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기술이 우리를 구원할 것인가?
기후변화는 공학적인 문제이므로 공학적인 해결책이 있다.
― 렉스 틸러슨, 전 엑손모빌 CEO
경제성장과 생태계 붕괴의 연관성에 관한 증거가 계속 쌓이고 있음에도 성장주의는 여전히 견고하다. 성장주의에는 종교적인 지속력과 이념적 열정이 있다. 물론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다. 우리의 경제 시스템은 구조적으로 성장에 의존하고 있고, 우리 사회의 가장 강력한 집단의 이익에 복무하고 있으며, 5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지배와 이원론이라는 깊게 자리 잡은 세계관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 체계는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과학에서도 말이다.
과학과 성장주의의 충돌을 되돌아보며 찰스 다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다윈의 진화에 대한 발견은 당시의 주류 세계관에 대한 급진적인 도전이었기에 사람들이 받아들이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인간이 신의 형상으로 창조된 게 아니라 비인간 존재의 후손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패러다임의 완전한 전환이 필요했다. 지금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생태과학은 인간 경제를 생태계와 별개로 보지 않고 생태계 안에 내재한 경제로 보는 법을 배우라고 요구한다. 생태과학은 주류세계관과 자본주의 자체에 근본적 도전을 제기한다. 그러나 이 증거를 받아들여 자신의 세계관을 바꾸기보다 현 체제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은 방향을 바꿀 필요가 없으며, 세계경제를 무한히 성장시킬 수 있고,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설명하는 정교한 대안 이론을 고안해낸다.
이 내러티브는 기술이 어떤 식으로든 우리를 구하리라는 주장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어떤 이들에게 이것은 세계경제를 재생에너지와 전기차로 바꾸는 간단한 문제다. 한번 그렇게 하면, 우리가 영원히 성장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어쨌든 태양광과 풍력 발전은 점점 저렴해지고 있고, 일론 머스크는 빠른 속도로 저장 배터리를 대량생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어떤 이들에게는 대기 중에 있는 탄소를 빼내는 ‘배출 흡수 기술’negative-emissions technologies의 문제다. 또다른 이들은 거대한 지구공학적 계획이라는 희망에 기댄다. 지구공학적 기술은 태양을 차단하는 것에서부터 바다의 화학적 구성을 바꾸는 것까지 전부를 아우른다. 이러한 해결책들이 기후변화를 막는 데 성공하더라도 성장이 계속된다면 물질 사용도 계속되고 생태계 붕괴도 계속될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도 일부 사람들은 성장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효율성 향상과 재활용 기술이 성장을 ‘녹색’으로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대통령과 억만장자를 비롯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들 중 일부가 이러한 희망을 선전해왔다. 생태 위기는 경제체제에 의문을 제기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고 그들은 말한다. 이는 위안이 되는 이야기여서 나 자신도 한때 매달렸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탐색하면 할수록, 이 입장을 선택하려면 엄청난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더 분명히 알게 되었다.
우리는 기하급수적인 성장곡선을 계속해서 끌어올려 되돌릴 수 없는 생태 붕괴의 티핑 포인트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선택할 수 있으며, 그때 기술이 우리를 구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여러 요인으로 기술이 작동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곤경에 처하고 만다. 마치 당신이 바위에 부딪히기 전에 아래에 있는 누군가가 당신을 붙잡을 장치를 만들 방법을 알아내기를 희망하면서, 그들이 잘 해낼지 알지도 못한 채 절벽으로 뛰어내리는 것과 같다. 장치가 작동할 수도 있겠지만… 만약 작동하지 않는다면, 게임은 끝난다. 일단 뛰어내리면 마음을 바꿀 수 없다.
우리가 이 접근 방식을 선택하려면 증거가 확실해야 한다. 그것이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어야 한다.
파리에서의
도박
세계의 정부들이 마침내 기후변화에 대해 합의한 날 저녁, 모든 이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2015년 파리, 12월의 차가운 어둠에도 도시는 밝고 희망적으로 보였다. 에펠탑에는 ‘1.5℃’라는 반짝이는 큰 글자가 붙어 있었다. 우리의 지도자들이 수십년의 실패 끝에 드디어 기후 재앙을 피하는 데 필요한 어려운 조치를 기꺼이 취했기에 고무적인 순간이며 환영한다는 표시였다. 가슴 설렜던 그 12월의 밤 이후 몇 년 동안 우리는 어느 정도 순조롭게 나아갈 거라고 쉽게 생각했다.
파리협정의 작동 방식은 이렇다. 각 국가는 연간 배출량을 얼마나 줄일지를 담은 약속을 제출한다. 국가 결정 기여분Nationally Determined Contributions으로 알려진 감축 약속은 온난화를 1.5도로 제한하는 목표에 부합하도록 설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2020년 현재 서명국들이 제출한 감축 약속을 모두 합해보면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감축 약속들이 1.5도로 제한하는 데 근접하지 않는다. 사실 현재 감축 약속은 2도 이하를 유지하지도 못한다. 세계의 모든 나라가 자발적이고 비구속적인 감축 약속을 이행한다고 해도 2도 이하 유지를 확실히 보장할 수 없으므로 세계 배출량은 계속 증가할 것이다. 우리는 금세기가 끝나기 전 지구온난화 3.3도를 향해 돌진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파리협정이 자리를 잡더라도 우리는 재앙으로 가는 경로에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배출량을 줄이기 위한 계획을 실행하는데 어떻게 배출량이 계속 증가할 수 있을까? 왜 아무도 이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걸까?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2000년대 초, IPCC의 모델러들은 기후변화를 억제하려면 짧은 기간 안에 배출량을 엄청나게 줄여야 하므로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계경제의 성장은 에너지 수요의 증가를 의미하고 에너지 수요의 증가는 청정에너지로의 전환이라는 과업을 상당히 어렵게 만든다. 에너지 수요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한, 우리에게 남은 단기간 내에 에너지 수요 전체를 감당할 정도로 충분한 청정에너지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없다. 누구나 알 수 있듯이, 이를 실행할 유일한 방법은 산업 생산을 적극적으로 둔화시키는 것이다. 세계 에너지 사용 규모를 줄이면 재생에너지로의 빠른 전환이 더 쉬워질 것이다.
그러나 정책 입안자들은 이 결론이 순조롭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고, 국제적인 협상에서 설득이 쉽지 않을 거라고 우려했다. 경제성장과 기후행동은 상충 관계라는 생각 때문에 미국과 같은 주요 국가들은 참여시키지 못하고, 종국에 가서는 기후변화에 대한 국제적인 합의를 확보할 기회가 무산될 수도 있었다. 리스크가 너무 컸다. 각국은 또한 전세계의 빈곤 종식이라는 목표를 중심으로 모이고 있었고, 세계 지도자들은 빈곤 퇴치의 유일하게 효과적인 방법은 세계경제 성장을 늘리는 것이라고 계속해서 말해왔다. 기후 완화가 성장과 상충 관계일 수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성장은 금기와 같다. 건드리면 죽는다. 성장은 계속되어야 한다.
다행스럽게 그들은 해결책을 찾았다. 또는 그런 것처럼 보였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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