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새로운 죽음의 방식
켄은 세상을 떠날 때 가족과 친구들을 불러 모아 이별의 순간을 준비했다. 남겨질 사람들을 생각하면 애달프기도 했으나 어차피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았기에 차라리 안도감을 느끼며 죽음을 향해 나아갔다.
죽을 시간과 장소를 직접 따져보고 선택하는 것은 지금껏 미국에서 상상할 수 없던 일이다. 여전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죽음을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양로원, 병원, 영안실 등에 은폐하는 미국 문화 관점에서 죽을 날을 고르고 임종의 자리에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은 경박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의사에게 시한부 진단을 받은 환자들은 실패했거나 포기한 치료법의 기나긴 여정 끝에서 자기 나름대로 나아갈 길을 모색해야 한다. 오늘날 점점 더 많은 주에서 조력 사망을 선택할 길이 열리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제야 그 가능성을 검토하고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 책에서는 조력 사망을 선택할 수 있는 길을 가록막는 의학과 법률, 문화 그리고 감정상의 장애물은 무엇이고 켄 같은 이들이 그 길을 선택하는 이유를 무엇인지 살펴본다.
의료 조력 사망은 정신이 온전한 성인 말기 환자가 의사에게 처방받은 치사 약물을 섭취해 합법적으로 생을 마감할 경로이다. 미국에서 진행성 치매 같은 중증 인지장애 환자는 시한부 진단을 받았어도 조력 사망 방법을 이용할 수 없다. 또한 조력 사망법은 환자가 스스로 치사 약물을 섭취할 수 있어야 한다고 명시한다. 의사가 치사 약물을 투여해 환자의 생명을 끝내는 안락사는 절대 금지다.
오리건주는 1997년부터 2008년까지 10년 넘게 미국에서 유일하게 의료 조력 사망이 가능한 주였다. 이후 다른 아홉 개 주와 워싱턴 DC에서 조력 사망을 합법화했다. 2021년 7월에는 미국인 다섯 명 중 한 명이 합법적 조력 사망이 가능한 주에서 살게 되었다. 이제는 진보 성향이 아닌 주에서도 조력 사망을 논의하고 있다. 미국 전역에서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본인의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지 의견을 표명하고 싶어 한다. 2018년 갤럽 설문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열 명 중 일곱 명은 의사가 말기 환자의 죽음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국뿐 아니라 세계의 많은 국가가 그 어느 때보다 더 조력 사망을 합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빅토리아주와 서부 지역,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캐나다, 콜롬비아, 스위스는 이미 조력 사망을 합법화했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도 그 대열에 합류하기 위해 결정적 조치를 마련하고 있다. 심지어 스페인 같은 소위 가톨릭교 국가에서도 조력 사망에 대한 대중의 용인容認이 증가하는 추세다.
켄이 사망한 2018년 오리건주에서 조력 사망은 전체 사망의 0.5퍼센트에 불과했음에도 대중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캘리포니아 출신의 젊은 여성 브리트니 메이너드는 공격적 뇌종양에 걸리자 2014년 오리건주로 이주해 조력 사망을 실행했다. 메이너드의 슬픈 사연이 알려지면서 조력 사망은 전국에서 주목을 받았다. 주요 언론 매체는 조력 사망을 다룬 특집 보도를 내놓았고, 지역 신문은 하루가 멀다 하고 관련 사설을 게재했다. 조력 사망에 관한 영화와 TV 드라마도 여러 편 등장했다. 죽을 권리는 예전에도 중요했지만 오늘날에는 더욱 그렇다.
나는 이 주제의 전모를 파악하고자 5년간 미국에서 조력 사망의 최전선에 있는 사람들을 따라다니며 취재했다. 무엇보다 조력 사망 접근성이 미국인의 죽음을 어떻게 바꿔놓고 있는지 알아보려 했다. 환자는 어떤 마음으로 치사 약물을 삼킬 결심을 하는 걸까? 가족은 사랑하는 사람을 영원히 잃을 것을 알면서 어떻게 그 결심을 존중하는 걸까? 의사에게 환자를 치료하는 역할뿐 아니라 죽음을 돕는 역할까지 요구할 때 의학의 목적은 어떤 식으로 변할까? 그리고 조력 사망을 합법화한 지 20년이 넘었는데 왜 아직도 이토록 많은 장애물이 존재하는 것일까?
나는 환자와 그 가족이 임종 선택을 결정하기까지 혼란스러운 미로를 헤쳐가며 현대 의학의 약속과 이런저런 함정을 저울질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러려면 거실과 병실을 비롯해 은밀한 공간에 들어가야 했다. 나는 미국에서 가장 먼저 조력 사망을 합법화한 태평양 연안 북서부를 중심으로 전국의 법정, 공청회, 주정부 기록 보관소를 방문했다. 8개월 동안 호스피스 자원봉사자로 일하며 임종을 앞둔 환자들의 마지막 몇 주를 함께하기도 했다.
내 연구 과정은 내가 문화인류학자로서 받은 훈련과 관련이 있다. 인류학은 먼 옛날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존재하는 인간의 모든 차이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분야의 참여관찰 방법론에 따라 나는 내가 연구하는 공동체에 직접 뛰어들었고, 공식 인터뷰 이외의 자리에서도 함께 어울리며 그 구성원의 다양하고 어지러운 인생사를 포착했다. 인류학자는 연구 대상인 사람들의 삶으로 들어가 그들의 언행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경청하며 그대로 따르려고 노력한다. 또한 대다수 언론인과 달리 자신을 서사에 포함하는 일인칭 서술을 채택한다. 우리가 사건을 객관적으로 목격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항상 사건을 자신의 사회적 조건에 따라 이해하며, 때로는 우리가 관찰하는 역학관계가 우리 존재로 인해 변화하기도 한다.
내가 금세 깨달은 사실이 있다. 죽음은 다른 학문 주제와 같은 방식으로 연구할 수 없다는 점이다. 죽음과 일정 거리를 유지하거나 하루 일을 마친 뒤 죽음을 마음속 서랍에 처박아버리는 건 불가능했다. 연구는 나를 집어삼켰고 내 마음속 가장 깊은 곳을 건드렸다. 죽어가는 환자와 인터뷰하고 나서 자전거를 타고 귀가하는데 길에서 지나치는 모든 사람이 암 환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 책상은 도서관의 ‘유족을 위한 서가’와 비슷해졌고, 잠들기 직전만큼은 죽음에 관한 책을 읽지 않으려 노력해야 했다. 나 자신을 감정적으로 보호하려 애썼으나, 실수로 치사량의 바르비투르산을 삼키고 부모님에게 내가 곧 죽을 거라고 3분 안에 전해야 하는 꿈을 꾸기도 했다. 인간 사회는 생사의 경계를 지키고자 많이 노력해왔는데, 연구에 몰두하면서 그 경계가 위태로울 만큼 희미해지는 걸 느꼈다.
가장 놀라웠던 것은 조력 사망 세계가 내가 두려워한 것만큼 슬프지도 침울하지도 않다는 점이었다. 내가 참관한 죽음 중에는 어찌나 유쾌하고 즐겁고 아름다운지 그것이 죽음이라는 사실조차 잊은 사례도 있었다. 가령 켄 같은 사람들이 죽는 방식은 그들이 살아온 방식과 직결되어 있었다. 관습을 무시하고, 유머를 즐기고, 슬픔 속에서도 경쾌함을 찾아내기.
이 책은 우리 시대 문화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를 다룬다. 바로 첨단 의학 시대에 임종 과정의 존엄성과 의미를 되찾을 방법이다. 지난 50년 동안 높아져온 조력 사망 접근성은 우리가 죽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오늘날 대다수 미국인은 병원, 그것도 주로 중환자실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많은 사람이 최첨단 의료가 고통을 연장할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거나 너무 늦게 깨달아 지체된 죽음의 굴곡을 건너뛰고 있다. 외과의사 아툴 가완디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서 이렇게 썼다.
“지난 수십 년간 의학은 수 세기에 걸쳐 인간의 죽음을 둘러싸고 축적해온 경험과 전통과 언어를 폐기했고, 인류에게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새로운 난제를 제시했다.”
조력 사망은 우리가 의학의 잠재력을 이해하는 방식을 재구성한다. 생명 연장이 아니라 죽음 과정을 완화하는 방법으로 말이다. 조력 사망은 단순히 치사량의 약물을 삼키는 것이 아닌 그보다 훨씬 더 넓은 의미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죽는 방식, 미래를 상상하는 방식을 바꿔놓는다. 나아가 의료 조력 사망은 인간이 삶의 마지막을 직접 결정할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 나는 죽음의 방식을 고민하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그들의 임종을 직접 목격하면서, 자신의 죽음을 예측하고 연출하는 것이 죽어가는 사람은 물론 남겨진 사람에게도 큰 힘을 줄 수 있음을 깨달았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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