니까요.”
이 말 앞에서는 주어가 생략되어 있다. 바로 ‘놀다가’이다. 지나친 과잉보호와 안전집착증, 아동학대는 양 극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매우 가까운 사이일 수 있다. 유럽이나 일본의 상황에서라면 아이들이 놀다가 다쳤을 때 분쟁에 휘말릴 가능성은 매우 낮다. 왜냐하면, 그곳은 사회 전체가 공동선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일차로 국가 차원의 의료체계가 작동하고 있어 신속한 응급조치와 안전하게 아이를 병원으로 데려가는 데 정신을 쏟는다. 그러나 수전이 면밀히 살폈듯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심각하게 다칠 확률은 매우 낮다.
“훨씬 더 넓은 의미에서 사회적 지원망이 두터운 집단주의는 더 큰 선을 고려할 여지가 많다. 반면 개인주의는 자기방어적이고 위험을 용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과잉안전’ 즉 합리적으로 필요한 수준을 넘어서는 안전을 추구한다. 북유럽 사람들은 놀이터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기술과 사회화를 강조한다. 2008년 유럽 놀이터 장비 기준과 같은 해 미국 CPSCConsumer Product Safety Commission, 소비자제품안전위원회의 지침을 비교해 보면 유럽인들은 위험을 받아들이고 부상 가능성을 인정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반면 미국인들은 조금이라도 취약성이 보인다 싶으면 무조건 통제하려고 든다.”
책을 읽다가 크게 공감한 대목이 있어 소개하고 싶다. 이제 막 걸음걸이를 시작한 두 살짜리 여자아이가 양손에 장비를 들고 장애물 너머 구덩이로 어떻게 들어갈지 몰라 쩔쩔매는 상황을 묘사한 글이다. 나 또한 이런 경이적인 순간을 더러 만나는 황홀경에 홀려 놀이터를 떠나고 있지 못한 것 같다.
“그리고 나서 잠시 뒤 아이는 들통과 삽을 모래에 내던지더니 자유로워진 손으로 바위에 찰싹 달라붙어 결국 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숨이 다 멎을 지경이었다.”
놀이터를 오랫동안 지켜본 사람으로 말하자면 한국의 어린이 놀이터는 크게 두 가지 큰 문제가 있다. 하나는 앞서 말한 ‘지루함’이다. 또 하나는 ‘고비용’이다. 써놓고 보니 다시 한 번 두 낱말이 서로 충돌하면서 모순을 일으키는 것을 느낀다. 고비용이면 재미있어야 하지 않나. 지루하면서 돈을 많이 들이다니 있을 수 없는 배반이다. 여기서 ‘위험’을 비용의 측면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아이들에게 모험심을 자극하거나 탐험과 그에 따른 위험이 느껴지는 놀 공간은 거꾸로 비용이 거의 들지 않은 놀이터일 수 있다. 일본의 모험놀이터가 그 예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실제로 이런 곳에 가보면 아이들은 수전의 말대로 ‘좋아 죽는 곳’이라는 것에 조금도 의심이 생기지 않는다. 나는 지금 돈 없이 놀이터를 만들자는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재미와 비용의 조화를 한국의 어린이 놀이터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곳에 위험Risk은 잔존해야 한다. 놀이터에서 놀다가 다쳐도 그 상처가 아물면 다시 놀이터에 와서 노는 그런 놀이터를 만들고 싶다. 수전은 이렇게 말한다.
“실패 또는 성공하려면 아이들은 자신의 현 상태가 도전에 직면했다가, 다시 말해 일이 잘못될 수도 있지만 자신에게는 결과를 책임질 능력이 있다고 느껴야 한다.”
위험요소는 아이를 놀이터로 부른다. 놀이터는 ‘건강한 위험’을 품도록 설계되어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 몸을 돌보며 마음껏 뛰어놀자’. 이 세 가지 생각을 만들어준 수전에게 감사드리며 아이들 안전과 부상과 골절에 전전긍긍하는 한국의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세상 온갖 진귀한 놀이터에 대한 짧고 날카로운 수전의 비평은 너무나 맛깔스러워 한마디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예의라 생각한다. 이 글이 세상에 나올 때쯤 한국에서 수전은 귄터와 아마노를 만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과 그녀가 도쿄와 뮌헨과 뉴욕에서 기적의놀이터를 보러 오기 때문이다.(*)
· 어린이와 시민과 행정의 파트너십으로 만든 1호 기적의놀이터 ①② | 편해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