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줄리앙은 고대 희랍철학을 전공한 학자이다. 그는 중국에서도 공부하였다. 그는 철학을 연구하되 “중국을 통해 나아가는 선택을 했다.” 그의 연구의 궁극적인 목표는 중국이 아니라 희랍이다. 이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자기를 잘 알기 위해서는 자기 안으로 파고 들어가 자기만을 열심히 연구해서는 안 된다. 멍하게 앉아있기 십상이다. 적어도 자기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 지라도 살펴보아야 한다. 자신의 역사를 스스로 되짚어 본다 해도 무엇을 추려낼 지에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것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는 없다. 외부에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뭔가가 있어서 그것에 비추어 보아야만 한다. 자기를 낯선 것으로 볼 수 있게 하는 외부의 지점이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저자가 인정하듯이 “인생에서 실천하기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가 자신의 정신과 거리를 두는 것”이다. 외부의 지점이 마땅한 것인가, 좋은 것인가는 차치하고라도 외부의 지점을 찾아야겠다는 시도 자체가 어렵다는 말일 것이다. 사람은 바깥으로 나가려 하지 않는다. 나간다 해도 자신이 본래 어디에 있었는지 잊어버린다. 별 탈이 없는 한 그것을 자신의 출발점이라 생각하고 그것에 머무른다. 본래의 자리에 돌아온다 해도 바깥을 그리워하기 쉽다. 안쪽과 바깥쪽을 구별하는 일 자체가 무의미한 지경에 이르곤 한다. 자기 밖으로 나가는 것은 “우회”이다. “첫 번째 단계인 ‘우회’는 사유의 낯설음이 무엇인지 체험해보는 것이다.” 바깥에서 자기를 보면, 자기가 자기 안에 있을 때에는 알지 못하던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자기에게 “동요”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우회는 회귀를 요청한다.” 본래 자기 밖으로 나가는 것은 그렇게 우회를 함으로써 자기를 더 잘 돌아보기 위함이었다. 프랑수아 줄리앙에게 우회와 회귀의 대상은 중국이다. 그에게 “회귀는 유럽적 이성을 지탱해주는 은폐된 암묵적 선택을 중국이라는 바깥을 통해 간접적으로 조명하는 것”이다. 그는 “사유를 불안하게 하려고 이론적 작동장치(그리고 폭로자)로서 중국에 의거한다.”
프랑수아 줄리앙은 고대 희랍철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고대 희랍철학 ‘안에서’ ─ 희랍철학에 즉卽해서 ─ 자신의 공부를 진전시켰다. 그는 그것을 바탕으로 “서양의 주요 철학구성요소들”, 즉 “존재, 신, 자유” 등을 궁리하였다. 그것은 하나의 완결된 자기체계를 가지고 있고, 그것이 고안한 문제풀이 방식에 따라 사유를 전개한다. 이 사유는 “이것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 인도유럽어”로써 수행된다. 이 유기적 체계와 언어를 벗어나 중국으로 우회하였을 때, ‘중국에 서서’ 서양의 주요 철학구성요소들을 볼 때, 즉 서양의 주요 철학구성요소들을 중국에 대對하여 보았을 때는 “갑작스럽게, 단숨에” 그 요소들은 “불안정”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중국은 어떤 외부이기에 이러한 동요를 불러일으키는가?
“중국은… 17세기까지 그리고 실질적으로는 19세기까지도… 〔서양의〕 역사 바깥에서 발전된 문명이다.” 중국은 서양에게 ‘언어의 외부성’, ‘역사의 외부성’이라는 두 가지 모두를 충족시키는 하나의 문명이다. 철저한 외부이다. 이것은 우리의 사유의 정체성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 우리가 우회하고 회귀할 외부를 찾을 때 갖추어야 할 최적의 조건을 만족시킨다. 다시 말해서 “유럽 사유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동시에 유럽 세계만큼 발전되고 문명화되었으며 텍스트까지 갖춘 문화세계로 눈을 돌리고 싶다면 요컨대 그런 곳은 중국밖에 없다.” 이처럼 중국은 유럽에게 전혀 다른 세계이다. 그러나 중국은 텅 빈 세계가 아니라 “꽉 찬” 세계이다. 거꾸로 유럽은 중국에게 전혀 다른 꽉 찬 세계이다. 이 둘은 서로에게 상응하는 외부성이다. 프랑수아 줄리앙은 이 두 세계에 즉해서 그리고 대해서 작업한다.
우리는 이 책에서 그가 작업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중국의 순환론적 사유의 암묵적 전통에 묻혀 있으면서도 인과의 존재론적 사슬을 따르는 합리적 사유가 가끔은 일상에서 시행되는, 철저하게 서구화되려 하지만 무엇이 그것인지도 잘 알아내지 못하는, 네이티브가 아닌 까닭에 어중간한 인도유럽어와 중국식 한자어와 일본식 한자어와 형성과정 불명의 한국적 학술어의 혼란 속에서 사는 우리에게, 요컨대 우리 자신마저도 우리 자신에게 낯선 우리에게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즉卽해서 읽어야 하는지,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대對해서 읽어야 하는지를 알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