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조와 빈지노 사이
1980년, 옛날 살던 집 다락에는 아버지가 젊은 날 탐닉했던 것들이 무덤처럼 쌓여 있었다. 나는 그곳에 숨는 걸 좋아했는데, 먼지를 뒤집어쓰고 위태롭게 쌓여 있던 책 기둥 사이에 누워 어린 날의 나는 어느새 한가로운 낮잠에 빠지곤 했다. 아련하게 들리는 나를 부르는 젊은 엄마의 목소리, 막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남동생의 웅얼거림과 다락으로 오르는 계단이 무서워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던 여동생의 모습이 지금도 기억 속에서는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 글을 읽을 줄 모르던 때라 나는 아버지의 책을 찢어서 곱게 딱지를 접곤 했다. 오래된 종이 냄새 가득한 그곳에 수십 장의 엘피판도 한 켠에 자리잡고 있었다. 한 번도 그것을 들은 적은 없었다. 고장이 나서 라디오만 나오던 전축은 흑백 TV 받침대로 쓰이고 있었다. 부엌을 입식으로 만들며 없어진 다락과 함께 그것들, 아버지의 청춘도 사라졌다.
내 기억에, 노래라는 것은 아버지의 것이고, 엄마의 것이었다. 기억의 맨 처음에 동생들에게 불러주던 아버지와 엄마의 자장가, 동요가 있다. 변소가 밖에 있던 시절, 똥 누면서 아버지가 부르던 가곡을 나무로 된 변소문 앞에 삼형제는 모여 앉아 듣곤 했다. 한겨울 석유곤로에 밥을 지으며 어머니가 부르던 찬송가, 뜨끈뜨끈한 아랫목을 파고들며 잠에 빠져들었다. 석유 냄새와 밥 짓는 냄새가 향긋하게 풍겨오던 시절, 까마득한 옛날이 되었지만 지금도 눈감으면 보인다, 들린다.
1985년, 우리 삼형제는 모두 피아노를 쳤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모두 동시에 시작했기에 커서는 그 실력의 차이가 모두 달랐는데, 제일 어린 남동생은 1학년, 여동생이 3학년 때였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때까지, 동생들도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피아노를 쳤다. 그래서 그런지 이후에 모두 클래식을 주로 들었고, 그것은 하나의 습관처럼 되었다. 엄마의 꿈이었던 피아노가 들어오던 날이 생생하다. 누군가는 그 꿈을 이루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게 우리 가족은 피아노 옆에서 매일 음악회를 열었다. 아버지는 동생들을 졸라 반주하게 하고, 목청껏 가곡을 불렀다. 그 무렵, 나는 클래식을 버리고 가요를 듣기 시작했다. 내가 다니는 중학교에는 아무도 클래식이나 가곡, 찬송가를 듣는 친구들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문세를 들었고, 죽은 유재하를 만났으며 산울림, 들국화에 빠졌다. 전교조 사무실에서 배운 민중 가요를 큰 비밀을 나만 알고 있다는 듯, 자랑스럽게 부르곤 했다. 음악적 취향은 점점 넓어져서 바다를 건너 마이클 잭슨과 마돈나, 조지 마이클을 알게 됐고, 퀸의 앨범을 복사한 테이프가 보물 1호가 되었다. 푸른하늘과 하덕규, 시인과 촌장을 좋아하게 되었다.
2022년 여름,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여행을 마치고 막 도착한 직후였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망설이다가 받았더니 오랜만에 듣는 동료 작가의 반가운 목소리였다. 가요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부탁이었고 나는 흔쾌히 쓰겠다, 했다. 나름 잡다하게 장르 안 가리고 음악을 듣다보니 그중 쓸 게 없겠나 싶었다. 그즈음에는 제가 10대, 20대에 즐겨 듣던 음악을 유튜브로 다시 찾아보며 밤새 추억에 빠져 아침을 맞기도 했었으니까. 무엇보다 그렇지 않아도 1년 넘게 완전히 꽂혀 있는 앨범이 있기도 했고, 그중 한 노래의 가사 한 줄을 모티프 삼아 얼마 전에는 단편소설도 한 편 썼던 터라, 술술 글이 나올 줄 알았지만, 낭패였다. 음악은 계속 듣는데 뭔가 쓸 수가 없었다. 노래는 듣는 것인데, 들으면 그만인데 말이다. 행여 어쭙잖은 글이, 헛소리가 늘어날까 걱정이었다.
혹 내가 쓰고 싶은 노래에 대해 누군가 이미 써버렸으면 어쩌지, 조마조마하며 조심스럽게 그간 다른 작가들이 썼던 글들을 찬찬히 읽어보았다. 다른 글을 다 읽어보았더니 더 아무것도 쓸 수가 없었다. 그 핑계로 이렇게 저렇게 하루하루를 미루다가 더는 갈 곳이 없어진 후에야 한밤중 독서실을 찾았다. 책상에 정자세로 앉아 노래들을 듣기 시작했다. 음악은 정말이지 신기하게, 과거를 선명하게 해주는 약 같다. 몇몇 오래전에 들었던 음악을 찾아 듣다보니 어느새 그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그때 만나던 사람들, 추억들이 들려왔다.
1990년,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중학생 때 듣던 가요를 버리고 록에 빠졌다. 수학 과외를 음악으로 대신했다. 수백 장의 엘피판 앞에서 수학 과외 선생과 그날 들을 앨범을 고르곤 했다. 시끄러운 음악을 틀어놓고 수학 공부를 했다. 오지 오즈본과 랜디 로즈, 딥 퍼플, 롤링 스톤스, 핑크 플로이드 같은 그룹을 좋아했다. 재수하면서 서울로 가게 되었는데, 너바나의 X, 건스 앤 로지스의 광적인 팬이 되었다. 록의 시대는 정말이지 짧았다.
1994년, 대학에 가면서부터는 민중가요를 주로 들었다. 꽃다지, 천지인, 안치환, 그리고 김광석, 고백건대 20대엔 그의 노래가 주류였다. 힙합, 인디밴드, 댄스음악 등 장르도 다양해지고 들을 것도 많아졌다. 2000년대 시작과 함께 나는 등단했다. 음악을 주로 글을 쓸 때 듣게 되었는데, 과장하면 글을 쓸 때만 음악을 들었는데 새로운 관심은 힙합에 관한 것이다. DB Bass, 드렁큰타이거, 허니패밀리, 윤미래를 주로 들었다.
과거를 되짚어보다가 이런 걸 말해서 뭐, 어떡하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음악은 정말이지 개인적이어서 더 그렇고, 딱히 떠올리고 싶지 않은 무엇이 더 크기도 하고 그래서였다. 지금, 누군가 내게 어떤 가수를 제일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2014년부터 쭉 ‘에피톤 프로젝트’를 좋아한다고 답할 것이나, 이유를 물으면 입을 다물 것 같다. 좋아하지만 잘 듣지 않으니 그것은 추억과 기억의 한 자리로 남아버린 게 맞을 것이다. 대신 정말, 내가 요즘 반복해서 듣는 음악이 과거나 기억으로 남은 게 아니니 내가 가장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니던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1년 넘게 글을 쓸 때마다 반복해서 듣는 앨범은 정미조의 《바람 같은 날을 살다가》이다. 〈개여울〉 〈귀로〉 〈휘파람을 부세요〉를 불렀던 그분의 최근 새 앨범이다. 발매일이 2020년 11월이니 최근이라고 할 수는 없기도 하겠다. 하지만 가수의 관록을 생각하면 비교적 최근이 맞을 것이다. 정미조의 노래를 듣자면 슬픈 풍경을 보고 있는 느낌이 든다. 시간에 대한 관조라는 것은 그런 의미일 것이다. 오래전에 불렀던 노래도 그렇고, 2015년 복귀 후 낸 세 장의 앨범에 수록된 노래 전부가 다 그렇다. 그 말 말고는 할말이 없는데, 슬픔도 곰곰 해지면 이유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싶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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