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이 책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하여
“모든 것은 읽기에서 시작되었다”라는 문장에서 시작해볼까요.
여러분은 이 문장을 보면서 어떤 느낌이 드셨나요?
공감하는 분도 있을 테고 그건 아닌데,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 같아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거나 당연한 소리를 늘어놓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요. 냉소적인 분이라면 그건 당신 이야기고!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음, 생각해보니 느낌표는 빼는 게 좋겠네요.
물론 그건 제 이야기가 맞습니다. 그렇지만 저만의 이야기는 아니에요.
인류의 역사시대가 기록과 함께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세요. 역사는 기록이고 그것은 누적됩니다. 뉴턴의 유명한 말이 있잖아요. “내가 더 멀리 보았다면 그건 내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서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거인이라 누적된 역사의 다른 이름입니다. 여기서 거인이란 누적된 역사의 다른 이름입니다.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는 모두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서 있고, 인류 문명의 거의 대부분은 읽고 쓰는 행위에 기초하고 있는 거죠. 과학의 역사라는 것도 결국 기록을 통해 이어지니까요. 뉴턴 자신이 『프린키피아』를 쓴 것처럼요.
그렇다면 이렇게 말하는 건 어떨까요?
우리는 우리가 읽어온 것들 위에 올라서 있다고요.
사실 읽기의 역사는 역사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별자리를 읽고 구름을 읽고 바다를 읽는 선사시대의 사람들을 우리는 쉽게 상상할 수 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독서가 중 한 명일 알베르토 망구엘도 『독서의 역사』정명진 옮김, 세종, 2020에서 “읽기는 쓰기에 선행한다. 글을 쓰지 않고도 사회는 존립할 수 있다. 실제로 그런 사회가 얼마든지 있다. 그렇지만 읽지 않는 사회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고요.
오늘은 읽기의 보편 이론 같은 걸 말하는 자리는 아닙니다. 문자를 읽는 것, 특히 책을 읽는다는 것에 대해 새삼 생각해보는 자리입니다. 제가 방금 새삼이라고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책을 읽는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설령 책을 읽지는 않더라도요. 하지만 그건 결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에요. 지금 여러분이 이 책을 읽고 있는 게 전혀 당연한 일이 아닌 것처럼요.
감사합니다, 아주 잘하고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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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인류학자 가와다 준조는 『무문자 사회의 역사』엄경택 옮김, 논형, 2004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 낯익음으로 인해 종종 망각하기도 하는데, 식자literacy, 즉 문자를 읽고 쓰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결코 자연스러운 행위라 볼 수 없을 것이다. 특히 19세기까지의 세계에 있어서 문자란, 일부의 지역에서 일부의 사람들이 사용한 데 지나지 않으며, 다른 지역에서는 없어도 그다지 곤란하지 않은 도구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그것은 어느 정도 적극적인 훈련을 받지 않으면 습득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단 습득하게 되면 그 자의성을 의식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워지는데, 그러한 점에서 문자란 강렬한 문화적 존재인 것이다.
문자가 강렬한 문화적 존재라면 책도 마찬가지겠죠. 어떻게 보면 문화는 공기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는 숨을 쉬지만 공기를 의식하진 않잖아요. 몸에 이상이 생겨서 숨쉬기가 불편해지거나, 화재나 가스 유출 등으로 공기가 오염되거나, 미세먼지 앱이 검은색으로 외출을 자제하라고 경고하기 전까지는요.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입니다. 놀랄 필요는 없어요. 책을 읽지 않는다고 질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많은 출판 노동자들과 저를 비롯한 마감 노동자들의 생계가 조금 곤란해질 수는 있겠지만, 실은 이미 약간 곤란한 상황이지만…… 아니, 아니, 오해하지 마세요. 그렇다고 저와 스위밍꿀의 생계를 위해 이 책을 읽어달라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니까요. 정말로요.
그렇지만 독서율 43퍼센트라는 조사 결과는 여전히 조금 충격적입니다. 일 년에 한 권이라도 책을 읽는 성인이 채 절반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잖아요. 2013년까지 70퍼센트 대를 유지하고 있던 것이 불과 십 년만에 거의 반토막이 난 셈이에요. 종이책만 따지면 32.3퍼센트로 상황은 더욱 심각해요. 직전 조사였던 2021년에 비해서도 4.5퍼센트가 떨어졌으니 이러한 흐름을 되돌리기는 사실상 불가능해 보입니다.
이유가 뭘까요? 흔히 우리는 생각하죠. 넷플릭스 때문에, 유튜브 때문에, 틱톡 때문에, 게임 때문에, SNS 때문에, 한마디로 우리가 늘 들고 다니는 손바닥만한 값비싼 기계 하나에 온갖 종류의 오락거리들이 들어 있기 때문에. 하지만 그게 사실일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스마트폰을 통해 과거에 책을 읽으며 느꼈던 만큼―또는 그 이상의 기쁨을, 즐거움을, 재미를 느끼고 있나요?
만약 그렇다면, 책을 읽지 않는 건 너무 당연한 일입니다. 그저 과거에 책이 담당하고 있던 오락적 기능을 스마트폰이 대체한 것일 뿐이에요. 좋다 나쁘다를 따질 수는 있겠지만, 따져봤자 큰 의미가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보다는 책이 담당하고 있던 또 하나의 기능―지식의 전달이라고 할까요, 교양의 함양이라고 할까요, 뭐 이것도 이제는 구태의연한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 같지만요―을 대체할 ‘새로운 문화적 존재’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편이 더 낫겠죠. 모두를 위해서라도요. 그것도 아마 스마트폰이 되겠지만요.
그런데 기쁨의 총량이 오히려 줄었다면 어떡하지? 나아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우리의 역량이 줄었다면? 다만 우리는 과거의 사람들이 책에서 얻었던 기쁨 대신, 언제나 눈이 핑핑 돌아가는 신기술로 무장한 빅테크 기업들이 철석같이 약속하는―그러나 어디서도 찾을 수는 없는 만족을 쫓아 어떤 마비 속에서 배음으로 깔리는 불안과 불만의 리듬을 따라 엄지 손가락을 초조하게 위아래로 움직일 뿐이라면요?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 과몰입해버렸네요. 하지만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다들 아실 것 같아요. 늦은 밤, 하루의 일을 마치고 돌아와 잠깐 쉴 생각으로 스마트폰을 들었다가 피로한 눈으로 필요하지도 않고 기쁘지도 않은 것들을 몇 시간이나 보았던 경험이 있을 테니까요. 그건 개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스마트폰의 문제도 아니에요. 우리에게 스마트폰이 아닌 다른 활동을 할 수 있는 시간과 체력을 남겨주지 않는 사회가 문제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책을 읽지 않는 건 더는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회를 향해 책을 읽을 여유를 달라고 요구해야 합니다―설령 그렇게 얻은 여유로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해도요.
그리고 우리가 그런 요구를 하는 데 있어 어쩌면 책이 약간의, 실은 그보다는 좀더 큰 도움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이 책에 실린 글들을 통해 제가 여러분께 드리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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