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얼마 동안 어디에
영화와 사진 속에서 그 도시는 언제나 빌딩이나 공원에 둘러싸여 있었다. 높고 현란한 전광판이 몇 겹으로 펼쳐져 있기도 했고 전 세계에서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이 복잡한 지하철 계단을 바쁜 걸음으로 오르내렸으며 야외 분수대 앞에서는 거리 공연이 열렸다. 누군가 그 도시를 여행했다고 말하면 대개는 경찰차와 노란 택시들, 멋진 공원과 수준 높은 공연장, 베이글이나 스테이크 식당, 미술관과 박물관,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과 증권거래소, 이런 것들에 대해 물을 것이다. 어쩌면 도심 한가운데의 소란스러운 작은 술집들 혹은 화려한 다리의 야경 등에 대한 끊임없는 자랑을 듣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승아에게서는 그중 어떤 이야기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승아가 그 도시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건 끔찍한 더위, 가로막힌 창문들, 저녁 거리에 쌓여 있는 검은 쓰레기봉투의 냄새, 시간을 지키지 않는 우편물, 그리고 친구네 집 벽에 걸린 통근용 자전거 같은 것이었다.
토요일
그 도시에 가기 위해서는 비행기를 열네 시간이나 타야 했다. 두 번의 기내식을 먹고 날짜 변경선을 지나고 갖가지 형태의 구름과 검은 밤과 황금빛 여명 속을 통과하는 긴 시간 동안 승아는 계속해서 깨어 있었다. 실내등이 꺼진 뒤 와인을 청해 마셔보았지만 끝내 잠은 오지 않았다. JFK공항에 내렸을 때는 약간 몽롱하면서도 긴장된 상태였다.
입국 심사대를 통과하는 일은 걱정했던 것보다 쉬웠다. 이민국 공무원은 예상대로 세 가지 질문을 던졌다. 왜, 얼마 동안, 어디에. 승아는 친구를 방문하러 왔으며 열흘 동안 그녀의 집에서 지낼 거라고 준비된 대답을 했다. 이국의 공항에서 영어로 말하고 있는 자신을 의식하자 그제서야 떠나왔다는 것이 실감되었다. 하지만 이 여행을 위한 준비는 거기까지였다. 승아는 영어도 서툴렀고 길눈도 어둡고 돈도 별로 없었다. 사실은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은 채 막연한 기대만 갖고 떠나온 셈이었다. 수하물을 찾아 세관을 통과한 그녀는 백팩 속에서 명품 로고가 선명한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게이트 앞에 서 있는 마중객들 속에서 승아는 민영을 쉽게 찾아냈다. 구겨진 민소매 셔츠에 평범한 검은색 슬랙스. 언제 잘랐는지 긴 머리가 단발로 바뀌었는데 앞머리가 눈을 가릴 만큼 흘러내려와 있었다. 인스타그램에서 보았던 자유롭고 들뜬 듯한 모습과는 달리 표정도 건조하고 피곤이 느껴졌다. “오랜만이다.” 민영이 다가와 담담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응.” 머리 위로 들어 흔들던 손을 아래로 내리며 승아도 짧게 대꾸했다.
둘이 마지막으로 만난 건 재작년 여름, 민영이 대학원 과정을 마치고 유학생으로서 마지막 방학을 보내러 서울에 왔을 때였다. 승아는 민영을 서촌에서 만나 길게 줄이 늘어선 떡볶이집으로 안내했고 한 그릇에 만이천원이나 하는 빙수 카페에도 데려갔다. 그때 민영은 남의 나라에서 취업을 준비하는 어려움과 수모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이비리그를 졸업해도 외국인은 어쩔 도리가 없다고 말하는 민영은 이미 수없이 많은 거절을 당해 기운이 빠진 것 같았다. 한국은 맛있는 것도 많고 모든 게 빠르고 편리하며 사람들도 다 세련되고 능력 있어 보인다는 말도 했다. 하지만 한국에 돌아오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취업에 집착하는 이유 역시 독립을 위해서라기보다 거기에 계속 머무르려면 그 방법밖에 없기 때문인 듯 했다. 그리고 지금 민영은 전 세계의 문화와 사람과 돈이 모여든다는 이 도시의 직장인이었다.
“그거 이리 줘.” 민영이 캐리어 위에 올려놓은 승아의 백팩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 안 무거워.” “그래, 그럼.” 등을 돌려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민영을 뒤따르기 위해 승아는 급히 목베개가 달랑거리는 백팩을 메고 캐리어를 밀기 시작했다. 게이트를 빠져나오니 건물 밖에는 여름 한낮의 햇살이 하얗게 내리쬐고 있었다. 승아가 처음 만나는 이 도시의 햇빛과 공기였다. 민영은 도심으로 가는 공항 열차를 탄 다음 지하철로 갈아탈 거라고 말하면서 햇빛 때문에 눈을 찡그렸다.
지하철에는 빈자리가 많았다. 몇 마디 안부를 주고받은 뒤 민영은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 두어 정거장쯤 지났을까. 다시 눈을 뜨더니 승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진짜 올 줄은 몰랐어.” “왜?” “다들 바쁘니까.” “바쁘긴 하지.” 민영의 말에 애매하게 대꾸한 다음 승아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뒤에 민영이 승아의 팔을 가볍게 건드렸다. “다음에 내려.” 민영은 그 지역이 그리스 이민자들이 정착한 동네라 지중해식 음식점이 많다고 말한 뒤 거기서 이스트강을 건너면 맨해튼이라고 짧게 덧붙였다.
민영의 집은 지하철역에서 세 블록 떨어져 있었다. 신호등을 여섯 번 건너고 모퉁이를 네 번 꺾어 도는 그리 길지 않은 동선에서도 승아는 민영을 놓칠세라 캐리어 손잡이를 붙잡고 종종걸음을 쳐야 했다. 샌들 끈 사이로 햇볕에 노출된 발등이 금세 따가워졌고 등에서는 땀이 흘러내렸다. 그 거리의 풍경에 민영의 인스타그램에 등장하는 하늘을 찌르는 빌딩숲이나 공원을 배경으로 한 브라운스톤 건물은 없었다. 좁은 길 양쪽으로 드문드문 잡화점과 식료품점과 작은 식당 들이 들어서 있었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차림새도 승아의 머릿속 뉴요커와는 거리가 멀었다.
승아는 신도시의 아파트 단지에서 성장해 푸드코트와 영화관이 갖춰진 대학교를 다니고 논현동의 고층건물에 입주한 잡지사에서 일했다. 그녀의 눈에는 이 거리의 모든 것이 낡고 칙칙하고 구닥다리이고 영세했다.
민영의 집이 있는 사층 아파트 역시 지은 지 백 년은 넘었을 만한 모습이었다. 시멘트 벽의 갈라진 틈으로 잡초가 삐져나왔으며 손바닥만한 앞마당에는 녹슨 재활용 쓰레기통 몇 개와 망가진 소파가 놓여 있었다. 민영이 숄더백에서 묵직해 보이는 열쇠꾸러미를 꺼내 그중 한 개를 현관문 구멍에 꽂으며 말했다. “사층이야. 아래층에 관리인 할머니 사니까 캐리어 소리 내지 말고 조용히 올라와.”
엘리베이터는 없었다. 더러운 카펫이 깔린 아파트의 좁고 어두운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승아는 세 번이나 계단참에 캐리어를 내려놓고 헐떡이는 숨을 진정시켜야 했다. 가까스로 꼭대기 층에 닿았을 때, 비행기에서 내리기 전 프랑스제 핸드크림을 꼼꼼히 발랐던 손은 갈퀴 모양으로 굳은 채 한동안 펴지지가 않았다.
집은 생각보다 좁았지만 밝고 깨끗했다. 들어서자마자 새로 페인트칠을 한 깔끔한 주방이 나타났고 그 너머 거실에는 이 인용 패브릭 소파와 크림색 책장이 놓여 있었다. 유리갓을 씌운 스탠드 등과 관엽식물 화분 몇 개가 아늑한 분위기를 더해주었다.
승아는 벽에 걸린 마티스 액자가 민영이 모마에서 산 프린트이고 아즈텍 조각상은 엄마와 함께 떠났던 멕시코 여행의 기념품임을 알아보았다. 출퇴근용으로 쓴다던 은색 자전거와 헬멧 역시 눈에 익은 물건이었다. 급히 청소를 마친 듯 진공청소기가 콘센트에 꽂힌 채 구석에 놓여 있었는데 그것을 빼고는 모든 것이 ‘cozy’나 ‘my place’라는 해시태그와 함께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사진 그대로였다. 민영은 아주 가끔 사진을 올렸지만 승아는 하나도 빼놓지 않고 보고 있었다.
승아의 눈길은 뒷마당을 나 있는 커다란 창을 향했다. 그곳으로 아낌없이 햇빛이 쏟아져 들어와서 거실 바닥과 벽, 책꽂이의 책등 하나하나까지 골고루 환하고 편안한 느낌을 만들어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민영이 다짜고짜 창으로 다가가 커튼을 닫아버렸으므로 그 빛은 금방 차단되었다. “저 새끼들, 또 저러네.” 민영에게서 처음 들어보는 거친 말투였다. 건너편 건물 창가에서 담배를 피우며 이쪽을 염탐하는 남자들이 있다고 말하는 민영의 이마에 세로 주름이 깊게 새겨졌다. “청소 땜에 열어놨는데, 집에 있을 땐 커튼을 꼭 닫아야 해. 특히 너 혼자 있을 때.” “총이라도 쏘는 거니?” “그건 아니지만, 재수가 없으면 별일이 다 생기는 데니까.” 승아가 던진 어설픈 농담에 민영은 뜻밖에도 진지하게 대답했다.
민영이 새로 이사갈 집에 페인트칠을 하는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린 건 한 달쯤 전이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의 임대 기간이 한 달 가까이 남았는데도 새집이 마음에 들어 이사를 앞당기게 되었다는 글과 함께였다. 룸메이트가 없어서 결정하기 쉬웠다고도 쓰여 있었다. 이 도시의 높은 월세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새집이 좋다는 뜻이기도 하고 동시에 민영이 그만큼 경제적 여유를 갖췄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 두 가지 모두 승아를 자극했다. ‘집 좋다. 당장 갈 테니 내 자리 비워놔.’ 누군가가 달아놓은 댓글 아래 민영은 ‘환영!’이라고 답을 붙였다.
팀원들의 커피를 사러 회사 앞 스타벅스에 나왔던 계약직 사원 승아는 진동 벨이 울리기를 기다리는 동안 인스타그램에 접속했다가 그 글을 보았다. 그녀는 핸드폰 액정 속의 환영이라는 단어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흔하고 일상적인 말이었지만 그때의 승아에게는 왠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승인과 호의가 담긴 유의미한 단어로 여겨졌다. 눈앞에서 문이 닫히더라도 그게 끝이 아니고 어딘가에 환영이라고 적힌 다른 문이 있다. 그것이 마치 어떤 계시처럼 느껴졌던 승아의 눈에는 그 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으로 보였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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