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하지 않았다
1998. 9. 1.
사무실에 안치환의 〈고백〉이라는 노래가 흐르고 있다. “누구도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하지 않았네. 나의 꿈들이 때로는 갈 길을 잃어 이 칙칙한 어둠을 헤맬 때….”
안치환의 노래를 좋아한다. 막힌 가슴이 탁 트이는 듯한 우렁찬 목소리, 주제에 대하여 정확하게 서술하는 가사, 그가 노래를 하게 된 동기…. 그래서 내 능력이 미치지 못함을 뻔히 알면서도 〈내가 만일〉을 2년째 애창곡으로 삼고 있다그 노래가 나에게 어울린다는 K 판사의 후원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1987년 그의 노래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를 어떤 이유에서건 많은 사람이 부를 때 나도 그 노래를 꽤 좋아했다. 그 무렵 안치환의 노래와 인연을 맺은 셈이다.
나는 ‘헌법의 존립을 해하거나 헌정 질서의 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헌정 질서 파괴 범죄에 대한 공소 시효’가 배제되고 있는 동안1983~1986년 대학교를 다녔다. 그때 열심히 사법 시험 공부를 하였다. 헌정 질서가 파괴되건 말건, 헌정 질서가 파괴되는 것에 저항권을 행사하건 말건.
그렇다고 20대 초반의 들끓는 피를 가지고 있던 내가 현실을 초월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학생 운동을 하던 친구가 있었고 당장 도서관 공부를 방해하는 최루탄이 있었다. 나는 판단을 유보하였다. 시험을 끝내놓고도 얼마든지 시간은 있다고.
1986년 2차 시험을 끝내고 그 무렵 유행하던 공장 체험을 해보기로 하였다. 민중의 고통을 체험하지 않은 주장이나 실천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거나, 기득권 때문에 민중의 고통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그 당시 널리 퍼져 있었으므로.
나는 내 이름으로 이력서를 쓰고최종 학력을 속였지만 그것은 무형 위조로서 형사 처벌은 되지 않고 해고 사유는 될 수 있었다. 곧 그만둘 생각이었으므로 그것조차 문제되지 않는다는 법적 판단을 거쳤음은 물론이다 1986년 8월 5일 서울 구로공단에 있던 진흥주식회사에 입사하였다.
근무 시간은 여덟 시간, 일당은 3,340원, 하루 종일 전자제품의 나사를 조였다(당시 최저 임금이 월 10만 원으로 기억되는데 그 금액을 간신히 넘는 수준이었다). 일은 힘들지 않았지만 매우 심심하였다. 하루에 1,500개 정도 나사를 조이고 잠자리에 들면 천장에 나사 구멍이 촘촘하게 뚫려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나는 9월 9일 퇴사하였고, 월급으로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셨다.
사법연수원은 참으로 신나는 곳이었다. 월급을 받는다는 게 좋았고,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한다는 게 즐거웠다. 연수원 18기는 최초로 학회를 만들어 분야별 모임을 진행했다. 나는 노동법연구회에 참여했다. 많은 학회 중에 노동법연구회가 가장 열심히 활동했던 것 같다.
연수원 자치회 주최로 사회 봉사를 했던 기억이 난다. 1년차 연수 과정이 끝나고 휴가 기간 중 무변촌이나 YMCA 같은 시민 단체에 가서 법률 상담을 맡았다. 그 상담을 끝내고 우리는 연수원 자치원 명의로 군 복무 대신에 무변촌 봉사 활동을 하는 방법을 건의했으나당시 군법무관 정원이 얼마 되지 않아 많은 연수원 수료자가 정훈, 공병 등 기타 병과에서 근무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당국으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다가 내가 정훈장교로 온갖 고생 다 하고 제대하고 나니 공익법무관 제도가 생겨 그 건의가 결과적으로 받아들여졌다. 학회 활동과 봉사 활동은 지금 연수원의 공식 과정에 편입되어 의무적인 것이 되었다고 한다. 구하라, 그러면 언젠가는 누군가는 거두리라.
정훈장교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연수원에서 귀하게 공부하던 버릇이 남아 있던 나로서는 처음에 정훈장교 생활이 못마땅했다. 한 계급밖에 안 높은 대위가 반말하는 것도 기분 나빴고, 동기생인 법무관들은 하지도 않는 위병 근무를 일주일에 한 번씩 하는 것에도 괜히 화가 났다.
1990년 3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몸이 아파 진해병원으로 후송된 일은 나를 슬프게 했다. 병원 생활 6개월 동안 “생활 영역에서 해결되지 않고 있는 문제가 병으로 표출된 것”이라는 인식을 토대로 많은 반성을 하였다칼 사이몬트 등, 《마음의 의학과 암의 심리치료》.
그 뒤 정훈장교 생활은 정말로 즐거웠다. 많은 장병들과 대화할 수 있다는 게 그렇게 고마운 일인 줄 몰랐다. 지루한 정훈 교육을 재미있게 하려고 유행하던 유머 시리즈 수집차 서울을 왔다 갔다 했던 기억이 새롭고, 법무관으로서 같은 부대에 근무했던 Y 판사의 도움도 잊을 수 없다.
남 앞에서 말도 잘 못하고 노래는 더욱 못했던 내성적인 성격이 정훈장교 생활을 하는 동안 적극적인 성격으로 개조되었다. 내가 올해 5월 2일 법원 체육대회에서 100여 사람을 앞에 두고 판사실 대표로 노래를 부를 줄 그전엔 꿈엔들 상상했으랴.
제대를 앞두고 진로를 결정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 연수원에 다닐 때까지만 하여도 변호사의 길을 가겠다며 여러 사람에게 떠들고 다녔고 뭔가 책임지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연수원 시절의 실무 수습 기간을 떠올렸다.
나는 문제 제기가 아니라 문제 해결을 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법원 실무 수습 기간 중에 본, 업무의 독립성, 절간 같이 정돈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마지막으로, 부산지방법원에 가면 향판으로 계속 그곳에 눌러앉을 수 있다는 점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길지 않은 인생에 수십 번 이사를 했던 나로서는이삿짐이라야 이불 보따리와 책이 전부였지만 이젠 대지에 정착하고 싶었다. 나는 결정했다, 부산지방법원의 판사가 되기로.
작년에 모교를 방문했다. 고등학교 3학년 후배들을 격려하는 자리에서 질문을 받았다. “판사 된 것을 후회한 적 있나요?” 그때나 지금이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판사가 된 것을 단 한 번도 후회해본 적이 없다.
경력 30년 원장님이 초임 판사를 정중하게 예우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수평적 인간관계, 개성은 존중되나 철저하게 책임지는 프로페셔널리즘, 싫은 일을 강요하지도 강요 당하지도 아니하는 분위기, 왠지 믿음이 가고 정다운 사람들….
이것들이 내 선택이 옳았음을 입증해주었고, 나아가서 다음과 같은 일화는 나를 이곳에서 영원히 떠날 수 없게 만들지도 모른다.
1996년 부산지방법원 동부지원에서 형사 단독을 마치고 1997년 9월경 부산지방법원에서 가사 단독을 맡고 있을 때였다. 50대의 웬 아저씨가 판사실로 쑥 들어와서 나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게 아닌가.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자리도 권하지 않고 이야기를 들었더니, 그의 아들이 1996년 나한테서 형사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억울함을 풀어 답례를 하고자 찾아왔다며 양주를 선물로 내놓는 게 아닌가내 자랑이 목적이 아님을 독자들은 이미 눈치챘으리라.
1998년 3월 초에는 부산구치소 기결수의 편지를 받았다. 1996년 나한테서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고, 1998년 3월 5일 출소할 예정이며, 많은 것을 반성하고 있다고, “판사님을 실망시키지 않는 삶을 살도록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겠습니다”라는 내용이었다.
내가 원했고, 내가 생각하는 바대로 결정할 수 있고, 또 내가 한 일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판사. 국민으로부터 의심 어린 눈초리와 못 미더운 시선을 받은 적도 있지만 법원만큼 자연 치유력을 갖고 있는 국가 기관도 드물다고 생각한다.
자존심이 누구보다도 강하면서, “불의가 법을 유린할 때 그건 불법이다. 불의가 법의 이름으로 행해질 때 그건 정의가 아니다”라고 선언하지 못한 과거를 스스로 반성할 줄도 아는 판사들의 법원.
안치환의 노래는 종반부로 치닫고 있다. “누구도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하지 않았네. 누구도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하지 않았네. 길은 멀은데 가야 할 길은 더 멀은데. 비틀거리는 내 모습에 비웃음 소린 날 찌르고. 어이 가나 길은 멀은데.”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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