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
촛불혁명과 개벽세상의 주인노릇을 위해
촛불혁명이 시작된 후로 ‘주인노릇’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2016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물게 많은 시민들이 자발적·평화적인 시위를 끈질기게 벌이며 스스로 나라의 주인이자 자기 삶의 주인임을 과시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라는 원칙은 제헌헌법에서, 아니 1919년의 상해임시정부 헌장에서 이미 선포한 바 있다. 군주의 신민臣民에서 주권자 국민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직접민주주의가 아닌 대의정치가 어떤 식으로든 불가피한 근대국가에서 주권행사는 선거철의 유권자 노릇에 국한되기 일쑤였는데, 촛불대항쟁은 그런 반쪽짜리 주인행세는 안 되며 아예 신민의 수준으로 되돌아가려는 나라는 더욱이나 안 된다고 분명히 못박았다. 따라서 ‘촛불’이 대통령 탄핵과 정권교체로 끝난 일회성 항쟁이 아니고 세상과 나라를 크게 바꾸는 촛불혁명이 되려면 시민들이 어떻게 주인노릇을 하느냐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것이다.
문제는 촛불대항쟁으로 시민들이 새로운 차원의 주인의식을 갖게 되었더라도 일단 선거가 끝나고 새로운 집권자들이 들어서면 명목상 머슴집단인 후자는 막강한 권한과 조직을 갖는 데 비해 주인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권한을 나눠 갖고 있기 때문에 머슴들을 뜻대로 부리기가 힘들어진다는 점이다. 어떻게 주인노릇을 제대로 하는 주인이 될지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촛불대항쟁, 촛불혁명, 촛불정부
구체적인 답을 찾기 전에 ‘촛불’이 과거지사가 아니라 진행 중인 ‘혁명’일 가능성에 대한 고민 없이는 기본적인 사실마저 오인할 수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처음부터 혁명이라고 규정해놓고 출발하자는 게 아니다. 대항쟁은 2016~17년으로 한정된 사건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기억할지, 이후의 진전에 혁명의 면모가 있다면 어떤 것인지를 줄곧 성찰하면서 살아가자는 말이다. 불교적 표현으로 촛불혁명을 ‘화두’로 붙들고 살자는 것인데 그럼으로써만 시국을 올바로 진단하고 적절히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정부가 ‘촛불정부’를 자임하는 데는 스스로 촛불 덕에 집권했다는 엄연한 사실에 더해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라는 시민들의 요구를 실현하겠다는 다짐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그러한 다짐이 흐려지고 ― 집권세력 중 대다수는 처음부터 진정어린 다짐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 요즘은 촛불정부라는 호칭 자체가 가당치 않다는 평가조차 많아진 형국이다.
문재인정부의 탄생이 촛불에 힘입었음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다. 그러나 대항쟁이 아니었으면 이른바 3기 민주정부의 성립이 거의 불가능했으리라는 점을 얼마나 실감들 하는지는 의문이다. 물론 국민이 박근혜정권을 끝까지 참아줬으리라는 가정은 우리 국민을 과소평가하는 일일뿐더러 역사적 사실에 반하는영어로 counter-factual이라고 하는 가설이므로 일종의 사고실험 이상이 되기 어렵다. 그래도 점점 많은 사람들이 촛불이라는 화두를 내려버리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유용한 사고실험이며 2016년 당시의 상황을 되새겨보는 방편이기도 하다.
이명박·박근혜정부의 공통된 정치기획은 87년체제가 열어놓은 정권교체의 기회를 원천적으로 봉쇄하여 한국정치를 1987년 이전으로 되돌리려는 ‘점진 쿠데타’ 내지 ‘신종 쿠데타’였다. 이명박의 사익편취나 박근혜의 국정농단은 그들 체질의 자연스러운 표출이긴 했지만 점진 쿠데타 프로젝트를 위해서는 교란요인이 되는 면이 컸다. 어쨌든 그 기획이 촛불시민의 대대적인 봉기 없이 2017년 12월의 대선 때까지 진행되었더라면 민주당 후보가 누구든 간에 정권을 탈환할 확률은 극히 낮지 않았을까. 2012년에도 극도로 편향된 언론상황에 더해 국정원, 기무사 등이 동원된 조직적인 선거부정이 저질러졌음이 훗날 밝혀졌지만, 2017년 12월까지의 시간이 주어졌다면 훨씬 대대적이고 치밀한 공작이 수행되었으리라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현실에서는 촛불항쟁으로 저들의 시간표가 완전히 어그러졌다. 하지만 민주당정부 역시 ‘얼떨결’에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대항쟁은 어떤 의미로 문재인정부 성립의 필요조건을 넘어 거의 충분조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민중혁명의 과정에서 시행되는 선거는 위험한 국면일 수 있는데 2017년 대선의 선거과정 역시 여러모로 촛불정신을 후퇴시키는 양상을 보였다. 그럼에도 1968년 6월 프랑스 총선에서와 같은 역전을 허용하지 않은 것은 승리한 후보나 정당의 역량보다 촛불시민의 위력에 주로 힘입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준비가 부족하기로는 시민사회도 마찬가지였다. 대항쟁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특별한 조직이나 지휘체계없이 자발적 행동과 수평적 연결만으로 거대한 변화를 이끌어낸 점을 자랑하는 것은 백번 타당하다. 하지만 수평주의에 항상 따르는 위험은, 성공 후에 그 열매를 가로채기 당할 가능성이다. 4·19혁명도 그랬다. 흔히 4·19로 성립한 민주당정권이 5·16쿠데타로 무너진 사실만을 언급하지만, 민주당의 집권 자체가 일종의 가로채기였고 신·구파 모두 일찌감치 4·19의 정신에서 멀어졌던 정권이 군부의 무력에 다시 가로채기를 당한 것이었다. 4·19가 학생조직 외에는 조직이랄 게 없는 민중봉기였기에 보수야당과 군부에 의한 연속 가로채기를 막지 못한 것이다. 촛불대항쟁의 수평주의도 똑같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러나 촛불의 위력이 워낙 대단했기에 촛불혁명을 완수하겠다는 충정을 가진 후보가 선거에서 당선되었고 이후 대통령 본인의 능력과 준비 부족 등 온갖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전히 촛불혁명을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존속되고 있는 것이다.
문정부를 평가할 때 잊지 말아야 할 또 한 가지는, 그 실적이 아무리 기대에 못 미쳤다 해도 촛불이 낳은 정부가 아니고서는 설혹 문재인보다 훨씬 역량이 뛰어난 인물이 나섰더라도 도저히 못 했을 일들을 해냈다는 사실이다. 이명박·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과 삼성 총수의 구속, 70여년 만에 처음 성취된 검찰의 기소독점권 폐지, 여순항쟁 관련 특별법 제정을 비롯한 각종 피맺힌 역사에 대한 신원伸冤작업의 진행 같은 일들을 촛불 없이 ‘정상적’으로 집권한 중도보수정당 대통령 누가 해냈을 것인가. 마찬가지로 2018년의 획기적인 남북관계 진전을 촛불혁명이 아니고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준비와 개인기를 갖춘 인물이라 해도 과연 이뤄낼 수 있었을 것인가. 이런 것들을 두고 ‘누가 해도 그 정도는 했을 것’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정부비판에만 열을 올리는 태도는 현실에 대한 극도의 무감각을 말해줄 뿐이다.
사실은 이 정부에 대한 정당한 분노의 표출이나 심지어 제1야당 등 기득권세력의 결사저항 역시 본질적으로 촛불의 ‘자장磁場’ 안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분노한 목소리들에 귀를 막자거나 비판을 자제하라는 말이 아니다. 비판하고 질타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촛불혁명의 주인노릇의 일환으로 하자는 것이다. 주인은 평론가가 아니다. 물론 주인 노릇을 제대로 하자면 세상과 노복들에 대한 비평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지만, 본질상 일을 되게 만드는 것이 주인의 몫이다. 그래서 옛말에도 주인은 종의 종노릇을 해야 된다고 했고, 불가佛家에서는 수처작주隨處作主라 하여 언제 어디서나 자기가 처한 위치에서 주인노릇 할 것을 다짐하기도 한다. 민주사회의 주인이 정부가 아니고 시민이며 촛불혁명의 시대에는 더욱이나 그래야 한다면, 못난 일꾼을 욕하더라도 잘 부리기를 고민하는 자세로 욕할 일이요 여차하면 궂은일을 몸소 해낼 각오도 필요하다. 머슴은 일을 못했을 때 벌을 받거나 정 감당이 안 되면 도망가도 그만이지만 주인은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1기 촛불정부 기간에 달라진 세상
현 정부의 잘잘못 문제를 떠나 세상은 1기 촛불정부 4년여 동안에 엄청나게 달라졌다. 그런데 이 나라가 온통 망가지고 ‘빨갱이’ 세상이 되었다는 수구세력의 공격과는 대조적으로, 진보적이라는 인사들 사이에는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다’는 개탄이 자주 들린다. 자신이 특별히 주창하고 소망하던 분야에서 이뤄진 게 없다는 뜻이겠지만 이 또한 온전한 주인노릇은 아니다. 선거철에 각자의 판단과 이해관계에 따라 투표하고 나머지 기간은 평론에 열중하는 촛불 이전의 낡은 행태인 것이다. 어쩌면 촛불 이전부터 가장 진보적인 입장을 취했고 지금도 그렇다는 은근한 자기과시일지 모르겠는데, 이런 이들은 주권시민보다는 ‘주권을 가진 소비자’, 심한 경우에는 일종의 ‘진상고객’일 수도 있다.
기후위기의 심화라든가 미·중 대결 같은 것은 정부의 잘잘못 차원에서만 따질 수 없는 전지구적 생태계 또는 지정학적 차원의 문제이다. 또,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4차 산업혁명이라 일컬어지는 현대사회의 급속한 변화 역시 일국 차원에 국한할 수 없는 문제다. 그러나 결국 이들 현실에 대한 대응의 성패는 촛불시민의 주인노릇에 크게 좌우되게 마련이다.
(중략)
개벽을 말하는 이유
이 싸움에서 ‘2기 촛불정부’와 민주당의 정권 재창출을 동일시하는 것은 정확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물론 현실적으로 민주당정권이 아닌 2기 촛불정부를 상정하기는 힘들다. 또, 민주당의 경선과정에서 대선후보들이 ‘4기 민주정권’을 외쳐대는 것은 불가피했고 후보로 확정된 이재명 지사의 수락연설에서도 그 표현이 사용된 것을 탓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4기 민주당정권을 곧 4기 민주정권이라 부르는 것은 부정확할 뿐 아니라 일종의 오만일 수 있으며 촛불혁명에 대한 인식을 흐려놓을 위험이 있다.
(중략)
그런데 촛불정부 논의에 굳이 ‘개벽’을 끌어들이는 이유가 무엇인가?
첫째 촛불혁명의 위력이 갑자기 생긴 것인 아니라 이 땅에 깊은 뿌리를 지녔다는 자긍심과 자신감을 갖기 위해서다. 촛불대항쟁 이전에 2002년, 2004년, 2008년 등의 예행연습이 있었음은 물론 4·19, 5·18, 6월항쟁 등의 오랜 민중운동이 전개되었음은 알려진 사실이다. 더하여 6·25의 폐허에서 나라 경제를 다시 일으킨 국민적 노력, 4·19의 평화통일운동을 끈질기게 이어받아 드디어 6·15시대를 연 민족의 저력도 생략할 수 없다. 더 긴 시간대에서는 3·1운동이 ‘백년의 변혁’에 시동을 걸었고, 더욱 길게 보면 1860년대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의 동학에서 비롯된 한반도 후천개벽운동의 물줄기가 3·1까지 그리고 이후로도 이어진 것이었다.
둘째로, 수운이 ‘다시개벽’을 제창한 배경에 이미 장기간 누적된 병폐가 있었음을 상기하면서 촛불혁명의 과정에서도 섣부른 낙관과 절망을 모두 경계하자는 뜻이다. 조선왕조에 의한 임진·병자 두 난리의 대응과 뒷수습이 지혜롭지도 정의롭지도 못했던데다 정조正祖의 마지막 개혁 시도마저 그의 급서로 좌절되었다.그가 더 오래 살았더라도 개혁이 성공했을지는 장담 못하지만. 그사이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을 비롯한 우국적 유학자들의 모색도 적폐세상을 바꾸지 못한 상황에서, 개혁이 아닌 개벽을 향한 사상적·실천적 돌파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에 부응해 벌어진 대규모 민중투쟁이 1894년의 동학농민전쟁이었고 그 패배로 1910년의 국권상실, 35년에 걸친 이민족지배, 일제패망과 동시적으로 이루어진 국토 분할과 뒤이은 6·25전쟁, 1953년의 정전협정 이래 성립한 분단체제와 남북 기득권세력의 적대적 공존 등의 괴로운 역사가 지속되었다. 촛불혁명이 청산해야 할 적폐가 얼마나 뿌리깊고 완강한 현실인지를 뼈저리게 인식하며 싸움에 임할 필요가 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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