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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동물과 아이
애 옷 대신 개 옷
2018년 1월 한 신문의 경제 섹션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이제 한국은 “아이는 안 낳아도 개는 키우는 시대”로 들어섰으며 그 속에서 “애 옷 대신 개 옷”을 파는 새로운 시장이 형성되고 있다고 한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인구가 천만 명을 넘어선 지 오래며 반려동물 시장 규모는 농림축산식품부 추산 2017년 2조 원 대에서 2018년 3조 원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했다. 동물사료·반려동물 의류업뿐만 아니라 통신·가전업까지 반려동물 시장에 뛰어들고 있고, 기존의 영세·중소업체 중심에서 대기업 중심으로 판도가 바뀌는 중이다. 기사는 반려상품 시장이 급성장하는 상황을 매해 축소되는 유아용품 시장과 직접 대조하면서 저출산으로 타격을 입은 유아복 업체들이 이제 강아지 옷을 포함한 반려동물 사업에 진출하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아니나 다를까 기사에 첨부된 삽화에는 웃고 있는 강아지와 놀란 얼굴의 아기가 함께 담겼다.
이 기사에서 ‘반려동물’은 ‘아이’를 대체하고 있는 무엇으로 그려진다. 물론 반려동물을 키우는 많은 이들에게 ‘아이’로서의 반려동물이라는 정의는 그리 놀랍지 않다. 우리 주변의 많은 반려인이 스스로를 ‘엄마’, ‘아빠’ 또는 다른 친족적 호칭으로 부름으로써 반려동물과 유사 가족관계를 형성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신체뿐만 아니라 여러 면에서 성장해 더 이상 돌봄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 아이’와 달리 시간이 지나도 늘 돌봄대상으로 머물러 있는 반려동물에게 ‘아이’라는 정체성은 두말할 것 없이 적절해 보인다. 하지만 정확히 말해 이 기사의 논지는 반려인과 반려동물 사이에 유사 ‘부모-자식’ 관계가 형성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데 있지 않다. 그보다는 이른바 저출산 고령화로 정의되는 지금의 한국에서 반려동물이라는 새로운 존재가 사회문화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신생아 인구를 대체하고 있음을 짚어내는 것이다.
‘아이 대신 반려동물’이라는 프레임은 반려문화의 성장을 저출산, 소비문화의 발달, 유동 인구의 증가라는 맥락에서 접근하는 연구에서도 발견된다. 여기서 반려동물은 어린아이에 대한 감정적 대체물로서 ‘사람 아이’보다 금전이 덜 요구되며 양육이 쉬운, 그러면서도 감정적 보상을 제공해주는 존재로 간주된다. 하지만 ‘유연한 존재’나 ‘감정적 소비재’가 되는 바로 그 지점에서 반려동물이 쉽게 ‘탈가족화’된다는 점도 지적되는데, 이는 한국에서 반려동물과 유기동물이 동시에 증가하는 현실과 공명한다. 반려동물과의 관계 또는 그 경험은 아이와의 관계 또는 그 경험과 비슷하면서도 여전히 다른 무엇으로 다가온다. 따라서 ‘아이 대신 반려동물’은 반려동물과의 관계를 종합적으로 진단한다기보다는 단면만을 포착한다.
지배와 애정의 조합물
지리학자 이푸 투안Yi-Fu Tuan은 자신의 저서 『지배와 애정: 펫 만들기』Dominance and Affection: The Making of Pets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애정은 지배의 반대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부드러운 지배―즉, 인간의 얼굴을 한 지배일 뿐이다. 지배는 잔혹하며 착취로 이루어진 어떤 것, 그 안에 애착이라는 요소가 전혀 있어 보이지 않는다. (중략) 하지만 지배와 애정이 조합해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펫이다.
투안의 말은 애정·사랑을 지배·권력과 완전히 다른 영역으로 간주하는 우리 시대의 정서, 무엇보다도 펫을 애정과 사랑, 돌봄의 대상으로 한정시키는 상상력을 완전히 거스른다. 투안에게 펫은 ‘귀여운 강아지와 고양이’로 상상되는 반려동물을 넘어 식물, 동물 더 나아가 노예, 난장이 등의 인간 범주까지 포함한다. 예를 들어 18세기 영국에서 상층계급 여성들은 흑인 소년을 ‘이국적인 장식물’이나 ‘펫’으로 데리고 있었으며, 특별한 선물로 교환하기도 했다. 여기서 유추해볼 수 있는 것은 역사적으로 동물과 인간 사이의 위계뿐만 아니라 인간들 사이의 위계가 펫이라는 문화적 대상과 그 경험을 본질적으로 구성했다는 점이다. 즉 펫은 근대 서구에서 ‘자연’이나 ‘야생’을 상징했던그렇기에 ‘열등한 것’으로 간주됐던 인간 및 비인간 존재에 대한 지배와 통제라는 근대적 욕망의 산물이었다. 투안은 이 욕망을 동물 브리딩과 훈련, 정원 가꾸기, 동물원의 등장 등에서 찾는다.
중요한 것은 이 지배와 통제가 본질적으로 애정, 즐거움, 유희라는 감정 및 상태와 구분되지 않고 복잡하게 엉켜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애정은 지배를 부드러운 무엇, 받아들일 수 있는 무엇으로 변형시킨다. 그리고 펫의 모순은 단지 근대 서구라는 특정한 시대적·지리적·문화적 공간 안에 포박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일상에서 펫의 경험은 모순으로 빼곡이 채워진다.
인류학자 카오루 후쿠다Kaoru Fukuda는 1990년대 영국의 시골에서 여전히 행해지던 야생동물 사냥을 잔인한 전통으로 간주하고 사라져야 할 악습으로 바라보는 도시민들이 점점 증가했다고 이야기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에게 중성화수술, 미용, 브리딩 등 도시의 반려동물에게 일반적으로 가해지는 인위적 개입은 잔인함과는 거리가 먼 애정과 돌봄 행위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잔인함에 대한 정의가 얼마나 상대적일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야생동물의 사냥과 도시의 펫들에게 일상화된 신체적 개입 중 어느 것이 더 잔인하고 폭력적인지 또는 펫과의 관계에서 무엇이 애정의 소산이고 무엇이 지배욕의 소산인지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라디카 고빈드라잔Radhika Govindrajan에 따르면, 인도 히말라야 지역에서 이어지는 동물 희생제에서 애정과 지배, 돌봄과 폭력, 희생과 죽임처분 사이의 차이는 분명하지 않다. 힌두교도가 다수를 차지하는 이 지역 사람들에게 염소를 신에게 바치는 행위는 공동체의 영속성을 담보하지만, 대부분 가정에서 염소는 동시대 다른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반려동물이나 펫처럼 가족의 일원 또는 ‘어린아이’와 같은 자리를 차지한다. 염소는 가족이었다가 희생의 불가피성 속에서 처분 가능한 존재로 전유되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족의 일원이기 때문에 희생대상으로 바쳐진다. 가족 내에서 염소를 돌보는 사람들은 성별 상관없이 염소에 대한 그들의 애정을 ‘맘타’mamta, 엄마 사랑로 표현하며, 염소는 맘타에 보답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고 여겨진다. 공동체의 영속을 위해 소중한 염소를 보내야만 하는 가족 구성원들은 애정·기특함·슬픔·죄책감 등이 섞인 모순된 감정에 휩싸이며, 여기서 인간-동물 얽힘은 애정 혹은 지배로 깔끔히 정의할 수 없는, 본질적으로 오염된 상태에 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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