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여든여덟이다. 이 년인지 삼 년인지, 몇 년째 그러고 있다. 나이를 알면 사람들이 불편해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이 불편하면 나도 당연히 불편하다. 한 살이라도 적은 게 좋긴 하다. 키는 작고 뼈는 튼튼하다. 그래서 아직도 잘 걷는다. 얼굴은 펑퍼짐하다. 코와 광대가 갈수록 낮아지니 어쩔 수 없다. 머리는 몇십 년 전부터 짧게 깎는다. 술은 소주 두 잔이 좋다. 뭐라고들 하지만 때론 밥보다 나았다. 틀니를 한 지는 오래되었고 기억력은 떨어져 자주 잊어먹는다. 국물이 있는 음식을 좋아한다. 한여름에도. 가족은 없다. 아, 이마에 흉터가 있다. 검버섯과 주름에 덮여 잘 보이지 않지만 자세히 보면 보인다. 평생 반외세 통일운동을 한 건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거고, 가장 힘들었던 일과 기뻤던 일도 쓰라고 했지만 나이가 드니 그게 그거 같아 구별하기가 어렵다.
내가 쓴 ‘글로 쓰는 자화상’을 받은 차장이 실망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기뻤던 일과 힘들었던 일을 다 적는다는 것이다. 나는, 자주연대가 데모나 잘하면 되지 뭔 쓸데없는 소식지를 만드냐고 불평했다. 차장은 자주연대 일이 아니고 저번에 말한 독서모임 일이라고 했다. 구청에서 지원금을 받았으니 결과물을 제출해야 한다는 거다. 차장이 손가락 한 마디를 내보이며, 조금이라고 했잖아요, 했다. 처음 듣는 소리였지만 책을 읽으면 돈을 주는 나라에 살고 있다는 건 놀랍다고 했다. 저번에도 그 말 하셨는데…… 차장이 답답하다는 듯 쳐다보다가 뒤늦게 살짝 웃었다.
2
차장과 나는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았다. 차장은 305동 나는 307동, 디귿자형 구조라 바로 뒷동이었다. 지난가을, 행사를 마치고 같은 지하철을 타고 오다 알게 된 사실이었다. 선생님이 그곳에 사실 줄 몰랐어요. 나도 하고 싶은 말을 차장이 했다. 오십 안쪽인 거 같은데, 누구든 임대아파트에 살 수도 있고 단칸방에 살 수도 있지만 의외이긴 했다.
“이 동네 참 좋아요. 강도 보이고…… 코로나 걸린 사람도 별로 없고.”
차장이 정류소 앞 도로 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조금 더 내려가면 강으로 내려가는 진입로가 나왔다.
“언제 이사 왔소?”
나는 차장의 옆모습을 보며 물었다. 누렇게 뜬 얼굴이 마스크 밖으로 조금 보였다. 나보다 키가 더 큰 것 같았다. 덩치도 있고.
“저요? 일 년 넘었어요. 동구에 살다 조건이 돼서…… 선생님은요?”
차장이 물었다. 나는 한 오 년 됐다고 했다.
담당 경찰관이 소개해준 아파트였다. 임대보증금과 관리비 낼 돈만 있으면 달세보다는 임대아파트로 옮기는 게 낫겠다는 거였다. 임대아파트는 명지, 반송, 다대포, 은곡 등 도시 곳곳에 있다고 했다. 나는 며칠 뒤 은곡으로 가겠다고 했다. 형사는 듣자마자 그곳은 시내도 멀고 산 밑이고, 강 말고는 볼 게 하나도 없다고 말렸다. 나는 조금 망설이다 나이가 들면 시내보다는 강이 좋다고 했다. 아는 사람이 그곳에 살고 있다고도 했는데 그 사람이 정일의 약혼자였던 향자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 가끔 행사를 마치고 같은 지하철을 탔다. 할 말도 없고, 왜 이렇게 일찍 집에 가냐고 물었다. 뒤풀이까지 따라가는 사무국 차장들을 많이 봤기 때문이었다. 차장은 요즘 코로나 때문에 뒤풀이도 일찍 마친다고 했다. 더 묻지도 않았는데 뭔가 부족했다고 생각했는지 말을 이었다. 집에 아들이 혼자 있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일차까지만 한다고. 아들이 몇 살인지는 말하지 않았고 나 역시 아들 외 다른 가족의 유무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대부분 떨어져 앉았으니 물을 시간도 없었다. 지하철역 출구에서 버스 정류소까지는 나란히 걸었다. 왼쪽에 있는 커다란 팽나무가 보기 좋았다. 선생님 보면 시아버지 생각이 난다고 한 것도 그 나무 옆이었다. 귀담아듣지 않았는데도 정류소로 가는 길에 있는 오래된 팽나무를 볼 때마다 차장의 그 말이 생각났다.
가끔이지만 경로석이 아닌 곳에 나란히 앉는 경우가 있었다. 주로 차장이 먼저 올라타 두 사람이 동시에 내리는 좌석을 잡거나 내가 먼저 앉았는데 몇 정거장 가다가 옆자리가 비면 차장이 옮겨오는 경우였다. 코로나가 여전해서 다른 곳은 거리두기를 하는데 지하철은 거리두기가 없었다. 그 좁은 곳에서 누군가와 나란히 앉아 가는 게 위험한 일이었지만 차도 없고 걸어 다닐 수도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날도 나란히 앉았다. 말랑말랑한 살과 따뜻함이 얇은 옷을 통해 전달되었다. 옆에 앉은 차장이 자주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뭐라고 하는데 잘 들리지 않아 머리를 좀 기울였다. 마스크를 뚫고 달큰한 땀 냄새와 향긋한 꽃 냄새가 나는 것 같아 마음이 더 다가갔다. 행사 때 찍은 사진들을 올린다고 했다. 사진이 오는지 호주머니에 든 전화기가 떨었다. 빨리 안 하면 이것도 일이거든요. 행사 마쳐도 마친 게 아니네 했더니, 힘든 일도 아니라며 웃었다. 고문님 사진도 몇 장 있는데 따로 보냈습니다, 라는 말도 들었다. 나는 고맙다고 집에 가서 보겠다고 하지만 사진을 찾아본 적은 거의 없었다. 잘 보이지도 않지만, 늙은 얼굴이 볼 때마다 낯설었다. 나라는 것 알겠는데, 달라진 세상보다 달라진 얼굴을 더 믿을 수 없었다. 그래도 밥을 사겠다고 하자 차장이 살짝 웃고는, 저의 시아버님도 빨치산이셨다고 했다. 목소리가 크지는 않았지만 귀를 기울이면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라서 좌우부터 살폈다. 아무도 듣는 사람은 없어 보였지만 말을 하기도 어려워 눈만 마주쳤다. 차장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아버님도 신불산에 계셨다고 하신 것 같은데…… 근데 그때 이야기를 별로 하고 싶어 하지 않으셔서. 너무 고생하셨나 봐요. 나는 머릿내와 샴푸 냄새를 맡으며 눈으로 알아들었다는 뜻을 전했다. 당연히 차장의 시아버지 되는 양반은 이미 세상을 떠났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전쟁 전후로 산으로 간 사람들은 수만 명이었지만 대부분 산에서 죽거나 북으로 갔다. 살아남아 체포된 사람들도 감옥에서 얻은 병으로 사망하고 지금까지 살아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나보다 나이가 어리고 감옥에서 십오 년 있었던 수양동무도 내가 출소하기 전에 죽었다.
차장은 시부의 고향이 포항이라고 했다. 나는 아가미처럼 움직이는 차장의 도톰한 콧방울을 잠시 보다가 눈을 감았다. 포항 쪽이라면…… 경북도당일 것이고 그쪽은 국군 점령지라 인민군이 퇴각할 때 같이 이동하거나 그전에 토벌대에 진압되었을 것이었다. 더욱이 나는 왜정 때부터 좌익운동을 했던 사람들과 달리 귀국 후에 단정 반대운동을 하다 산에 들어갔기 때문에 경남도당을 제외하고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차장도 시아버지에 대해서 더 아는 게 없는 듯 말이 없었다. 나는 시아버지의 이름을 물었다.
“박자 동자 배자십니다.”
차장이 고개를 들고 예의를 갖춰 대답했다. 중간에 든 ‘자’ 자 때문에 마지막은 잘 들리지도 않았지만 어쨌든 박동배였는데, 산에서 부르던 이름이라면 모를까 그 이름으로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요즘은 세상이 바뀌어서 스스로 운동권이라는 사람도 많았다. 조금 나이 든 사람들 중 빨치산에 보리쌀 두어 되 팔고 그렇게 말을 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몇 달 뒤에 점박을 만나지 않았다면 박동배가 누구인지 알 수도 없었을 것이다. 점박을 만나 박동배가 철혁이라는 사실을 들었다 해도 차장과 추어탕을 먹지 않았으면 철혁을 만나러 요양원에 가지고 않았을 것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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