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수많은 어린이와 어른들이 권정생의 어린이문학을 읽는다. 장편 『몽실 언니』는 올해로 100만 부가 넘게 팔려 이를 기념하는 크고 작은 행사가 곳곳에서 열린다. 애니메이션과 연극으로도 제작되었고 교과서에도 실린 『강아지똥』을 모르는 어린이는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지금처럼 권정생의 어린이문학을 많은 사람들이 읽고 있는 때에 ‘우리는 권정생의 어린이문학을 정말 잘 알고 있을까’라고 묻는 것이 가능할까? 오늘날 권정생의 어린이문학에 대한 이해와 평가를 보여주는 글들은 거의 무조건적인 칭송 일색이다. 그런 칭송들은 대개 권정생의 각별한 삶과 그런 삶을 살아간 진솔한 태도, 그의 작품들이 드러내는 일관된 주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삶 자체가 곧 그의 작품 세계가 되는 것은 아니며, 때문에 그의 삶에 대한 평가와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가 동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작품이 언급하고 있는 주제가 곧바로 작가의 작품 세계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권정생의 일관된 주제―통일과 사람다운 세상에 대한 염원, 하느님의 말씀과 같은―들은 분명하게 그의 작품 세계를 밝히는 중요한 실마리가 될 수 있겠지만 그것에 관한 한두 마디의 언급만으로 그의 작품 세계를 온전하게 정의하기는 어렵다. 또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는 그것 자체만으로 어떤 작품 세계를 구현한다고 판단할 수 있기보다 언제나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의 문제와 관련지어 말할 때에만 작품 세계에 대해서 의미 있게 작용할 수 있다. 생각해보라. 우리는 ‘통일’을 이야기하는 사람의 진정성을 판단하기 위해 그의 삶 궤적 모두를 살펴본다. 문학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문학에서 주제를 말하는 방식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주제보다 쉽게 드러나지 않는 더 중요한 것들을 발견할 수도 있다.
권정생의 ‘똥’은 씻김의 의식
나는 권정생의 문학을 사랑한다. 그의 어린이문학은 분명 우리 어린이문학 세계가 앞으로 꽃피우기 위해 되새기고 새롭게 재생산해야할 중요한 밑거름이다. 그런데 내가 권정생의 문학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말은 ‘민족’이나 ‘통일’이나 ‘사람 사는 세상’과 같은 거창한 말들이 아니다. 나는 언제나 그의 어린이문학을 생각하면 ‘똥’이란 말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권정생처럼 문학 속에서 똥이 많이 등장하는 작가가 또 없다. 그가 1969년에 공식적으로 등단하게 된 작품이 바로 유명한 『강아지똥』이다.
아주 어린 아이들은 ‘똥’이란 말에서 마음속에 억눌린 것들의 해방을 느낀다. 굳이 프로이드를 들먹이지 않아도 아이들은 ‘똥’이라는 말이 담고 있는 원초적인 배설의 기쁨을 만끽하고 표현할 줄 안다. 그래서 국적을 불문하고 많은 동화나 그림책에서 노골적으로 ‘똥’을 유희거리로 내세운다. 프란세스코 피토의 『똥 뿌직!』과 같은 그림책에서 동물 친구들은, 쉴 새 없이 싸대는 토끼의 똥으로 곤욕을 치르는데, 똥은 그치지 않고 급기야 산을 이루어 친구들이 그 산에서 스키를 즐기게 된다. 이춘희가 글을 쓰고 박지훈이 그림을 그린 『똥떡』은 지금과 같은 수세식 화장실이 보급되기 이전 과거의 변소에 빠진 아이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이다. 책제목에 배설물과 음식을 교묘하게 결합해 유쾌하지 않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권정생의 이야기 곳곳에서 ‘똥’은 의식적으로 되풀이되어 나타난다. 권정생의 ‘똥’은 이런 은밀한 욕망의 해방과 같은 유희와는 살짝 거리를 둔다. 권정생의 ‘똥’은 사람이 스스로를 되돌릴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이고 자연스러운 꾸밈없는 상태를 말한다. “모든 목숨은 모름지기 가장 밑바닥에서 엉망진창으로 견뎌봐야 한다. 그래야 세상을 바로 알게 된다.” 권정생의 『밥데기 죽데기』에 나오는 말이다. 권정생의 ‘똥’은 사람다운 세상으로 바로잡기 위해 누구나가 가장 먼저 갖춰야할 조건이기도 하다. 밥데기와 죽데기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장에서 산 달걀을 똥통에 한 달간 담가둔 것이다. 『랑랑별 때때롱』에서 랑랑별의 옛날, ‘사람 사는 곳이 못 되었던 때’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은 바로 자연 속에서 오줌을 쌌다는 이유로 경찰에 잡혀간 일이다. 그에게 ‘사람 사는 곳이 아닌 세상’은 똥과 오줌을 자꾸 더럽다고 감추려고만 하는 세상이다. 「만구 아저씨가 잃어버렸던 돈지갑」에서 톳제비는 똥을 싸고 지갑에 든 돈으로 닦지만 만구 아저씨는 눈치 채지 못한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돈이 갖는 권력을 똥으로 비아냥댄다.
권정생의 작품에서 ‘똥’은 때로 일종의 상징적인 의식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바닷가 아이들’에서 우연히 마주친 남과 북의 어린이는 알몸뚱이로 함께 헤엄치고 오줌을 누고 똥을 싼다. 권정생에게 똥을 싸는 일은 원초적인 자연으로 돌아가는 경건한 행위이며 똥과 같이 되는 것은, 세상을 바로 알기 위해서 반드시 임해야하는 밑바닥 삶을 견디는 것과 같다. 『강아지똥』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강아지똥의 하찮음과 민들레꽃을 피우기 위한 희생, 쓰임에 주목하지만 내가 보기에 강아지똥과 민들레는 분리된 둘이 아니다. 『밥데기 죽데기』에서 늑대 할머니가 똥통에 담갔던 달걀을 깨끗하게 씻어 향기 나는 등꽃나무 밑에 묻어두듯이 ‘똥’은 아름답고 깨끗한 세상을 위해 씻김처럼 거쳐 가야 하는 과정이다.
『랑랑별 때때롱』에서 그는 말한다. “지금 지구 나라는 온통 쓰레기뿐이고 사람 사는 곳이 못 된다”고. 『밥데기 죽데기』에서 늑대 할머니는 “세상 모두가 함께 살아가자면 사람들 마음을 고쳐 놓아야 한다”면서 결연한 각오와 함께 보리밥집에 가서 든든하게 속을 채운 뒤 다들 똥을 누게 한다(내가 처음 권정생 선생을 뵀을 때 안동중앙시장에서 보리밥을 사주셨는데 이 책을 읽고 보니 그게 그런 뜻이었나 싶다). 그런 뒤 그림책 『똥떡』과 달리, 말 그대로 진짜 똥떡을 빚어 온 세상에 가루로 뿌린다. 그러자 온 세상의 달걀에서 병아리가 절로 부화하고 모든 세상의 쇠붙이가 녹아 무기는 사라지고 남과 북이 통일을 이룬다. 권정생이 생각하는 ‘똥’의 진정한 힘이란 그런 것이다.
권정생은 세련된 작가가 아니다
사실 그의 어린이문학 속에서 이렇다 할 문학적 수사나 구성의 기획 같은 것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그의 글쓰기는 지극히 단순하여 불필요한 꾸밈이나 복선과 같은 어떠한 장치를 찾아보기 어렵고 이야기꾼의 사설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그의 이야기는 읽는 사람의 가슴을 옭죄면서 쥐락펴락하는 권세도 부리지 않는다. 그의 가장 슬픈 이야기들에서도 슬픔은 가랑비가 옷을 적시듯 점점 진하게 배어들 뿐, 인물이 수렁 속으로 스스로 몸을 던지는 것과 같은 극적인 속도와 비약을 꾀하지 않는다. 『몽실 언니』 같은 작품을 읽으면서 우리가 어떠한 문학적 허술함을 느낄 수 없는 것은, 이야기가 매우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몽실’이라는 인물에 심정적으로 깊이 빠져들 수 있기 때문이다. 때때로 그의 이야기가 지나치게 산만하거나 의식적인 메시지에 더 주의를 기울일 때, 문학적 허술함은 여지없이 드러난다.
종종 『몽실 언니』보다 『점득이네』가 더 나은 작품이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 최근에도 그와 비슷한 견해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점득이네』가 『몽실 언니』에 비해 민족이 겪었던 수난사의 배경을 더 총체적으로 전달하기 때문이다. 확실히 『몽실 언니』는 일제 강점기 이후 해방과 전쟁까지 우리 민족 전체가 겪어야 했던 수난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한 인물에 초점을 맞춘 개인사적 측면이 강하다. 그에 비해 『점득이네』는 우리 민족이 왜 그와 같은 수난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 전체적으로 객관적인 시각에서 조망한다. 그래서 『점득이네』는 딱히 누구 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꼽기가 어렵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누구보다 그 배경을 이루는 시대가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나는 『점득이네』를 그리 성공적인 작품이라고 보지 않는다. 현대사의 어떤 장면을 객관적으로 조망하여 이야기로 풀어내 보여주는 것은 권정생의 장기가 아니다. 『점득이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생기가 없다. 단지 역사적 장면을 정확하게 재현하기 위한 소품들로 한정되어 역할할 때가 많다. 그런 면은 이원수의 어린이문학과 비교하면 더 잘 드러난다. 『민들레의 노래』나 『메아리 소년』 같은 작품에서 이원수의 주인공들은 시대를 개인의 삶속에 어떻게 녹여낼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원수의 주인공들이 역사와 시대를 성찰하고 중심이 되어 변화하고 행동하는 것과 달리 권정생의 인물들은 역사 속에서 고통 받고 희생을 강요당하면서 읽는 사람의 동정과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이원수의 인물과 달리 권정생의 인물은 수동적이지만 즉각적으로 읽는 사람과의 심리적 거리를 없애 버린다. 시대를 개인의 삶이라는 그릇에 옮겨 담는 것을 기준으로 보자면 이원수의 문학이 한결 세련되고 에피소드들은 치밀하게 잘 구조화되어 있다.
권정생 문학이 갖는 힘은 그런 것과 조금 다르다. 권정생은 세련된 작가가 아니다. 그의 이야기는 그의 사람 됨됨이만큼 맑고 꾸밈이 없다. 그의 이야기는 샘물처럼 쉼 없이 흘러나오며 독자들의 공감을 인물에게로 빨아들이는 힘을 가지고 있다. 오물덩이처럼 밑바닥에서 뒹굴면서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인물들은, 문학적 허술함이나 단순함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이 강하게 공감하게 만든다.
권정생이 자신이 살아온 삶을 ‘오물덩이’처럼 뒹군 삶이라고 회상한 것처럼 그가 만들어 낸 인물들 역시 오물덩이처럼 세상의 밑바닥에서 고통 받고 역사에 떠밀려 이리저리 뒹군다. 그의 이야기에는 특히 신체의 일부가 불구가 되는 인물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는 신체의 일부를 잃는 고통을 “생명을 앗아가는 일보다” 더한 것으로 여겼던 것 같다. 점득이는 눈을 잃고 몽실은 다리를 절게 되고 『밥데기 죽데기』에서 사마귀 할아버지는 다리를 잃는다. 그가 쓴 가장 훌륭한 단편 가운데 하나인 「빼떼기」에서도 깜장 병아리는 아궁이 불에 데어 빼딱하게 걷는다. 어린 독자들은 이 빼떼기가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를 여러 차례 겪는 것을 보며 마음속으로 반드시 살아남기를 응원하게 될 것이다. 때문에 식구들이 전쟁으로 피난을 가게 되어 빼떼기를 잡아먹기로 결정할 때 독자들은 당황할지도 모른다. 권정생의 이야기가 갖고 있는 꾸밈없는 자연스러움은 이렇듯 내심 이야기가 흘러갈 거라는 뻔한 기대마저 해제시켜 버린다. 그에 비하면 요즘 쏟아져 나오는 신인 작가들의 새로운 어린이문학들은 너무나 진부해서 처음 몇 장을 들춰보기만 해도 그 속을 모조리 다 드러내 보이고 만다.
권정생의 이야기에는
‘어른의 욕망’이 남아있다
나는 권정생의 문학 속 ‘똥’의 철학도 좋고 그의 꾸밈없는 이야기도, 오물덩이처럼 밑바닥에서 고통 받는 슬픈 인물들도 좋아한다. 하지만 그의 문학 그대로가 오늘날 우리 어린이문학의 새 길이 될 수 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엄밀하게 말해서 권정생의 문학은 어린이문학의 경계에 놓여 있다. 그의 문학은 어린이문학 이전의 이야기에 더 가깝다. 어린이를 위한 어린이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어린이에게 들려주고 싶은 어른의 이야기에 아직 머물러 있는 것이다. 권정생의 단편 가운데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앵두가 빨갛게 익을 때」는 전쟁 때 포로로 잡혀 남한에 정착하게 된 이북내기 공달수와 주상민의 이야기이다. 그들은 어른이지만 어린아이 같은 문제로 사이가 벌어져 아이들처럼 다투다 결국엔 아예 틀어지고 만다. 그들이 어린이처럼 그려지는 것은 어린이의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 아니다. 같은 이북내기가 서로 반목하다가 앵두가 빨갛게 익을 무렵 고향에 대한 추억으로 다시 화해하게 된다는 어른의 이야기를 어린이에게 잘 전달하기 위함이다.
그의 삶이 그대로 투영된 『도토리 예배당 종지기 아저씨』 역시 마찬가지다. 아저씨는 단순하고 어린아이 같은 생각을 하며 작은 동물들과 교감한다.
아저씨는 왜 쩨쩨하게 밤낮 생쥐하고 토끼하고 참새하고 개구리하고만 얘기하느냐고 묻는다면, 아저씨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얘기할 사람이 없단다.”
하지만 이는 어린이에게 이야기를 전하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권정생의 어린이문학을 칭송하기 위해 이러한 문학을 실제 요즘 어린이들도 재미있게 읽는다고 강변하는 것은, 마치 떡을 그다지 즐겨먹지 않는 아이에게 떡을 먹이고 맛있냐고 물은 다음 어린 아이가 그렇다고 대답하면 아이들은 어떤 음식보다 떡을 좋아한다고 결론짓는 것과 비슷한 비약이다.
그의 문학 이면에는 언제나 그의 고통스러웠던 삶이 짙게 드리운 음울한 그늘이 자리 잡고 있다. 대부분 권정생의 이야기 출처는 어린이가 아니라 어른이다. 많은 사람들이 따뜻하다고 말하는 권정생의 유년동화에서도 따뜻한 마음 뒤에 감춰진 짙은 외로움과 우울한 그늘을 읽을 수 있다. 「아기 토끼와 채송화 꽃」에서 엄마가 장사를 나가 혼자 집을 보는 명수가 혼자 있는 아기토끼와 채송화 꽃을 불쌍하게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은 최종적으로 돌아가신 아빠와 외로움을 잘 알고 있는 작가에게로 향한다. 「또야 너구리의 심부름」은 심부름 값으로 받은 백 원을 엄마와 나누는 어린이의 마음을 그리고 있지만, 어린이의 따뜻한 마음은 사실 어린이를 바라보는 어른의 욕망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간과한다. 유년동화에서도 어린이의 자연스러운 욕망은 주목받지 못하고 어린이는 어른의 욕망을 대리하고 그대로 수용하는 것에 머문다. 이는 1920년대 이후 우리 어린이문학에서 되풀이되던 경향이다.
『몽실 언니』는 몽실이가 어린 시절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 그려내고 있지만 그 성격상 성장 소설(많은 사람들이 성장 소설로 이야기하고 있지만)로 보기 어렵다. 몽실이의 내적인 성장이 그려지기보다 몽실이는 역사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성장해가는 것에 불과하다. 딱히, 어린이에게 초점을 맞춘 이야기가 아니다. 『강아지똥』 역시 어린이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로서의 한계에 머문다. 나는 권정생 스스로 이런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밥데기 죽데기』에서는 어린이 이야기 대신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가 중심에 놓이지만 그의 이야기에서 남다르게 어린이 캐릭터가 만들어진다. ‘밥데기’와 ‘죽데기’라는 달걀귀신이 어린이 캐릭터를 표방하는 것. 권정생은 어린이 독자에게 더욱 초점을 맞추기 위해 이야기 내내 익살스러운 해학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런데 왜 그냥 어린이가 아니고 꼭 달걀귀신이어야 했을까? 단지 이야기의 재미를 위해서였을까? 난 권정생이 실제로 어린이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야기 속에서 정직하게 어린이와 대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한 생각들은 『랑랑별 때때롱』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랑랑별 때때롱』은 권정생의 어떤 작품보다 형식적으로 현대의 어린이문학에 가깝다. 어린이에 초점을 맞춘 화자는 어린이 주인공이 중심에서 이야기를 이끌고 가도록 한다. 물론 권정생의 다른 작품들처럼 사회에 대한 메시지를 강하게 담고 있지만 그 어느 때보다 어린이의 삶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어린이에 대한 권정생의 관찰은 피상적이다. 아이들은 아이들답게 살아야 한다는 막연한 메시지나, 지구별의 아이들은 고기하고 과자만 먹고 뚱뚱해졌다는 비판, “공부는 학교에서만 하고 집에서는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같은 말만 있을 뿐, 이야기 속에 녹아들지 못한다. 이원수가 1959년에 쓴 『아이들의 호수』에서 시대와 아이들의 삶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어린이들을 구원해 줄 낙원에 대한 이야기를 그려냈던 것과 같은 어린이 세계에 대한 이해가 권정생의 작품에서는 부족하다. 그는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의 저작권료를 어린이를 위해 써 달라는 유언을 남겼을 만큼 어린이를 사랑하는 마음은 지극했지만 그의 어린이문학은 어린이문학으로서 미완의 문학이었다.
똥이 똥다워지고 사람이 사람다워지는
헐벗은 정직함
그러나 권정생의 어린이문학이 ‘어린이문학다움’을 갖춘 문학이냐 아니냐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권정생의 많은 작품들은 어린이에게 주는 문학으로서 훌륭한 문학이다. 나는 무엇보다 권정생의 문학에 등장하는 ‘똥’이 보여주는 철학과 원초적으로 헐벗은 자연스러운 이야기가 좋다. 그는 언제나 “사람이 사람다워지는 것, 똥이 똥다워지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 하는 것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의 삶과 문학 모두에서 그러한 생각을 시종일관 보여주었다.
그의 이야기처럼 세상을 사람다운 세상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기 위해 우리 모두가 가장 원초적인 밑바닥에서 똥덩어리처럼 뒹굴어서 똥의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가 꿈꾸는 세상은 서로 동무가 되고 서로 나누며 서로를 걱정하면서 반목하지 않는 세상이다. 그리고 사람이든 동물이든 각자가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알고 자기 자리를 찾아 세상 모두가 평화롭고 물처럼 정직해지는 세상이다. 권정생의 어린이문학은 그러한 꿈을 똥과 오물덩이처럼 뒹구는 삶을 통해 우리에게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그런 세상을 꿈꾼 권정생의 어린이문학이 바로, 강아지똥이 온몸을 다해 피워낸 별과 같은 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