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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에서 오는 경외감
이야기는 인간의 문화에서 영원히 빠질 수 없는 부분입니다. 과학에서도 예외가 아니죠. 이야기가 없다면 우리의 삶은 아주 공허해질 겁니다. 하지만 이제 현대 과학은 수많은 고대신화와 미신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했습니다. 세상을 이해하는 접근 방식에 딸려 있는 미신을 우리가 어떻게 타파해왔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를 창조신화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역사의 여명기부터 인류는 수메르의 하늘신 아누를 비롯해, 혼돈에서 창조되었다는 그리스 대지의 여신 가이아, 아브라함 종교아브라함을 시조로 삼는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등을 일컫습니다.의 창세기신화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와 세상을 창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신들을 발명했습니다. 이 중 아브라함 종교의 창조신화는 전 세계 여러 문화에서 지금도 문자 그대로 ‘진리’로 받아들여지고 있죠. 과학 비전공자의 입장에서는,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는 이야기로서 현대 우주론이 종교적 신화보다 딱히 나을 것이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현대 이론물리학의 추상적인 주장들을 듣다 보면 이런 지적이 일리 있다는 생각이 들 법도 하죠. 하지만 현대 과학은 이야기나 설명을 어떤 문제 제기 없이 맹목적인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이성적 분석과 세심한 관찰로 검증하고 과학적 증거를 구축하면서 힘들게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주에 대해 꽤 많이 알고 있고, 현재 남은 미스터리들도 초자연적인 힘을 빌려서 설명할 필요가 없노라고 상당한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미스터리들은 우리가 미처 이해하지 못한 현상일 뿐이라고 말이죠. 바라건대 이런 현상들도 언젠가는 이성과 합리적 탐구, 물리학을 통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부의 주장과 달리 과학적 방법론scientific method은 그저 세상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방법에 불과한 게 아닙니다. 한낱 문화적 이데올로기나 신념체계도 아니고요. 과학적 방법론은 시행착오, 실험과 관찰, 틀렸거나 불완전한 것으로 밝혀진 개념을 더 나은 개념으로 대체할 준비가 된 마음으로, 자연의 패턴과 그 패턴을 기술하는 아름다운 수학 방정식 등을 이용해 자연에 대해 알아가는 방식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연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세상의 참모습인 ‘진리’에 한 걸음씩 다가서게 됩니다.
과학자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당연히 꿈과 편견이 있습니다. 그래서 관점이 전적으로 객관적이지만은 않죠. 한 무리의 과학자가 ‘과학적 합의’라 부르는 것이 다른 과학자들 눈에는 ‘독단적 주장’으로 비칠 수 있습니다. 한 세대에서 기정 사실로 여겼던 것이 그다음 세대에서는 순진한 생각에서 비롯된 오해로 밝혀질 수도 있죠. 종교, 정치,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과학에서도 항상 논란이 들끓어왔습니다. 이런 과학적 이슈가 미해결 상태인 동안, 적어도 합리적 의심이 가능한 상황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양쪽 진영의 입장이 깨기 힘든 이데올로기로 고착되곤 합니다. 양쪽 관점에 복잡하고 미묘한 차이가 있어서, 각 지지자들도 다른 종류의 이데올로기 논쟁을 벌이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귀를 닫고 요지부동일 때가 많죠. 종교, 정치, 문화, 인종, 성별에 대한 사회적 태도에서 보듯 새로운 세대가 등장해서야 비로소 과거의 족쇄에서 벗어나 논의를 전진시키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과학에는 다른 분야와 다른 중요한 차이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널리 뿌리내리고 있던 과학적 관점이나 오래된 이론이 단 한 번의 세심한 관찰이나 실험 결과만으로도 쓸모없는 퇴물이 되어 새로운 세계관에 자리를 내줄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현상에 대한 이론과 설명 중 오랜 시간 검증에서 살아남은 것들을 가장 신뢰합니다.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고, 우주는 정지해 있는 것이 아니라 팽창하고 있으며, 진공 속에서 빛의 속도는 관찰자가 어떤 속도로 움직이며 측정하든 상관없이 일정하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가장 확신할 수 있는 이론들입니다. 세상에 대한 관점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을 중요한 과학적 발견이 새로 나왔다고 해서, 모든 과학자가 즉각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그 당사자들의 문제일 뿐입니다. 과학의 진보는 멈출 수 없으며, 진보는 항상 좋은 것입니다. 무지보다는 지식과 계몽이 언제나 나은 법입니다. 우리는 무지의 상태에서 출발하지만 모르는 것을 기어코 알아내려 합니다. 그 과정에서 논란이 생기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가 밝혀낸 것을 무시할 수는 없죠. 세상의 실체에 대한 과학적 이해라는 문제에서 ‘모르는 게 약’이라는 주장은 쓰레기에 불과합니다. 더글라스 애덤스Douglas Adams, 소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The Hitchhiker's Guide to the Galaxy』의 저자입니다.가 이렇게 말한 적 있죠. “언제라도 무지에서 오는 경외감보다는 이해에서 오는 경외감을 택하겠다.”
우리가 모르는 것
사실 우리가 아직 모르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아직도 계속 밝혀지는 중입니다. 이해를 넓혀감에 따라 우리의 무지에 대한 이해도 넓어지는 셈이죠.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어찌 보면 이는 현재 물리학이 처한 상황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지금 역사적 순간에 놓여 있습니다. 많은 물리학자가 물리학의 위기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 물리학 내부에서 무언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다고 여깁니다. 무언가 곧 일이 터질 것 같습니다. 몇십 년 전만 해도 모퉁이만 돌면 ‘모든 것의 이론theory of everything’과 마주칠 듯한 분위기 속에서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 같은 저명한 물리학자들이 이런 질문을 던졌죠. “이론 물리학의 종착역이 가까워졌는가?Is the end in sight for theoretical physics?” 이제 물리학에는 꼼꼼히 마무리하는 일만 남았다고들 했습니다. 하지만 틀렸죠.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닙니다. 19세기 말에도 물리학자들은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지만 뒤이어서 전자, 방사능, X선 등 당시에 알려진 물리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발견이 봇물 터지듯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런 발견이 현대 물리학의 탄생을 이끌었습니다. 오늘날의 물리학자 중에는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의 탄생을 목격했던 한 세기 전의 격변기만큼이나 거대한 물리학 혁명이 다시 눈앞에 다가왔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습니다. X선이나 방사능처럼 새로운 근본적 현상을 발견하게 되리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현재의 교착 상태를 해결해줄 또 한 명의 아인슈타인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의미죠.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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