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나면, 그 책이 아무리 다양다종한 논의거리를 담고 있다 해도 삶의 여력이 생길 때 다시 읽어 또 다른 가지를 붙잡을 것을 스스로 기약하면서 독서 종료 시점에 파악한 줄기 하나를 잡아, 한 마디로 책의 내용을 집약해 두어야 한다. 이를테면 나는 여기저기 뒤적거리고 있다가 예수회 수련원에 2박 3일 들어간 김에 끝내리라 결심했으나 완결하지 못했던 로버트 루이스 윌켄Robert Louis Wilken의 《초기 기독교 사상의 정신The Spirit of Early Christian Thought: Seeking the Face of God》을 훗날 섬세하게 마주칠 것을 다짐하면서 ‘철학자의 신과 신학자〔실천가〕의 신이 처음으로 만나고 부딪힌 시 · 공간에서 일어난 일들에 관한 논의’로 매듭지어 두었다. 다른 맥락 속에서 찬찬히 정리할 수도 있겠으나 — 초월적 이념이 물질로 가득 찬 세계 속으로 들어와, 말씀이 사람이 되듯이, 인간 개인의 실천과 공동체의 관습 및 제도를 변화시켜 새로운 실정성을 형성하는 일종의 ‘Ding Politik’의 사례로 본다든가 하는 — 적어도 2015년 8월 말까지는 ‘철학자의 신 신학자의 신’이라는 주제 아래로 연관되는 책들을 재배열해야 하는 과제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하나의 책은 그 책을 읽는 목적에 따라 특정 단면에서 잘리고 그 측면에 따라 다른 책과 상응하게 되고 그에 따라 책 한 권에서 얻은 바를 다른 책에서 교차 검증할 수 있다. 이로써 주제 서평이 성립한다.
《군주론》만 읽고 《로마사 논고》를 읽지 않으면 마키아벨리의 조언을 절반만 따르는 셈이다. 그러한 이는 극악의 ‘마키아벨Machiavel’이 된다. 마키아벨은 “체제regime는 무형의 이념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모른다. 이러한 사례를 우리는 중국 수隋나라 황제였던 양제煬帝에서 본다. 《군주론》과 《로마사 논고》, 《수양제》는 마키아벨과 무형의 이념이라는 주제 아래 배열된다.
《수양제》의 첫 문단은 이렇다: “수양제라고 하면 누구나 바로 떠올리는 이미지가 중국 역사에서 보기 드물 정로의 음란하고 포학한 군주, 먼 옛날 은殷 나라의 주왕紂王이 살아 돌아온 듯한 천자天子일 것 같다. 그도 어느 정도 사실이기는 하지만, 주의해야 할 것은 수양제가 근본부터 악한 인물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는 아주 평범하면서도 동시에 여러 가지 약점을 지닌 인간이었다. 그를 둘러싼 시대 환경은 사회 자체에 아무런 이상理想도 존재하지 않았고, 모든 사람이 각자 다투면서 권력을 숭배하고 추구하며 남용하는 세상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환경에서는 평범한 군주일수록 큰 과실을 범하기 쉽다. 이런 까닭에 이 시기에는 음란하고 포학한 천자가 수양제 외에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등장했다. 말하자면 난폭한 천자의 예사스런 등장이 시대 풍조였다. 수양제는 그 가운데 한 사람에 불과했다. 실로 무서운 세상이었다.” 인물은 근본이 어떠한지가 아닌 어떤 세상에 사느냐에 따라 달리 형성되므로 여기서 핵심 술어는 “시대 환경”이다. 이 환경에는 물리적인 것만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사회 자체에 아무런 이상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심각한 환경 문제인 것이다.
이상이 없는 세상은 “실로 무서운 세상”이다. 얼마나 무서운 세상이었는가 하면, 폭력적인 천자들은 앞선 이들을 본받고 그렇게 본받아서 더 폭력적인 천자가 된 자들이 더 나쁜 사례를 남기고, 그렇게 사악한 사례들이 쌓였다. 저자가 “지금까지 서술한 내용은 상당히 강도를 낮추고 적당히 참작하여 소개했을 뿐이며, 실제 이루어진 천자의 난폭하고 음란한 행동은 훨씬 더 심각했다”고 할 정도로 질이 나쁜 시대였다.
무형의 이념, 즉 이상이 없으면 체제는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과도한 요구일지도 모른다. 그저 최소한의 상식만이라도 갖추기만 한다면 체제는 그럭저럭 작동하며, 이상이 있어야 작동하는 체제는 말 그대로 이상체제에 불과한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이 문제를 다른 측면에서 물어보자: 이상이 사라지고 심지어 사회의 기본 규범마저 소멸해 가는 시대 환경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저자에 따르면 중국의 남북조 시대는 “일반 백성의 지위가 매우 낮아 아무런 발언권이 주어지지” 않은데다 “국가는 백성을 계속 그런 지위에 묶어두기 위해 영구적으로 항상 계엄령을 내린” 때였다. 그렇다면 첫째 원인은 계엄령, 즉 무력통치인 듯하다. 천자가 병권을 독식하는 한, 시대 환경이 나빠지는 건 피할 수 없었다. 자체 무력을 갖추는 것이 탁월한 군주의 필수 요건이기는 하나 그것은 동시에 “무서운 세상”으로 가는 방편이기도 하다. 정리하면 상황은 이러하다: 군주에게는 무력이 필수다. 무력만으로는 체제가 유지되지 않는다. 유지는 커녕 곧바로 붕괴한다. 무형의 이념이 있어야 한다. 이념은 무력을 가진 군주가 갖출 수 없는 자질이다. 어떻게 해야 이 괴리를 극복할 수 있겠는가. 《수양제》는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는 듯하다.
수가 남북을 통일했고, 그 결과 “각종 새로운 정책을 실시했고, 그것들이 나중에 당으로 이어”진 것을 보면, 분명 수에게도 새로움이 있기는 하다. 양제도 그 새로움에 기여한 바가 조금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수양제는 “구태의연”했고 “낡은 방식으로 권력을 잡고, 낡은 방식으로 그 권력을 쥐고 흔들었으며, 마지막에는 낡은 방식으로 살해당했다.” 이게 수양제의 잘못일까. 그에게는 낡지 않은 것을 습득할 경로가 없었다. 수양제에 대비되는 당태종 이세민은 “당시로서는 이른바 새로운 유형의 인물이었다… 새로운 유형의 인물이란 기존의 구세력 위에 쉽게 편승하여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그 세력을 이용하는 능력밖에 없는 인간들과는 다르게, 자신의 힘으로 새로운 국면을 타개하려 했던 사람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이세민은 이러한 새로움(“여기서 새로움이란 절대 빌려온 것이어서는 안 된다. 진짜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낸 독창성이야말로 새로운 것으로서 평가될 수 있다.”)을 어떻게 획득할 것일까?
의문만 남았다. 체제는 무형의 이념이 없으면 작동하지 않는다고 하는 막연한 명제와 이념은 어디서 어떻게 길어 올려야 하는가를 붙잡은 채 책 한 권을 또 들춘다. 에드워드 슐츠의 《무신과 문신》이다. 이 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최 씨 정권의 치명적 결함은 문신과 유교를 육성했지만 자신의 체제를 위한 새로운 이념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었다.” 이념이 없어서 실패한 또 하나의 사례가 고려 시대 최 씨 정권이다. 그런데 이 구절도 눈에 들어온다: “일본은 중국의 모형과 다른 전통을 실험하면서 제도의 일부를 근본적으로 계속 개선한 반면 한국은 많은 부분에서 끝내 중국의 모형으로 되돌아갔다.” 최 씨 정권이 이겨내지 못한 고려의 문치적 전통은 중국에서 도입된 모형이고, 이는 그때 이후 되돌릴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는 조선 멸망기의 복잡한 사정들, 일본의 막말·유신, 해방 이후 재사유할 전통의 부재 등을 떠올리게 한다. 끝이 안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