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믈라카, 동양의 베니스
첫인상은 깨끗하다는 느낌이었다. 중국어나 영어 간판이 뒤섞여 있어 홍콩이나 싱가포르 같은 인상인데 왁자지껄한 활기는 별로 느껴지지 않는 곳이었다. 싱가포르처럼 깔끔하게 정돈된 시가, 홍콩처럼 적당히 무질서한 건물들. 어느 쪽도 아닌 도시, 믈라카를 그렇게 만났다. 중국계 인구 비중이 높아서 분명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묘하게도 믈라카는 싱가포르나 홍콩과 다른 구석이 있었다. 왁자지껄한 삶의 활기도 아니고, 숨 막히게 꽉 짜인 질서와도 다른 그 무엇이 믈라카에는 있었다.
단체관광에 익숙한 한국인들이 자주 찾는 곳은 아니다. 하지만 서양인들에게는 ‘동양의 베니스’로 잘 알려진 유명한 관광지다. 물론 믈라카 관광청 통계에 따르면 한국은 중국,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베트남과 함께 믈라카를 많이 찾는 5대 국가 중 하나다. 관광객들이 즐겨 이용하는 믈라카강 유람선을 타고 도시를 한번 훑어 보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한 시간 정도. 강이 도시를 휘감고 흐르기 때문인지 웬만한 믈라카 중요 지점은 다 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믈라카 주민들도 알고 있다. 이 유람선 관광이 그들에게 중요하다는 것을. 믈라카강의 유람선 관광은 도시의 전반적인 인상을 좌우할 뿐만 아니라 관광객이 어디를 가고 싶은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강을 따라 시선을 이리저리로 돌리다 보면 낡고 남루한 가정집조차 울긋불긋 벽화로 장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위치가 좋은 곳에는 강 쪽으로 테이블을 몇 개 놓은 카페가 자리 잡고 있기도 하다. 배에서 내린 사람들은 각자가 본 인상적인 곳을 찾아가려고 하기 마련이다. 믈라카는 이렇듯 보여주고 싶은 것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데 성공한 도시다.
동남아시아의 관광지가 유럽인들에게 더 익숙한 이유는 한때 그들의 식민지였기 때문일 것이다. 믈라카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근대 도시로서 믈라카는 포르투갈의 유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믈라카에 살던 사람들도 싱가포르 못지않게 다양하다. 원래 살고 있던 말레이족, 인도나 아랍 쪽에서 이주한 사람들, 멀리 중국에서 온 사람들과 포르투갈, 영국에서 온 사람들까지 여러 지역 출신들이 저마다의 관습과 문화를 유지하며 살았기에 도시 역시 복합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오랫동안 가고 싶었던 곳이다. 믈라카, 동방의 베니스라니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대체 어떤 곳이기에 믈라카에 그런 이름이 붙었을까?
일찍이 서구화의 세례를 받다
믈라카는 말레이반도 남쪽 믈라카해협에 인접한 항구도시다. 현지에서는 ‘Melaka’ 혹은 ‘Malacca’라고 표기하며, 원래 나무 이름이라고 한다. 말레이시아의 수도인 쿠알라룸푸르에서 동남쪽으로 약 148킬로미터 떨어진 도시이며, 믈라카주의 주도다. 도시 경관의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8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남쪽으로는 조호루, 북쪽으로는 느그리슴빌란과 접해 있다. 말레이반도에서 믈라카의 위치는 쿠알라룸푸르와 싱가포르 사이 중간쯤에 있어서 관광객은 보통 항공편을 이용해 두 나라의 수도로 들어가서 고속버스를 타고 믈라카에 간다. 어느 쪽에서 가도 두세 시간 정도 걸린다. 지정학적으로 배가 오가다 들르기 적당한 위치에 있어서 일찍부터 해상교역의 거점이 되었다.
믈라카 왕국이 있었을 때부터 교역의 거점으로 아시아 일대와 서양에 잘 알려진 까닭에 믈라카를 노리는 이들이 많았다. 발리처럼 살육을 당하거나 큰 전투로 도시가 심하게 파괴되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일찍이 서양의 침입을 받고 몇 세기 동안 지배를 받은 아픈 역사를 지녔다. 서구화의 세례를 일찍 받은 탓에 사회 구조와 문화는 다른 아시아 지역과 차이가 있다. 가장 먼저 믈라카를 점령한 포르투갈을 필두로 네덜란드에 이어 영국의 지배를 몇 세기 동안 받았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이 3년간 점령하기도 했으니 기구하다면 참 기구하다고 할 수 있다.
서쪽으로부터 이슬람 세력이 밀고 들어오기 전까지 믈라카는 오랑라우트Orang Laut라 불리는 해상 거류민이 들락거리는 그저 그런 어촌 마을에 불과했다. 그런데 싱아푸라의 마지막 왕으로 알려진 파라메스와라Parameswara, 일명 이스칸다르 샤Iskandar Shah가 1402년 믈라카를 거점으로 삼고 왕국을 세웠다. 이것이 비록 짧지만 영화로웠던 믈라카 왕국의 시작이다. 그가 믈라카를 택한 이유는 1년 내내 접근하기 쉽고, 폭이 좁은 믈라카 해협에 위치해 전략적 요충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년 뒤인 1403년, 인칭 장군이 이끄는 중국의 첫 사절단이 믈라카에 도착한 것을 시작으로 수차례 중국 사절단이 왔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우선 믈라카가 중국과 상당히 깊은 관계를 맺으며 발전할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는 점과, 중국을 배후에 둔 상업 교류를 통해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명나라 환관 정화를 통해 파라메스와라는 명나라와 성공적인 우호관계를 맺었는데, 그가 노린 것은 명의 비호를 받아 믈라카를 넘보던 시암지금의 태국과 인도네시아에 있던 나라 마자파힛 왕국을 견제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믈라카는 공식적으로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번국이 되었고, 이는 믈라카가 중국와 인도, 아랍과 아프리카를 잇는 교역의 거점이 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믈라카 왕국을 세운 파라메스와라 왕자는 싱가포르 방면에서 말레이반도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왔다고 전해진다. 『말레이 연대기』에는 파라메스와라가 수마트라에 거점을 둔 스리위자야의 왕자였는데 자바의 마자파힛 왕국의 공격을 받아 도망쳤다고 한다. 처음에 그는 떠마섹Temasek, 지금의 싱가포르에 다다라 잠시 지형을 살피다가 더 안전한 곳을 찾아 말레이반도 서안으로 북상했다. 왕자 일행은 1402년경 믈라카에 이르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마침 파라메스와라가 사냥을 하다가 잠시 나무 아래서 쉬고 있었다. 그때 개에게 쫓기다가 절벽 끝에 몰린 작은 쥐사슴을 보았다. 그런데 위기에 몰린 쥐사슴이 개에게 덤벼들어 개를 강에 빠뜨렸다. 그 모습을 본 파라메스와라는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길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바로 그곳에다 믈라카라는 나라를 세웠다. 나라 이름은 자신이 쉬고 있던 나무인 ‘믈라카’를 따서 지었다. 이것이 말하자면 믈라카 왕국의 건국 신화다. 하지만 이와 비슷한 신화가 스리랑카와 수마트라에도 전해지고 있어서 남아시아-동남아시아 해양 제국 사이에 비슷한 전승이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파라메스와라는 현지에 살고 있던 오랑라우트족해상 거류민의 협조를 얻는 데 성공했다. 왕자의 정치력이 꽤 좋았던 모양이다. 오랑라우트는 바다 위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바다에서 사는 사람들이니 바다 속 지형과 바람의 방향, 조수 등 바닷길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러니 이들의 도움을 얻어 믈라카 일대의 해상력을 장악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파라메스와라는 이를 지반으로 믈라카를 중계무역의 거점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바야흐로 믈라카는 말레이반도를 오가는 배들이 거쳐 가는 교역 중심지가 된 것이다. 멀리 서아시아나 인도에서 상업적인 목적을 가지고 동남아시아나 중국 방면으로 혹은 그 반대로 향하던 배들이 믈라카로 몰려들었다. 무수한 배가 믈라카에서 물과 음식을 보충하고 다양한 물류창고를 지어 교역품을 보관했다. 물론 믈라카 현지에서 새로운 품목을 사거나 자신들이 가져온 것을 팔기도 했다. 믈라카가 부유해질 수 있었던 이유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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