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다 죽지 않을 권리,
김용균법
매년 200명이 있었다
그 조간신문 1면엔 다른 신문에 다 나오는 일반적인 헤드라인과 톱기사 같은 게 없었다. 하단 광고마저 들어낸 지면 전체를 빼곡하게 채운 건 깨알 같은 활자들이었다.
박○○ (미상, 떨어짐)
김○○ (49, 끼임)
이○○ (48, 물체에 맞음)
최○○ (깔림·뒤집힘)
이○○ (미상, 부딪힘)
…
성도, 나이도, ○○ 속에 감춰진 이름도 다를 텐데, 단순화된 죽음의 형태는 유사했고 반복되었다. 건조한 명단의 나열 속에 문장이라곤 단 하나뿐이었다. “오늘도 3명이 퇴근하지 못했다.”
그 기사는 2018년 1월 1일부터 2019년 9월 말까지 고용노동부에 보고된 중대 재해 중 주요 5대 사고떨어짐, 끼임, 깔림·뒤집힘, 부딪힘, 물체에 맞음로 숨진 노동자 1355명 가운데 1200명의 명단이었다. 2018년 한 해 2142명의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사망했다. 이 중 사고 사망자는 971명, 질병직업병 사망자는 1171명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노동자 세 명이 사고로 죽고 직업병까지 포함해서 하루 평균 여섯 명의 노동자가 일하다 죽는 사회를 발가벗긴 ‘무서운 지면’에서 단 한 명의 이름만이 온전히 드러나 있다. ‘김용균(24, 끼임).’ 그제야 새삼 깨닫는다. 김용균 이전에 산업재해로 죽은 노동자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고 기억되는 일이 거의 없다는 걸. 많은 이가 추모한 ‘구의역 김 군’조차 성과 열아홉 살이라는 나이만 알 뿐 이름은 알지 못한다.
OECD 가입국 중 산재 사망률 최상위라는 불명예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고, ‘일하다 죽지 않을 권리’를 외친 노동계의 목소리는 김용균의 죽음 이전에도 절박했다. 하지만 일하다 죽는 노동자의 소식은 신문의 구석진 자리조차 차지하지 못할 때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평범한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의 죽음은 어떻게 우리 사회를 뒤흔든 사건이 되었을까.
빛을 만드는 곳의 어둠
2018년 봄, 스물네 살 김용균은 취업 준비로 분주했다. 부모는 큰맘 먹고 면접용 새 양복을 사주었다. 왼쪽 가슴에 작은 행커치프까지 꽂힌 멋진 양복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한다. “한번 입어 봐.” 차분하게 보이는 푸른색 넥타이를 반듯하게 매고 윤이 나는 구두까지 신으니 부모 눈에는 그야말로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인물이다. “한 바퀴 돌아봐.” 김용균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부모를 향해 거수경례를 붙이더니 이내 애교 많은 모습으로 느린 스텝을 밟으며 엉덩이를 살짝살짝 흔든다. 조금은 쑥스러운지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한다. 아들의 모습을 동영상에 담는 아버지, 부자父子의 다정한 한때를 지켜보는 어머니, 깜짝 재롱을 마친 아들, 가족 모두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김용균은 새 양복을 입고 수도 없이 면접을 보러 다녔지만 그 또래들에게 그렇듯 취업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여름의 끝자락에서야 한국발전기술의 계약직 사원으로 채용이 확정되었다. 한국발전기술은 태안화력발전소를 운영하는 한국서부발전에서 컨베이어 벨트 점검 업무를 하도급 받은 회사다. 언젠가는 한국전력공사에서 일하고 싶다는 꿈을 가진 김용균은 한국발전기술이 경력을 쌓기에 좋은 회사라 생각하고 고향인 구미를 떠나 태안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2018년 9월 17일 첫 출근한 김용균은 이틀간 신규 채용자 기본 교육과 사흘간 현장 직무 교육을 받았다. 고작 닷새간의 교육을 마친 그에게 숙련 노동자들과 같은 업무가 배당되었다. 6.4킬로미터에 이르는 컨베이어 벨트 구간 중 2킬로미터 가량을 혼자 점검하면서 고장을 찾아내 보고하는 일이었다. 〈산업 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에 따르면 작업장 통로 조명의 밝기는 75럭스 이상이어야 했다. 그러나 검은 석탄 분진이 날리는 그곳의 조명 밝기는 촛불 한 개 정도인 1럭스 수준에 불과했다. 게다가 초속 3미터의 속도로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의 굉음은 바로 옆 사람의 말소리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로 시끄러웠다.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 기계의 이상 소음을 듣고 고장을 찾아내려면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입사한 지 채 3개월이 되지 않은 같은 해 12월 10일, 김용균은 저녁 야간근무조로 오후 6시에 출근해 평소처럼 컨베이어 벨트를 꼼꼼히 점검했다. 그의 마지막이 작업장 CCTV에 고스란히 담겼다. 김용균은 컨베이어 벨트 덮개를 일일이 열어 덮개 안쪽에 휴대폰을 넣고 사진을 찍어 확인한다. 때로는 직접 머리를 들이밀어 살펴보기도 한다. 사진을 상사에게 전송하고, 낙탄을 부지런히 치운다.
10시 21분, 한국발전기술 운영팀 과장과 통화를 한다.
10시 36분, 컨베이어 벨트 통로를 걸어간다.
10시 41분, 운영팀 과장이 김용균에게 전화를 건다. 만나기로 한 장소에 그가 나타나지 않았
기 때문이다. 김용균은 전화를 받지 않는다.
10시 55분, 다시 전화를 걸어보지만 이번에도 받지 않는다.
11시 30분, 동료들이 다급하게 수색을 시작한다. 김용균이 점검하는 컨베이어 벨트 구간을 몇 번이고 확인하지만, 그는 보이지 않는다.
칠흑 같은 어둠, 석탄의 분진, 거대한 소음으로 가득 찬 작업장은 무슨 일인가 당했을 게 분명한 신입사원을 찾는 데 큰 장애가 되었다. 수색을 시작한 지 네 시간 정도가 지난 다음 날 새벽 3시 23분, 한 동료가 밀폐함 내에서 몸과 머리가 분리된 김용균을 발견했다. 머리는 컨베이어 벨트와 접하는 롤러 위에, 몸통은 바닥에 떨어진 채였다. 부재중 전화가 남겨진 휴대폰의 희미한 불빛만이 그 깊은 어둠을 위태롭게 떠받치고 있었다.
나, 김용균
화력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의 사망 소식은 그냥 묻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뉴스였다. 죽음이 무의미한 통계처럼 일상화되자 사람이 일하다 죽는 게 이 사회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여기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가지 사건이 절묘하게 겹치면서 김용균의 죽음은 그저 ‘또 하나의 산재’에 그치지 않고 누군가의 ‘죽지 않고 일할 권리’를 빼앗아온 우리 사회를 폭로하는 ‘시대의 사건’이 되었다.
하나는 우연이었다. 동료들이 김용균의 시신을 발견한 바로 그날2018. 12. 11, 서울 프레스센터에서는 비정규직 노동자 대표 100명이 대통령에게 대화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김용균의 생전 사진이 공개되었다. 석탄가루로 얼룩덜룩한 안전모를 쓰고, 방진 마스크를 낀, 까만 뿔테 안경 뒤로 진지한 두 눈동자를 가진 청년 노동자가 손팻말을 들고 찍은 사진이었다. 거기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 김용균은 화력발전소에서 석탄 설비를 운전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입니다.
전국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 단체는 이 행사를 위해 한달 전부터 노동자들에게 손팻말을 든 사진을 보내달라고 했다. 그렇게 모인 사진 수백 장 중 김용균의 것이 있었다.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을 공약하고 당선된 대통령에게 만남을 요청하는 청년 노동자의 얼굴은 그날부터 계속해서 언론의 톱뉴스를 차지했다.
다른 하나는 운명 같은 필연이었다.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의 죽음이라는 점에서 김용균 사건은 ‘구의역 김 군’ 사건을 떠올리게 했다. 2016년 5월 28일 서울메트로의 하청 업체인 은성PSD의 계약직 직원, 19살 김 군은 구의역 9-4 승강장 선로 쪽으로 들어가 승강장 안전문 장애물 검지 센서를 정비하다 진입하던 열차에 치여 숨졌다. 선로 수리 중에는 당연히 멈춰야 할 열차가 아무런 제동 없이 운행된 것이다. 승강장 안전문 수리기사 사고도 잊을 만하면 일어나다 보니 지하철 노동자들의 죽음이 크게 관심받지 못했지만, 그땐 달랐다. 김 군의 작업 가방 안에 있던 컵라면 하나가 극심한 취업난으로 힘들어하던 청년들 사이에서 “너는 나다”라는 공감대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청년들이 구의역 9-4 승강장에 추모의 포스트잇을 붙였다. “너의 잘못이 아니야.” “열심히 일했을 뿐인데 왜 죽어야 합니까?” “인건비 아끼려다 사람을 죽였다.” 청년들이 분노는 사회 전반으로 확대되어 이례적으로 ‘구의역 사망재해 시민대책위’까지 꾸려졌다. 정부는 재발 방지를 다짐하며 각종 대책을 내놓았고, 국회에서도 관련 법률 개정안을 잇따라 발의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여론은 식어갔고 국회의 논의도 아무런 진전 없이 멈춰버렸다. 구의역 김 군 사건 때 제대로 마무리 못한, 하청 노동자를 보호하지 못하는 법과 제도가 결국 또 다른 희생자를 만들었다는 반성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김 군이 일한 은성PSD는 서울메트로로부터 승강장 안전문 유지·보수 업무를 위탁받은 용역 회사다. 2인 1조가 원칙이지만 고장 신고가 많으면 그 원칙이 흔들렸다. 은성PSD는 서울메트로와 ‘1시간 이내 출동 완료’로 계약했고, 조금이라도 늦으면 지연배상금을 물도록 되어 있었다.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원칙대로 하면 계약을 지킬 수 없어 하루 90건이 넘는 장애 수리 중 절반 이상을 혼자 작업해야 했다. 이는 결국 2013년 성수역, 2015년 강남역, 2016년 구의역에서 안전문을 수리하던 하청 노동자의 사망으로 이어졌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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