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혜숙 │ 그림책 작가·평론가196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한국과 일본에서 문학과 그림책을 공부하고, 어린이책 기획, 집필, 번역, 비평 등의 일을 하고 있다. 그림책 『비밀이야, 비밀!』 『단 방귀 사려』 『구렁덩덩 새선비』 등에 글을 썼고, 『깃털 없는 기러기 보르카』 『큰고니의 하늘』 『모두 깜짝』 『소피는 농부가 될 거야』 『인도의 딸』 등을 번역했다. 그림책 평론집으로 『나의 즐거운 그림책 읽기』가 있다.
“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이 작품을 읽고 나서 계속 맴도는 구절이다. 맞다. 윤동주의 「서시」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왜 그럴까 싶어 생각해 보았더니, 작품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나’가 만난 너구리와 장 씨 할아버지 때문이다. 너구리는 동네 뒷산인 모꼬에서 하늘의 별을 관측하고, 장 씨 할아버지는 과수원에서 복숭아 농사를 짓다가 죽는 인물이다. 부동산업자인 ‘나’는 이 두 인물을 만남으로써 이전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된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삶을 완전히 바꾼 만남, 새로운 시작에 관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겠다. ‘나’의 ‘서시’인 셈이다.
‘나’를 둘러싼 현실
주인공 ‘나’는 어떤 사람일까. ‘나’는 부동산 개발업자인데, ‘나’는 자신의 일을 이렇게 표현한다. “알맞은 땅을 찾아 그 땅에 맞는 개발 계획을 세우고 땅주인들을 설득해 땅을 팔게 한 다음,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나’가 원래부터 부동산 개발업자였던 것은 아니다. ‘나’도 어렸을 때는 하늘의 별을 보며 저 별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하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점차 해야 할 공부가 많아지면서 그것들을 잊고, 현실을 염두에 두고 취직이 잘 되는 공과대학 기계과를 나와 대기업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대기업을 퇴직하고 부동산 개발업자가 된 것이다. ‘나’는 시골 마을 선바위골의 땅을 사서 개발하고자 하는데, 아무리 설득해도 땅을 팔지 않는 이가 있다. 바로 과수원 장 씨 할아버지다. ‘나’는 장 씨 할아버지의 맘을 돌리고자 가족과 함께 살던 서울의 집을 떠나 장 씨 할아버지 옆집에서 혼자 살기 시작하는 것으로 작품이 시작된다.
주인공 ‘나’의 가정은 어떤 상황일까. ‘나’에게는 전업주부인 아내와 5학년짜리 아들 민우가 있다. 아내는 직장에 다녔으나 아이가 생기자 아이를 잘 키우겠다는 목표 아래 직장을 그만둔다. 그런데 아내가 기대한 만큼 아들 민우가 공부를 잘하지 못하는 바람에 아내와 아들은 사이가 좋지 않다. 특히 사춘기가 접어든 지금, 둘 사이의 관계는 점점 악화되고 있다. 민우는 게임을 좋아하는 평범한 남자아이인데, 아내는 민우를 수학학원에 다니게 하면서 남보다 뛰어난 아이로 만들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교육 방침은 아이를 지치게 할 뿐이다. 자꾸 반항적이 되는 민우를 아내는 감당하지 못하고, 따로 지내는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에 ‘나’는 민우의 의견을 받아들여 협정을 맺는다. 민우가 집에서 수학을 공부하기로 약속하자 수학학원을 그만두게 한 것이다. 이제 민우는 자기가 좋아하는 피아노 학원, 영어 학원, 두 가지만 다니게 된다. 그러나 민우의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아내는 민우를 위한다는 명목 아래, 유명한 수학 그룹과외를 수소문해 들어가게 한다. 민우는 여기서도 견디지 못하고, 자기 혼자 공부해서 90점 이상을 맞겠다고 약속하고 그룹과외를 그만둔다. 그런데 그건 애당초 무리한 약속이었다. 민우는 수학 성적이 90점 이상이 되지 못하자 성적을 위조한다. 그리고 그걸 들켜서 엄마에게 혼나고 뺨까지 맞자 민우는 집을 나간다.
여기서 우리는 ‘나’를 비롯한 세 사람의 상태를 알 수 있다. 모두 자신이 바라는 삶과는 다른 삶을 현재 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현실적인 선택을 하여 대기업까지 들어갔으나 아이가 12살이 될 때는 이미 퇴직하여 자영업자가 되었다. ‘나’는 아들 교육은 아내에게 맡기고 자신은 집에 꼬박꼬박 생활비를 가져다주는 것으로 자기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으로 치부한다. 아내도 마찬가지다. 아이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었기 때문에, 아들을 더 뛰어난 아이로 키우고 싶어 한다. 아내에게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아들 교육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내는 아들 민우에게 건강에 나쁘다며 라면도 못 먹게 하고, 유기농 식품만 먹게 한다. 그러면서도 아이가 하기 싫어하는 공부는 ‘아들을 위하고 사랑한다.’는 이유로 강요하는 것이다. 실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억압’이지만 말이다. 아들 민우는 어떠한가. 민우는 라면을 좋아하고, 게임을 좋아하는 아주 평범한 아이다. ‘5학년이면 5학년 진도대로 공부하면 되지 왜 선행학습을 해야 하나’ 생각하는 아주 상식적인 아이다. ‘왜 지금 하고 싶은 것을 못하고, 하기 싫은 것을 계속하고 살아야 하나’를 질문하는 평범하고 건전한 아이인 것이다. 그래서 자꾸 엄마와 부딪치는, 불만스러운 삶을 살아야 하는 아이인 것이다.
만남이 낳은 균열
부동산 개발업자인 ‘나’는 ‘개발’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것’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는다. 한번 목표를 세우면, 성취할 때까지 끈질기게 노력하는 추진력도 있다. 그런 성격 때문에 ‘나’는 선바위골로 이사까지 하면서 과수원 장 씨 할아버지의 환심을 사고자 한다. 그 방법은 바로 과수원 일을 돕는 것. 그런데 출근 전에 과수원 일을 돕자니, 자기가 세운 계획을 수정해야 한다. 그건 바로 날마다 뒷산에 올라가는 것. 그래서 ‘나’는 출근 전에는 장 씨 할아버지 과수원 일을 돕고, 퇴근 뒤에야 뒷산에 올라가게 된다. 그러다가 월식이 일어나는 밤, 선바위골 뒷산에서 하늘의 달을 관측하는 너구리를 만나게 된다.
너구리와의 만남은 우연히 이루어졌다. 뒷산에 올라갔는데, 누가 바위에 앉아있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 ‘나’는 그게 덩치 작은 사람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람. 그건 바로 말도 하고, 하늘의 달이나 별을 관측하는 너구리였다. 그런데 이 너구리는 너구리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다. 너구리들은 함께 똥을 누면서, 먹이에 관한 정보를 공유하는데, 동족 너구리들은 하늘을 관찰하는 너구리와 함께 똥을 누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자 ‘나’는 너구리에게 같이 라면을 먹자고 청하고, 여기에서 둘은 친해질 계기가 생긴다. 너구리일망정 ‘나’는 상대방에게 먹을 게 필요한 걸 깨닫자 함께 밥을 먹자고 권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께 밥을 먹으면서 ‘나’와 너구리는 점점 더 친해진다.
그렇다면 너구리는 어떤 존재인가. 우선, 너구리는 무한에 대해 궁금해하는 존재다. 동료 너구리들에게 따돌림당한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이렇게 말한다. “쯧쯧, 그러게 왜 힘들게 하늘을 관측하고 살아?” 그러자 너구리는 놀라운 말을 한다. “나넌 무한한 걷들 보고 싶으믿. 내 짤븐 생애 사는 거, 먹이만 차자 다닝 건 허무하믿.” “힘들게 공부한 해야 하는 인생은 허무하다”고 하던 아들 민우의 말과 함께 너구리의 이 말은 ‘나’에게 충격을 준다. 둘째, 너구리는 자기 눈과 체험을 중요하게 여긴다. 너구리는 자기 눈과 체험을 바탕으로 하늘의 운동을 이해한다. 너구리의 인식은 아직 ‘천동설’ 차원이다. ‘나’가 지구가 움직인다고 ‘지동설’을 알려주자 너구리는 반박한다. 일견 우스꽝스러울 수 있지만, 이 지점이 중요하다. 남에게 듣거나 배운 사실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느끼고 발견한 사실이 소중하다는 생각 말이다. 너구리는 철저히 자신이 보고 생각하고 해석한다. ‘나’는 이런 너구리를 만나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된다.
또 다른 중요한 만남은 과수원 장 씨 할아버지와의 만남이다. ‘나’에게 땅을 팔고도, 장 씨 할아버지는 여전히 과수원의 복숭아나무를 돌본다. 농부인 장 씨 할아버지에게 땅은 개발의 대상이 아니다. 몸을 움직여 무언가를 생산해 내는 삶의 터전인 것이다. 자신이 폐암에 걸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고, 도시에 사는 자식도 과수원을 운영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부동산 개발업자인 ‘나’에게 과수원을 팔지만, 자신이 쓰러지는 날까지 여전히 땅을 일구고 복숭아나무를 돌보는 것이다. 처음에 ‘나’는 과수원을 사기 위해 장 씨 할아버지에게 접근했지만, 이런 장 씨 할아버지를 이해하고 가까워지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조금씩 생각이 바뀌는 것이다.
새로운 시작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나’는 과수원을 비롯한 선바위골 개발을 포기한다. 손해를 감수하고 포기하는 것이다. 선바위골이 개발되면 뒷산에 사는 너구리를 비롯해 동물들의 삶의 터전이 사라진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 까닭이다. 이런 ‘나’에게 장 씨 할아버지는 아들을 통해 뒷산은 너구리에게, 집과 과수원은 ‘나’에게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긴다. ‘나’는 장 씨 할아버지가 살던 집에서 가출했던 아들 민우와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자연과 함께 하는 삶, 자신이 원하는 삶을 스스로 찾아가는 삶인 것이다. 아마도 ‘나’의 아내도 언젠가는 그 길에 동참할 것이다.
이 작품은 ‘하늘과 별과 땅과 생명’을 다룬 이 시대의 ‘서시’라고 할 수 있다.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자행되는, ‘돈’이 최고가 아닌 다른 가치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만이 아니라 동물이나 식물까지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나’의 가정은 우리 시대에 아주 평범한, 흔히 볼 수 있는 도시의 소시민 가정이라고 할 수 있다. 남편은 바깥에서 돈을 벌고, 아내는 집에서 가사와 육아를 맡고, 아이는 학습 노동을 하는 그런 가정 말이다. 이런 ‘나’가 별을 관측하는 너구리와 농사를 짓는 장 씨 할아버지를 만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 ‘나’가 바뀌기 시작하면서 나‘의 가정도 바뀌기 시작한다. 새로운 삶이란 사람과 자연이 공존하는 삶,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이 함께 사는 삶이다. 땀 흘려 짓는 농사야말로 가장 소중한 일이고, 농사꾼이야말로 생명에 관계된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갈파한 톨스토이나 권정생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참깨밭 너구리』(유승희 글, 윤봉선 그림, 책읽는곰, 2015)에 이은 유승희 작가의 두 번째 작품인데, 다음 작품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