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에 대하여 1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독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며, 왜 책을 읽는지조차 정확히 모른다. 어떤 이들은 독서를 ‘교양을 쌓기 위해 힘들지만 부득불 걸어야 할 길’로 생각하며 잡다한 독서를 통해 상당한 ‘교양을 쌓는다.’ 또 누구는 독서란 그저 시간을 죽이기 위한 가벼운 소일거리라고 여겨 무슨 책을 읽든지 간에 지루하지만 않으면 어차피 다 똑같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뮐러라는 사람은 교양을 갖추려고 괴테의 《에그몬트》도 읽고 바이로이트 백작부인의 회고록 류의 책도 읽는다. 이렇듯 자신의 부족한 부분에 대해 초조해하며 책을 읽는다는 사실 자체가 교양이라는 것을 외부로부터 끌어들여와야 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즉, 교양을 노력을 기울여 습득해야 할 어떤 것으로 본다는 얘기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책을 읽는다 한들, 그렇게 얻은 교양은 생명력이 없고 아무 결실도 맺지 못할 공산이 크다.
한편 마이어 씨는 ‘재미로’, 말하자면 무료해서 책을 본다. 생계는 보장돼있고 시간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넘친다. 그러니 그가 긴긴 하루를 잘 때울 수 있도록 작가들이 도와줘야 한다. 그는 질 좋은 시가를 피우듯 발자크Jean Louis Guez de Balzac를 읽고, 신문을 보듯 레나우Nikolaus Lenau를 읽는다.
자, 그런데 이 뮐러 씨나 마이어 씨, 혹은 그들의 아내나 아들딸들이 다른 일들도 그처럼 주체성 없이 주먹구구로 하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채권 한 장을 사고파는 데도 조목조목 이유를 따지고, 저녁에 과식은 해롭다고 철저히 삼가며, 육체노동이라면 생계나 건강유지에 필요한 딱 그만큼만 한다. 개중에는 운동을 하면서 여가시간을 즐겁게 보내고 젊음과 건강을 지키는 일거양득의 묘미를 터득한 사람도 있다.
이런 뮐러 씨라면 운동을 하거나 노를 저을 때처럼 책도 그렇게 읽어야 하지 않겠는가? 사업에 바치는 시간과 마찬가지로 독서에 들이는 시간에 대해서도 모종의 이득을 기대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또한 자신의 경험과 인식을 조금이라도 더 확장시키지 못하고, 한 치라도 더 건강하게 하루라도 더 젊어지게 만들어주지 못하는 책이라면 감명을 받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교양에 그렇게 힘쓰느니 차라리 그 노력을 바쳐 교수자리를 얻는 게 낫고, 현실에서 불한당들과 사귀는 걸 부끄럽게 여기듯이 소설 속에서 강도나 건달들과 어울리는 것 또한 창피하게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독자들은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질 않는다. 활자화된 세계라면 좋고 나쁨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고상한 것으로 여기거나 아니면 어차피 뜬구름 잡는 사람들이 지어낸 비현실적인 세계이니 그저 한두 시간 재미있게 때울 심심풀이일 뿐이라며 내심 경멸하거나, 둘 중 하나다.
문학을 이처럼 과대 혹은 과소평가하고 있음에도, 뮐러 씨나 마이어 씨 할 것 없이 다들 너무 많이 읽는다. 전혀 감동이 없으면서도 다른 일에 비해 시간과 노력을 지나치게 바친다. 어쨌든 책 속에는 분명 가치 있는 뭔가가 감춰져있다고 어렴풋이나마 느끼고 있다는 얘기다. 다만 책에 대해서만큼은 유독 뚜렷한 자기주장이 없어 수동적이고 어영부영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수업을 그런 식으로 하면 금방 망할 텐데 말이다.
시간 때우기나 기분전환을 원하는 독자건 교양을 중시하는 독자건 간에 책에는 활력과 정신적 고양을 주는 뭔가 숨겨진 힘이 있다고 짐작은 하되, 그게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거나 평가할 줄은 모르는 것이다. 이는 마치 어떤 환자가 약국에는 좋은 약이 많다면서 칸칸마다 뒤져 온갖 약들을 돌아가며 다 먹어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그러다 보면 요행히 자기한테 딱 맞는 약이 걸려, 약물중독이나 남용에 이르는 대신 활력과 원기를 얻을 때가 있는 것처럼 서점이나 도서관에서도 간혹 그러는 것이다.
사람들이 책을 많이 읽는다는 것은 우리 같은 작가들에게 반가운 일이지, 불평하는 것은 오히려 어리석은 태도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길게 보면 어떤 직업이든 온통 오해받고 오용되는 게 달가울 리 없듯이, 인세 수입이 대폭 줄어들지언정 심드렁한 독자 수천보다는 단 열 명이라도 제대로 알아주는 독자들이 더 고맙고 기쁘다.
바로 그런 이유로 감히 주장한다. 남독濫讀은 결코 문학에 영예가 아닌 부당한 대접이라고 말이다. 책이란 무책임한 인간을 더 무책임하게 만들려고 있는 것이 아니며, 삶에 무능한 사람에게 대리만족으로서의 허위의 삶을 헐값에 제공해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와 정반대로 책은 오직 삶으로 이끌어주고 삶에 이바지하고 소용이 될 때에만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독자들에게 불꽃 같은 에너지와 젊음을 맛보게 해주지 못하고 신선한 활력의 입김을 불어넣어 주지 못한다면, 독서에 바친 시간은 전부 허탕이다.
피상적으로 봐도 독서는 정신집중을 요하는 일인데, 자신을 ‘풀어넣으려고’ 책을 읽는다는 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다. 정서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라면 정신을 분산시킬 게 아니라 오히려 집중해야 한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건,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건 간에 온 힘을 기울여야 마땅하다. 하물며 독서는 전부 그러하니, 제대로 된 책이라면 언제나 복잡다단한 현상들의 단순화, 응축과 함축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짧은 시 한 편에도 인간의 감정이 단순화되고 집약된 형태로 담겨있다. 주의를 집중해 이 감정들에 적극적으로 몸을 맡기고 함께 겪고자 하는 뜻이 없다면, 불량독자인 것이다. 불량독자들이 시나 소설에 끼치는 부당함은 여기서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잘못된 독서는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부당하다. 무가치한 일로 시간을 허비하고, 자신에게 하등 중요하지도 않고 그러니 금방 잊어버릴 게 뻔한 일에 시력과 정신력을 소모하며, 일절 도움도 안 되고 소화해내지도 못할 온갖 글들로 뇌를 혹사하는 짓 아닌가?
이런 잘못된 독서가 다 신문 탓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천만의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신문이나 다른 온갖 잡다한 글을 매일 읽더라도 온전히 집중된 상태로 즐겁게 독서할 수 있다. 어쩌면 새로운 정보들을 선택하고 신속하게 조합해내는 건전하고 중요한 훈련으로 삼을 수도 있다. 반면에 괴테의 《친화력》이라 할지라도교양 때문이건, 심심풀이로 읽는 사람이건 그야말로 완전 맹탕으로 읽을 수가 있다.
인생은 짧고, 저세상에 갔을 때 책을 몇 권이나 읽고 왔느냐고 묻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니 무가치한 독서로 시간을 허비한다면 미련하고 안타까운 일 아니겠는가?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책의 수준이 아니라 독서의 질이다. 삶의 한 걸음 한 호흡마다 그러하듯, 우리는 독서에서 무언가 기대하는 바가 있어야 마땅하다. 그리고 더 풍성한 힘을 얻고자 온 힘을 기울이고 의식적으로 자신을 재발견하기 위해 스스로를 버리고 몰두할 줄 알아야 한다. 한 권 한 권 책을 읽어나가면서 기쁨이나 위로 혹은 마음의 평안이나 힘을 얻지 못한다면, 문학사를 줄줄 꿰고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인가? 아무 생각 없이 산만한 정신으로 책을 읽는 건 눈을 감은 채 아름다운 풍경 속을 거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또한 우리는 자신과 자신의 일상을 잊고자 책을 읽어서도 안 된다. 이와는 반대로 더 의식적으로, 더 성숙하게 우리의 삶을 단단히 부여잡기 위해 책을 읽어야 한다. 우리가 책으로 향할 때는, 겁에 질린 학생이 호랑이선생님에게 불려가듯 백수건달이 술병을 잡듯 해서는 안 될 것이며, 마치 알프스를 오르는 산악인의 또는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이 병기고 안으로 들어설 때의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리라. 살 의지를 상실한 도망자로서가 아니라, 굳은 의지를 품고 친구의 조력자들에게 나아가듯이 말이다.
만약에 정말 이럴 수만 있다면, 지금 읽는 것의 10분의 1가량만 읽는다고 해도, 우리 모두 열 배는 더 행복하고 풍족해지리라. 그래서 우리의 책들이 더 이상 팔리지 않는다고 해도, 그 결과 우리 작가들이 열 배쯤 적게 쓴다 해도 세상에 해가 될 일은 결코 없으리라. 아무렴, 쓰는 게 문제인가. 읽는 게 훨씬 중요하지.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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