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어쩌다
서울에서 살고 있는
외국인 저널리스트
나는 프리랜서 저널리스트로, 서울에서 살고 있다. 방글라데시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영국에서 자랐다. 그리고 나는 세쌍둥이 중 둘째다. 나는 동양인도 서양인도 아닌, 혼혈 외국인으로 한국에서 십 년간 살아왔다.
사실 한국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머물 줄은 몰랐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쉽게 떠날 수 없었다. 처음에는 한국에서의 모든 일들을 그저 새롭게 느꼈지만 제법 긴 세월 동안 지내다 보니, 어느덧 정겹고 익숙한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그런 일상을 떠나기란 점점 쉽지 않아 보인다. 십 년 남짓 한국에서 살면서 나에 대해, 그리고 한국 사회에 대해 많이 배우고 알게 됐다.
이 책을 시작하게 된 이유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왜 굳이 한국이라는 나라를 선택했는지 설명하는 게 우선일 듯하다.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냥 우연한 작은 사건들이 이어지고, 그런 일들이 켜켜이 쌓이다 보니 어느새 여기까지 오게 됐다.
내가 어렸을 적, 아버지는 런던 중심가에서 패션 액세서리 가게를 운영했다. 아버지는 인건비를 절약하려고 중학생밖에 안 된 나를 주말 점원으로 활용했다. 점심시간이면 어김없이 근처 카페에서 샌드위치를 사 오라고 했다. 똑같은 샌드위치가 지겨웠던 나는 근처 골목길에서 우연히 ‘코리안 벤토’당시 영국에서는 모든 도시락을 일본어 ‘벤토’라고 불렀다. 매장을 발견했고, 그렇게 아버지와 난생처음 ‘코리안 음식’을 접하게 되었다. 달콤하게 양념한 소고기와 빨갛게 절인 배추에 맛을 들인 우리는, 이제 점심 메뉴를 보다 다채로운 ‘코리안 벤토’로 바꾸었다.
언젠가부터 학교 가는 길에 놓인 공중전화 부스에 아시아 영화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처음에는 무심코 지나쳤지만 일 년 내내 같은 포스터가 붙어 있다 보니 어느 날 눈여겨보게 되었다. 그 영화는 바로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2003였고, 좀 더 나중에야 알았지만 한국 영화였다. 이런 사소한 계기로 나는 한국에 대해 호기심을 품게 되었고, 어렵지 않게 구글링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점점 한국이라는 나라에 눈을 뜨게 되었다.
첫 대학교에서의 전공은 컴퓨터 공학이었다. 그곳에 입학하자마자 우연히 외부 장학금을 받게 되었고, 갑작스레 여유 자금이 생긴 나는 한국 여행을 꿈꿨다. 전공 수업 시간에 맨 뒷자리에 앉아서 초심자를 위한 한국어 서적을 읽곤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 학기에 내 성적은 바닥을 쳤다. 난생처음 경험한 학업 실패는 큰 충격이었다. 그 결과를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었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하루빨리 이런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만을 궁리했고, 드디어 방학이 왔다.
나는 방학 동안 늘 마음속에 그리던 한국을 여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주변 친구들은 유럽 대륙이나 호주, 태국, 베트남처럼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관광지로 떠난다고 했다. 내가 한국에 간다고 하니 그들은 왜 익숙하지 않은, 그런 낯선 나라에 가느냐고 반문했다. 십오 년 전만 해도 한국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영국) 사람들은 남한과 북한이 다른 나라임을 알지 못했고, 내 어머니도 ‘가난하고 핵무기를 보유한 위험한 나라’에 가는 일을 반대했다. 심지어 런던의 한국관광공사에서 한국 관련 정보를 수소문할 때에도, 왜 굳이 한국에 가려고 하는지 궁금해했다.
이러한 회의 섞인 주변의 반응은, 오히려 나의 결심을 더욱 굳히게 했다. 세쌍둥이끼리 십삼 년간 한 학교에 함께 다니다 보니, 매 순간 다른 형제들과 비교당하는 데에 진절머리가 나 있었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자연스럽게 나만의 고유한 특성을 살리는 일에 지대한 관심을 두었다. 남들이 안 해 본 것, 남들이 모르는 것, 남들이 관심 주지 않는 것, 남들이 가 보지 못한 곳, 남들이 반대하는 것…… 이것이 곧 내가 가야 할 길이었던 셈이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이렇게 다른 쌍둥이 형제와 스스로를 구별하는 방법을 찾았던 듯하다.
마침내 2006년 봄, 나는 처음 한국으로 삼 주 동안 배낭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아버지와의 추억이 담긴 불고기를 현지에서 맛볼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했고, 그 밖에도 기상천외한 음식들이 많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서울의 고층 빌딩 숲, 용산전자상가, 속초와 설악산, 부산 바닷가, 경주, 해인사를 두루 여행하며 미리 구글링으로 예상했던 것들이 전부 ‘사실’임을 확인했다. 한국은 현대적이고 평화로운 나라며, 런던에 있는 주변 사람들의 우려가 오해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한국 배낭여행의 대부분이 색다른 경험이었지만, 그중에서도 DMZ비무장 지대는 나에게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다. 나는 유럽의 평화로운 시대와 사회 환경에서 나고 자랐다. 물론 교과서와 뉴스에서 간접적으로 전쟁을 접하곤 했지만 나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별개의 사건으로 여기며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더랬다. 그래서 DMZ처럼 두 나라 사이의 군사적 긴장 상태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기회는 여태껏 없었다. 부유하고 평화로운 한국 바로 위에는 절대 넘을 수 없는 장벽이 가로막혀 있고, 그 벽 너머로 가난하지만 핵무기를 가지고 있는 위험한 독재국가가 있다는 사실은 제법 충격이었다. 여기서 나는 미지의 또 다른 코리아를 빠른 시일 내에 방문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배낭여행을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몸을 실은 나는 내 삶을 바꿀 은인을 바로 옆자리에서 만나게 되었다. 열두 시간의 긴 여정 동안 옆자리에 앉은 여성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그녀는 나에 대해서 물었다. 나는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고 있다고 답했고, 그녀는 그 전공이 마음에 드는지 물었다. 학기를 패스하기도 어려울 만큼 낮은 점수를 받았던 나는 즉각적으로 내 전공이 싫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가 다시 물었다.
그럼, 왜 그 전공을 계속 공부하니?
나는 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는 이유를 스스로도 몰랐기 때문이다. 과거를 다시 돌아보니, 나는 중·고등학교 시절에 수학 점수가 가장 높았고 컴퓨터 공학은 졸업 후 돈을 잘 벌 수 있는 분야였기 때문에 별생각 없이 선택한 것이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 나는 대학교 전공 선택 때문에 고등학교 진로 상담 사무실에 자주 드나들었다. 내가 도대체 앞으로 뭘 해야 하는지 답을 얻고 싶었고 두 시간에 걸친 진로 테스트도 마쳤다. 나의 진로 테스트 결과는 대형 트럭 운전사였다. 좋은 고등학교에서 명문 대학을 목표로 두고 있던 나에게 대형 트럭 운전사라니……. 그 당시 철없던 나는 분명 뭔가 잘못된 결과라고 느꼈고, 막연하게 미래가 보장된 듯 보이는 컴퓨터 공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다.
그녀는 다시 물었다. 그럼, 넌 뭘 좋아해?
나는 아시아에 관심이 있고,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는 전공과 상관없는 일본어 과정을 듣기도 했는데,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답했다.
왜 네가 좋아하는 것을 전공하지 않고?
왜? 왜일까? 지금까지 살면서 단 한 번도 가져 보지 않은 질문이었고, 그럴 수 있다는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내가 살면서 만난 최고의 진로 상담사였다. 왜냐하면 그녀와의 짧은 만남 덕에 나는 내가 좋아하는 전공을 선택하게 되었고, 더 나아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쯤 어느 회사의 IT 부서에서 하루 종일 컴퓨터 모니터를 쳐다보는 일을, 단지 보수가 괜찮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버텨 내고 있었으리라.
런던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대학교에 전화를 걸어서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알렸다. 내가 전공 수업을 들으며 뒷자리에서 몰래 읽었던 『한국어 자습서』의 저자는 런던 대학교 SOAS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의 한국학과 교수였는데, 나는 이 만남을 계기로 그곳에 재진학해서 일본한국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나는 지난번 DMZ 방문 때 결심한 대로 북한을 이 주간 여행했다. 평양 공항에 도착하기 전까지 나는 마치 공포 영화를 보듯 긴장했고, 배정된 가이드를 따라다니는 내내 익숙하지 않은 선전·선동 활동에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했다. 그러는 사이 가이드와 조금 친해질 수 있었고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다 보니, 북한 사람들 역시 우리와 다를 바 없이 결혼이나 직업 같은, 엇비슷한 고민을 안고 살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2011년 영국에서 대학교를 졸업한 뒤 나는 고려대학교 한국학 석사 과정을 다니게 되었다. 석사 과정은 한국 사회에 대해 좀 더 깊이 배울 수 있는 기회였고, 여행이 아닌 일상을 통해 한국이라는 나라를 생생하게 체험하는 기간이었다. 대학원 졸업 후 나는 한 홍보 회사에 삼 년간 다녔다. 그리고 현재는 프리랜서로서 한국과 관련한 다양한 주제로 기사를 쓰고, 미디어 콘텐츠 생산에 참여하고, 홍보 의뢰를 맡는 등의 다양한 활동을 하며 지내고 있다. 이렇게 십여 년 동안의 한국 생활이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갔다.
나는 저널리스트로서 주류 외신에서 외면해 온 이슈에 대해 관심을 둔다. 외신들이 주로 주목하는 한국 관련 이슈는 K-팝, 성형 수술, 삼성, 북한 핵, 탈북자의 생존기 정도라고 요약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일상에서 보고 경험하는 한국 사회의 이슈는 이보다 더 다양하며 방대하다. 나는 특히 사회적 약자와 관련한 이슈에 관심을 갖는다. 빈곤, 성범죄, 인권, 성평등, 남녀 갈등, 차별과 같은 이슈들은 외신에서 잘 다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현실을 극복하고자 친구들과 ‘코리아 엑스포제’라는 영문 사이트를 만들고 기사와 오피니언을 게재해왔다. 그리고 기사에 미처 담지 못한 이슈들은 트위터를 통해 전달하고 있다.
이런 활동의 연장선으로 최근 《엘르 코리아》에 ‘라파엘의 한국살이’라는 제목으로 50회의 연재 기고를 마쳤다. 내가 원하는 주제와 내용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편집자의 솔깃한 제안에 따라 나는 한국에서 보고 듣고 느낀 바를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과감하게 독자들과 나누었다. 에둘러 표현하지 않고 직설적인 의견을 피력하면서 많은 공감과 지지를 받기도 했고 때로는 많은 독자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사실 그동안 한국의 주류 미디어에서 외국인들의 역할은 한국 사회를 아름답게 포장하는 것에 치우쳐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역할과는 다른 역할을 맡기로 결심했고 이를 충실히 실행에 옮겼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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