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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하며
살아가기
‘인터스텔라’ 김지수 기자와의 대화
얼굴, 영화 음악
제가 하는 일이 인터뷰여서 하시는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선생님 제가 너무 좋아하는 얼굴을 갖고 계세요.
아유, 이제 늙어서. 시시오스트리아 황후는 40대부터 우산으로 옆을 가려 사진 안 찍히려고 했다는데, 나는 지금 60이 넘었는데…….
사진가들이 좋아할 얼굴이세요. 국적을 알 수 없는, 특히나 항상 라인을 진하게 그리시고.
사실 눈 화장을 이렇게 할 수밖에 없어요. 제가 40대 무렵부터 눈썹을 붙였는데, 눈썹 붙이는 풀이 세요. 언젠가부터 그걸 떼면 눈썹이 같이 빠지더니 내 눈썹이 안 나서, 눈 화장을 안 하면 완전히 좀비처럼 되기 때문에 안 할 수가 없어요. (웃음)
그런 아픔이 또 있군요. 그런데 그 눈매의 깊이와 서늘함이 아우라를 만들어 내는 것 같아요. 긴 생머리도.
이 머리를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요. 요즘은 머리숱도 너무 많이 빠지고.
저는 이 책의 기획 자체가 좋았어요. 박찬욱 감독, 김상욱 물리학자가 진은숙 선생님과 일으킬 화학 작용이 근사할 것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박 감독님은 참석을 못 하실 것 같아요. 며칠 전 통영국제음악제에 오셨는데 바로 또 미국으로 가신다고 하더라고요. 도저히 시간을 내실 수 없는 상황이라.
박 감독님에게 좋은 영감이 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최근에 영화 〈듄 2〉를 봤어요. 혹시 보셨어요?
아뇨. 요즘 영화 볼 시간이 없네요.
드니 빌뇌브Denis Villeneuve 감독의 〈컨택트〉나 〈듄 2〉의 음악이 너무 좋더군요. 그런 스케일에 그 정도로 현대적인 음악을 할 수 있는 일은 흔치 않을 것 같은데, 오늘 아침에 선생님 음악을 들으면서 선생님이 영화 음악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봤어요. 그럴 계획은 전혀 없으신가요?
영화 음악은 저희와는 장르가 완전히 달라요. 작곡하는 방식도 다르고요. 영화 음악은 영화 분위기에 맞게 사용되는 음악이잖아요. 잘은 모르지만 영화를 찍고 나면 짧은 시간에 그에 맞춰 곡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런 방식이 우리와는 전혀 다르죠.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 예술적인 걸 하니까.
다만 좋은 작품을 하는 감독들이 선생님의 음악을 영화에 가져다 쓴다면.
그건 반대하지 않아요. 그런데 아무도 안 그러죠. (웃음)
오늘 아침에 〈생황 협주곡〉을 듣는데 하나의 실내극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촬영을 그렇게 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연주자와 정명훈 지휘자 등을 오가면서 사운드가 서사를 구성하는 느낌이었어요.
영화 음악을 한다면 생황 연주로 하면 좋을 것 같긴 해요. 복잡할 필요 없이 단순한 걸로. 소리 자체가 아주 이국적이고 좋으니까.
그런 상상을 하면서 좀 더 정확한 표현을 찾아내고 싶은데, ‘아름답다’보다는 조금 다른 차원의 형용사가 쓰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에른스트 폰 지멘스 음악상 뒷이야기
먼저 얼마 전 받은 지멘스 음악상 이야기부터 해 보죠. 아시아인으로서는 반세기 만에 첫 수상기고, 카라얀과 번스타인도 받은 클래식계의 노벨상 같은 상이라고 하던데, 2004년 그라베마이어상도 노벨상이라고 했잖아요.
그라베마이어상은 제가 받은 후로 상금이 반으로 줄었어요. 지금은 젊은 세대도 타고 상의 위력이 그만큼 반감된 거죠. 그 상이 처음 생겼을 때는 상금이 15만 달러였는데 제가 타기 바로 전에 20만 달러로 올랐다가 타고 나서 반으로 깎였어요. 저는 항상 상 운이 너무 좋아요. (웃음) 지멘스 음악상은 아무래도 독일에서 주는 권위 있는 상이기 때문에 피드백도 좋았고, 사람들이 ‘누가 이 상을 탔구나’ 감지하는 정도가 다른 상들과는 스케일이 다르더라고요.
상복이 진짜 많으신데, 운도 능력이라고 하잖아요. 그 기운에 딱 맞는 작품을 정확하게 내놓을 때 눈에 띄는 거니까요.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때 뭘 하고 계셨어요?
베를린 집에서 곡 쓰고 있었어요. 지멘스상 수여하는 재단 책임자가 예전에 도나우에싱겐 음악제 예술 감독이었는데 한 번 만난 적이 있어요. 저는 평소에 누구와 핸드폰으로 통화하는 경우가 거의 없거든요. 아무도 내 번호를 모르고 통화를 썩 좋아하지 않는데, 뮌헨 번호로 누가 전화를 한 거예요. 누굴까 했는데, 예전 이메일 계정으로 그분이 통화를 잠깐 하자고 메일을 보냈더라고요. 나한테 뭔 볼 일이 있지 싶어 전화했더니, 전날 마지막 회의를 했는데 내가 상을 타게 됐다고 하더라고요. 사실 작년에 친구인 조지 벤자민이 수상했을 때 제가 처음으로 그 시상식에 초청받아 갔었어요.
어디서 하나요?
뮌헨에서요. 그 시상식에는 처음 가 봤는데, 친구가 상을 타고 파티도 하고 좋았어요. 그런데 끝나고 조지가 나한테 귓속말로 ‘너도 이 상을 빨리 탔으면 좋겠다’라고 해서, ‘내가 이 상을? 독일 사람들이 나한테 이걸 줄까?’ 하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어요. 만약에 타게 되더라도 80 넘고 나이 다 들어서 상 필요 없을 때쯤 주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는데, 바로 그다음 해에 받게 되어서 믿어지지 않았어요. ‘말도 안 된다, 이게 진짜냐’ 그랬죠. (웃음) 6개월 동안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서 남편과 둘만 알고 있었어요.
남편은 뭐라고 했어요?
너무 좋아하죠. 내가 돈 벌면 자기 거니까. (웃음)
상금이 많죠?
꽤 많죠. 누군가가 그 돈을 그냥 주는 거잖아요. 그 상금엔 세금도 안 매기거든요. 그러니까 완전히 순이익이에요.
얼마였죠?
25만 유로니까, 지금 환율로 3억 7천 정도예요.
진짜 거대한 상이네요.
아무한테도 얘기 안 하고 있었는데 그때 연주가 많아서 쾰른과 베를린의 페스티벌이나 음악회를 많이 다녔거든요. 그러면 사람들하고 만나 얘기를 하잖아요. 다들 ‘지멘스상은 누가 탈까?’ 그러면 시침 뚝 따고 있고, 누가 농담으로 ‘이번에는 여자가 좀 받으면 안 돼?’ 그러면서 저를 보면 ‘물론이지’ 하면서 모르는 척하고 그랬어요.
그렇게 사람들이 모르면서 점치는 걸 즐기셨네요.
그전에 받았던 상도 결과를 미리 통보받고 말하면 안 되는 기간이 길었어요. 비후리 시벨리우스상은 1년 동안 말하면 안 됐고, 레오니소닝상은 2년 전에 이미 결정됐으니까, 그렇게 함구하는 훈련을 해서 별로 힘들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왜 미리 알려주는 거예요?
시상식을 미리 준비해야 하니까요. 어떤 곡을 연주하고, 어떤 앙상블이 출연하고 누가 인사말을 할지 등을 논의해야 하니 미리 알려줘요. 그리고 수상일도, 그쪽에서 나한테 연락하기 전에 이미 내 일정을 다 알아보고 날짜를 정해 통보하더라고요.
음악가는 스케줄상 항상 미래를 살기 때문에 어쩔 수 없군요.
그런데 시상식 바로 전에 샌프라시스코에서 〈알라라프 ‘심장박동의 제의’〉 미국 초연이 있는데 연주를 세 번 해요. 거긴 참석할까 말까 고민했는데, 일정상으로는 갔다가 아주 급히 첫 연주만 보고 오면 되지만 아무래도 그 연주는 포기해야 할 것 같아요. 요즘 여행을 다니다 보면 비행 일정이 취소되거나 연기되는 경우가 많아서 너무 위험하고, 그렇게 먼 거리를 이동하기가 힘들어서 이번에는 집중해서 시상식에만 가려고 합니다.
그런 큰 상의 수상자가 되면 ‘이제 다 이루었도다’, 그런 마음일까요?
아이, 그렇지는 않죠. 상이라는 건 중요하지 않고, 작품을 쓰는 게 중요하지. 저는 상은 완전히 운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상을 하나도 못 받았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좀 힘들었겠죠. 그동안 저는 프리랜서 작곡가로 살았으니까, 지금은 상을 안 받아도 생활이 가능하지만 젊었을 때는 안 그렇잖아요. 여러 가지로 조금 힘들었겠죠. 그래서 처음에 그라베마이어상 받았을 때 진짜 큰 도움이 됐어요. 그런데 그건 세금을 내는 상이었어요. 한 곡으로 상을 받으면 세금을 내야 하거든요.
그 세금을 독일에 내나요?
네. 제가 독일에 사니까요. 그래서 상금을 한꺼번에 안 주고, 5년 동안 나눠서 매년 4만 달러씩 주더라고요.
사려 깊다. 이럴 때 진은숙 선생님도 생활인이라는 걸 느낄 수 있어요.
그렇죠. 독일 세금이 세거든요. 독일 시스템에서는 돈을 많이 저축해서 부자 되기는 불가능해요. 나라에서 다 가져가서. 그래도 누군가는 세금을 내야 하니까요. (웃음) 상금 외에도 세금은 이미 많이 내고 있어요.
독일에서 공부하신 김누리 교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독일 교육이나 시스템이 그나마 가장 좋은 대안이던데요?
글쎄요. 요즘은 독일이나 유럽 문화가 전체적으로 조금씩 붕괴되고 있다고 느껴요. 모든 것이 디지털화되면서 세상이 너무 빨리 바뀌잖아요. 그런데 유럽이라는 곳은 뿌리가 깊고 오랫동안 이어져 온 터라 빨리 적응하지 못하고 허덕허덕하면서, 뭐랄까 구멍이 생기는 거예요. 하다못해 기차 시간도 잘 안 지켜지고, 디지털화 과정에서 기능이 제대로 안 되는 곳이 많아요. 그런데 아무도 책임을 안 지는 거야. 책임지는 사람이 없으니까 물어볼 데도 없고 항의할 데도 없어요. 참, 이 나라가 옛날에 내가 처음 왔을 때 독일이 아니구나, 그런 생각을 요즘 많이 해요. 안타깝지만, 그래도 독일이 지닌 보이지 않는 저력은 상당하죠.
그렇군요. 그곳에 이방인으로 살면서 변화를 보신 분은 또 다르게 느끼시는구나. 선생님 이력을 찾아보면 항상 가족 얘기가 붙는데요. 음악평론가 진희숙의 동생이고 진중권의 누나라는.
요즘에는 신문 기사에 그런 건 안 나오던데. 그건 좀……. (웃음) 아니 왜 가족 얘기가 계속 붙을까요?
원가족이 선생님 인생에 얼마만큼 영향을 미쳤나요?
우리는 가족이라는 개념이 별로 없어요. 각자 개인주의고 서로 자주 왔다 갔다 하지도 않고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까지 재작년에 돌아가셔서 이제는 가족이라고 만나는 일도 별로 없고, 특히 저 같은 경우 가족의 중요성은 잘 모르겠어요. 물론 지금의 가족의 중요하지만, 원가족은 성인이 되면서는 별로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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