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시대와 그것의 특정한 국면에서 살아간다. 이것들은 작품 속에 배어든다. 작가는 자신이 계수繼受한 것과 자신이 새롭게 고안한 것을 지성과 의지로써 결합하여 작품 안에 새겨넣는다. 이로써 작가는 작품을 발명한다. 독자는 작품을 읽는다. 읽기는 발견하는 행위이다.
드라마는 제일원리에서 연역적으로 전개되어, 잡다의 소여所與가 추상되어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툭 튀어나오는 변조가 있다. 드라마는 관객의 귀에 가닿기 위해 당대의 일상 언어로써 창작된다. 근원적 역사성을 담고 있는 것이다. 드라마는 관객의 심정을 끌어오기 위해 다양한 수사적 기법을 동원한다. 감동과 설득력을 가진 이야기를 만들고자 하는 독자에게 모방의 본을 마련해준다.
그렇다면 저 지리한 말장난 같아 보이는, 군데군데 산문이 작가의 정교한 궁리에 따라 삽입되었다고는 하나 본체는 운문 덩어리인, 당대의 관객들이 정말 저 말을 알아들었을지 궁금한, 어쩌면 작가 혼자 골방에 앉아 썼을지도 모를,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은 읽기 연습에 적합한 텍스트들일까?
이 책 『Shakespeare: the Basics』는 제목 그대로 셰익스피어를 읽기 위한 기본을 알려준다. 한국어판 제목은 『셰익스피어 깊이 읽기』이다. 원제는 ‘기본’인데 왜 번역본은 ‘깊이 읽기’인가. 영어를 사용하는 이들에게는 기본이지만 우리는 한국어를 사용하므로 그 간격에 일종의 깊이가 놓여 있기 때문인가. 기본을 아는 것이 깊이 읽는 것인가…….
셰익스피어를 읽기 위해 가장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가 살았던 시대와 특정 국면이다. 이것은 작가 연보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셰익스피어는 극장에 오는 관객을 위해 글을 썼다. 이것은 명백하면서도 아주 중요한 사항이다.” 이러한 것들도 넓은 의미에서 시대적 배경에 속하는 사항이다. 이로부터 “셰익스피어는 대사를 쓸 때, 배우들이 그 대사를 말하는 순간 관객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배려하면서 글을 썼다.”는, 셰익스피어 드라마의 언어와 구성에 관한 논의가 도출된다. 셰익스피어 드라마의 시대적 배경과 언어는 기본 중의 기본인 주제이다. 이 책 첫 장은 이를 다룬다. 공연대본으로 만들어진 드라마들, “‘순정한’ 텍스트는 없다는 사실”, 대사들을 이루는 운문의 특징, 셰익스피어 드라마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간주되는 비유들과 수사법 등을 탐구한다. 이러한 논의들이 낯선 이들은 장 말미에 붙어 있는 “요약”을 먼저 읽어 무엇이 핵심인지를 간단하게나마 예견하고, 중간에 상자로 처리되어 있는, 희곡들과 관련된 역사적 정보를 읽어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본문을 읽는 것이 좋다. 본문 읽기가 끝나 장 말미에 다시 이르면 “요약”을 다시 읽고 “더 생각해보기”에 들어 있는 물음들에 대한 답을 시도하는 것도 요긴하다. 셰익스피어를 잘 읽기 위해 이 책을 읽는 방식은 셰익스피어를 잘 읽는 방식이기도 하다.
셰익스피어에서 언어 — 여기에는 단순히 대사만이 아니라 그 대사를 듣는 관객, 그 대사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이야기하는 등장 인물이 모두 포함된다 — 다음으로 고려해야만 하는 것은 드라마가 공연된 하나의 세계로서의 ‘극장’이다. 셰익스피어의 드라마는 우주를 담을 수도 있고, 르네상스 시대(Age)를 담을 수도 있고, 잉글랜드 엘리자베스 1세와 제임스 1세 치세(Epoch)를 담을 수도 있지만, 어떤 것이든 당연하게도 극장이라는 우주 속에서 구현되어야만 한다. 드라마 작가가 얼마나 자질구레한 역사적 상황까지도 고려하고 있는지가 돋보이는 지점이 여기이기도 하다. 글로는 무엇이든 쓸 수 있다. 극작가는 그것을 ‘극장’이라는 세계에서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 가능태를 현실태로 만들어내는 과정을 끊임없이 고민해야만 하고, 실제로도 그것을 구현해야만 한다. 셰익스피어는 드라마 작가이자 극장주이기도 했으니 가능태로 존재하는 희곡을 쓰고, 그 희곡을 극장이라는 세계에 구현하고, 그 희곡이 구현되는 극장이라는 세계도 만들고 유지하는 일을 하였던 것이고, 그렇게 본다면 그는 이 세계를 창조하고 유지한 신이었다.
“언어”와 “극장”이라는 두 가지 기본(이면서도 깊이인 것)을 지나가면 ‘넓이’에 해당할만한 것들이 있다. “무대로 올린 셰익스피어”는 실제로 있었던 연극 공연과 배우들을, “영화로 만들어진 셰익스피어”는 말 그대로 영화화된 것들의 이런저런 사정을 다룬다. 시중에 유통중인 DVD 목록도 있으니 일단 이것부터 집에 앉아 하나씩 감상하는 것도 셰익스피어에 접근하는 또 다른 길일 게다.
기본과 넓이를 다룬 “1부 텍스트 이해하기”를 지나가면 본격적인 읽기, 다시 말해서 1부 1장 “셰익스피어의 언어”를 심화한 “2부 장르”가 있다. 여기부터는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깊이 읽기’이다. 셰익스피어는 코미디, 사극, 비극, 로맨스 등 드라마의 전 장르에 걸쳐 탁월하고 풍부한 희곡을 남겼다. 전 장르에 걸친 풍부함 — 이는 우리의 심화학습 주제가 많다는 것을 뜻한다. 목차에 있는 것들 중 몇 개만이라도 나열해보자: 코미디와 권력, 코미디와 퍼포먼스, 사극과 권력, 사극과 언어, 비극과 역사적 갈등, 비극과 권력, 로맨스와 유토피아. 이것은 셰익스피어 연구의 근본 주제들이겠는데, 이 근본을 연구하는 일은 분명 깊이 읽어야 가능할 것이다.
작가 한 명을 깊이 읽는다는 것, 물론 여기서 주의해야 하는 것은 과연 그가 그렇게 깊이 읽을만한 작가인가를 판별하는 일이겠지만, 그것은 시대와 국면과 의지와 지성이 필연적 우연적으로 결합되어 빚어진 발명된 작품을 통해 작가와 그 이면을 읽는 것이면서도 동시에 그 작가가 탁월함을 성취한 이라면, 그의 작품 읽기를 통해 읽기의 본을 획득하여, 읽을만한 작품과 의도적으로 간과하지 않으면 안 될 폐기물을 식별하여, 작품의 내면에 놓인 핵심을 발견하는 훈련을 수행함을 의미할 것인데, 이 책은 바로 그러한 훈련의 전 도정道程을 각별히 잘 제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