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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가
마약과 작별하는 법
파블로 에스코바르와
메데진 카르텔
한국인들에게 메데진 하면 떠오르는 인물을 물어보면 뭐라고 답할까? 아마도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Pablo Emilio Escobar Gaviria를 꼽을 것이다.
그는 1949년 안티오키아주의 동부에 있는 작은 도시 리오네그로Rionegro에서 농부인 아벨 에스코바르의 일곱 자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가난한 생활을 하다가 메데진으로 이주해 라틴아메리카 자치대학교에 입학했지만 중퇴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 후 소매치기, 담배 밀매, 가짜 복권 판매, 자동차 절도 등 사소한 범죄에 관여하다가 마리화나를 다루기 시작했고, 1970년대에 들어서는 미국에서 가장 유행하던 마약인 코카인을 취급하는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22세 때는 이미 메데진 일대를 주름잡는 마약상으로 거듭났고, 1976년에는 세계 최대의 마약 조직인 ‘메데진 카르텔’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기반으로 미국 내 마피아 및 갱단과 연합해 한때는 전 세계 코카인 시장의 약 70~80%를 주물렀고, 일주일에 수억 달러를 벌어들이며 돈다발을 묶는 고무줄을 사는 데만 매달 2500달러를 지출했다고 한다.
에스코바르는 마약 시장의 경쟁자인 조폭과 게릴라를 무자비하게 때려잡고 경찰을 뇌물로 매수하는 한편, 빈민가에서는 자선사업을 적극적으로 펼쳐나갔다. 그는 자신을 밑바닥에서 시작해 대기업을 일군 성공한 사업가로 포장했고, 급기야는 콜롬비아 양대 정당에 정치 자금을 대며 스스로 정치인이 될 결심까지 하게 된다.
콜롬비아 정부가 내전과 오일 쇼크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던 시기, 마약으로 번 돈 일부를 메데진의 사회 인프라와 복지 사업에 투자하고, 빈민층에서 직접 나누어주기도 했다. 빈민들이 사는 바리오에 학교와 병원을 건설하고 노숙자와 걸인을 위해 무료 급식소도 열었으며, 성당과 주택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심지어 축구팀까지 만들었다. 이런 노력 덕분에 자연스레 주민들의 인심을 얻게 되면서 에스코바르는 ‘빈민들의 로빈 후드’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이를 기반으로 콜롬비아 자유당에 입당하고, 1982년에는 총선에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그러나 정치인으로서 주가가 한창 올라가고 있을 즈음 법무부 장관 로드리고 라라Rodrigo Lara가 에스코바르의 범죄 행위와 경찰 매수 등 비리를 폭로하고, 나아가 마약왕이라고 비난을 가했다. 이에 에스코바르가 라라를 암살하자 마약으로 골머리를 앓던 미국과 콜롬비아 정부는 합동작전을 벌이게 된다. 그러나 에스코바르는 국회의원직에서 쫓겨나 도망자 신세가 된 뒤에도 콜롬비아군과 정치인, 경찰, 사법부, 게릴라 등을 매수하며 떵떵거렸고, 살인과 테러를 일삼으며 콜롬비아 정부의 진을 뺐다.
에스코바르는 사면을 조건으로 콜롬비아 정부의 부채를 자신이 대신 갚겠다고 선언했지만, 미국의 눈치를 보던 콜롬비아 정부는 그의 제안을 거절한다. 그 후 에스코바르는 정부와 협상 끝에 자신이 직접 지은 감옥 ‘라 카테드랄La Catedral’에 스스로 수감됐다. 특급 호텔보다 호화로운 축구장 180개 크기의 교도소에는 정원과 수영장, 당구장, 볼링장, 나이트클럽, 바bar도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교도관도 에스코바르가 직접 선발했고, 외출도 자유로웠다고 한다. 그러나 라 카테드랄에서도 마약 사업을 계속하던 에스코바르를 소환하려는 미국 정부의 압박이 심해지면서 그는 탈옥을 감행하게 된다.
수배자 신세가 된 에스코바르는 메데진 빈민들의 도움으로 도피생활을 이어갔다. 그 와중에도 자신의 가족이 독일에서 입국을 거부당한 것을 빌미로 대통령궁 근처에서 폭탄 테러를 자행했다. 이때 다친 사람들 대부분이 어린이여서 콜롬비아 국민들의 공분을 샀고, 정부도 더 참지 못하고 수사기관과 군대를 동원해 미국 마약단속국DEA과 함께 에스코바르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에스코바르는 보고타에 있던 아들과 통화하다가 위치가 발각되었고, 미국 마약단속국과 콜롬비아 특수부대가 투입되어 체포 작전에 나섰다. 1993년 12월 메데진의 중산층 바리오인 로스올리보스Los Olivos의 은신처를 수색대가 급습하며 총격전이 벌어졌고, 에스코바르는 경호원과 함께 도주 중 사살되었다.
세계 최대 마약 카르텔의 보스였던 그의 재산은 얼마나 되었을까? 경제지 《포브스》에 따르면 1980년대 후반 당시 추정 자산이 약 300억 달러36조 원로, 세계 7위의 부자에 올랐다. 요즘 가치로 환산하면 80조 원이 넘는 엄청난 액수이다.
에스코바르는 “돈 아니면 총알Plata, o plomo”이라는 전략을 구사한 인물이다. 그는 정치인, 공무원, 경찰과 판·검사에게 “내게 협조해 부자가 되거나 아니면 내게 적대하면서 죽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했다. 협조하는 인사에게는 거액의 자금을 주고 자신이 가진 군사력을 이용해 철저한 안전도 보장해줬지만, 협조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어김없이 총알 세계를 날렸다. 1989년 콜롬비아 대통령 후보였던 세사르 가비리아Cesar Gaviria를 살해하기 위해 아비앙카 항공 203편에 대한 항공기 테러를 감행해 애꿎은 승객 110여 명이 죽은 일도 있었다. 다행히 이 비행기에 타지 않은 가비리아는 나중에 28대 대통령이 되지만, 이 항공기 테러는 에스코바르에게 맞서는 자의 말로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1970년대 초부터 20여 년간 메데진 시민들은 이렇듯 죽음의 공포에 떨며 살아야 했다. 그것이 도시에 어떻게 각인되었는지, 또 시민들의 마음에 얼마나 큰 트라우마를 남겼는지도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볼 문제다.
마약 산업과 대중문화
콜롬비아에서는 멕시코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소설, 노래, 드라마와 예술작품이 마약 밀매와 관련된 이야기나 역사를 묘사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것을 ‘마약 유산’으로 간주한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콜롬비아 TV 시리즈 〈파블로 에스코바르: 악의 비호자Pablo Escobar: El Patrón del mal〉2012가 유명하고, 세계적으로는 넷플릭스가 공개한 30부작 범죄 드라마 〈나르코스Narcos〉2015~2017가 널리 알려져 있다. 두 작품은 모두 마약왕 에스코바르의 삶을 그리고 있다. 실제로 콜롬비아와 메데진의 대중문화에 에스코바르가 끼친 영향이 적지 않다.
팀 딜레이니Tim Delaney와 팀 매디건Tim Madigan이 지적했듯 대중문화는 “개인을 더 큰 사회에 연결하고 이상에 대중을 통합”함으로써 커뮤니티의 정체성 형성에 기여할 수 있다. 그러나 대중매체를 통해 전달되는 요소가 다른 요소와 경쟁하거나 충돌하기도 한다.
에스코바르와 관련된 여러 장르의 대중문화는 전 세계에 널리 알려졌지만, 콜롬비아 국민, 특히 메데진 시민들은 이에 적잖은 거부감을 드러낸다. 마약 거래에 대한 반감을 폭넓게 공유하는 메데진 시민들은 나르코narco, 마약 폭력을 대단히 심각한 문제로 인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데진에서는 일상생활에 뿌리박힌 마약 밀매와 폭력이 익숙한 것과 낯선 것을 연결하는 현대 신화의 구축에 크게 기여해왔다. 대중문화 산업에 종사하는 기업가들에게는 마약 밀매와 폭력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비정상적인 삶이 영감의 원천이 된다. 영화, 드라마, 소설 등에서 마약은 흔히 낭만적이고 매력적인 이미지로 포장되어 있기에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이 도시의 일상에는 이렇듯 국내외 사람들, 특히 관광객의 관심을 끄는 ‘기이함’이 있기에 미디어 및 관광 산업에서 이를 상품화하는 것이다.
메데진의 마약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제작하고 배포하는 기업들은 경쟁이라도 하듯 다양한 수준의 표현을 선보인다. 어두운 과거를 인정하고 마약 산업 피해자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에스코바르를 정당화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관광과 대중문화는 에스코바르와 관련된 표현과 담론을 보급하는 주요 수단이다. 이를 통해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 확산되고, 이 어두운 인물에게서 비롯된 특정 이미지들 또한 강화되고 있다.
하지만 에스코바르가 저지르거나 사주한 수많은 테러를 비롯해 그의 삶과 관련된 여러 가지 사건의 진실성에 대한 구체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앞서 언급한 1989년의 비행기 테러는 그의 가장 악명 높은 행동으로 손꼽힌다. 그 밖에 여전히 논쟁 중이거나, 도시의 전설로 콜롬비아 국민에게 각인된 역사적 사건들도 있다. 이를테면 콜롬비아의 외채를 대신 갚아주겠다고 한 에스코바르의 제안, 보고타의 대법원을 점령할 때 게릴라 그룹 M19와 맺은 관계, 또는 호화 감옥에서의 에피소드 등이다. 이것들은 텔레비전, 영화, 문학, 그리고 관광을 통해 국제사회에 널리 중계되었다. 이 사건들이 에스코바르의 아우라를 구축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며, 엘살바도르 신문 《엘 파로El Faro》가 언급했듯이 그를 “세계에서 가장 살아 있는 죽은 자 중 하나”로 만들었다.
에스코바르의 행적, 특히 메데진에서의 자선 행위를 두고 역사는 모호한 태도를 취해왔다. 에스코바르가 가난한 자들에게 금전적·물질적 지원을 해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이는 무엇보다 그의 정치적 열망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그럼에도 이런 사실은 곧잘 낭만적으로 포장되어 마약왕을 국가가 내팽개친 지역사회를 도운 현대판 로빈 후드로 탈바꿈시켰다. “파블로가 어느 지역 축구장에 조명 시설을 설치해준 것이 스포츠센터 하나를 통째로 지어준 것으로 부풀려졌다”는 소문도 전해진다. 또 엘포블라도와 같이 부유한 지역의 인프라를 에스코바르가 대부분 건설했다는 왜곡도 일어났다고 한다. 성격은 물론 행동도 이중적이었던 에스코바르를 훌륭한 기업가이자 리더라고 평가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에스코바르의 자수성가는 기업가 정신을 중시하는 메데진에서 어느 정도 자연스러워 보이는 측면도 존재한다. 섬유업이 번성한 메데진에서 제약산업이 출현하기 전에 코카인 사업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둔 에스코바르를 두고 기업가 정신을 가진 인물이라는 평판이 있었고, 일부 메데진 시민은 그를 “예리한 사업가이자 실용적인 기술관료”라고 치켜세웠다. 모두가 그를 필요에 따라 열심히 일하는 사람, 투사, 물질적 성공에 큰 애착을 보이는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합법적이건 불법적이건 수단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겠다는 생각을 에스코바르가 가졌던 것은 분명하다.
1980년대에는 메데진에서 ‘마약 밀매narco-trafficking’가 나쁜짓으로 간주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마약 밀매업자를 영리한 사업가로 여겼다. 어떻게든 돈을 빨리 벌자는 문화가 사회 전체에 만연해 있었고, 그 방법이 선한지 악한지는 묻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 또한 자신들의 역사라는 사실을 메데진 시민들도 부인하지는 않는다.
에스코바르는 가톨릭교회의 재정에 크게 기여한, 사랑스러운 가족이자 독실한 종교인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불확실한 내러티브가 논란이 되는 역사적 사실의 전파에 기여하거나, 에스코바르의 특정 이미지를 뒷받침하기도 한다. 에스코바를를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상품으로 포장하다 보니 그에게 기업가적 면모나 가족적·종교적 이미지를 덧붙이게 되고, 그중 어떤 것은 메데진의 집단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 가치로 간주된다고 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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