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인간은 존엄하긴 한가
대체로 무엇이 엄청나게 중요하게 강조된다는 것은
그것이 엄청나게 위협받고 무시당해왔다는 반증일 때가 많다.
왜
헌법인가
왜 수많은 법 중에서도 헌법인가?
지금 중요한 것은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법제도에 대한 지식보다는 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근본적인 가치에 대한 생각을 나누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분열된 사회에서 그것만이 그나마 최소한의 공유된 약속이기 때문이다. 보수, 진보, 여혐, 남혐, 극우, 좌빨, 적폐청산, 홍위병, 하나님의 뜻, 성경 말씀…… 각자의 프레임으로만 주장하면 같은 자리를 맴돌 때가 많다. 화투 한 판을 치더라도 룰 미팅을 먼저 확실하게 해야 하는 법이다. 전국구 타짜인 경상도 짝귀와 전라도 아귀가 손모가지 걸고 배틀을 붙는데 각자 자기 동네 룰로 승부를 내자고 우긴다고 치자. 구경꾼들은 결론 없는 말싸움에 지쳐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정의, 역사, 진실, 섭리…… 크고 아름다운 말일수록 백만가지 다른 뜻으로 쓰이기 마련이다. 사람들의 가치관은 다양하고 쉽게 변하지 않는다. 뇌과학자들은 심지어 보수 성향과 진보 성향은 뇌 구조 자체의 차이에서 비롯된다는 연구 결과까지 내놓고 있다. 미국, 유럽, 어디든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의 의견은 분열되어 있다. 거칠게 말하자면 5대5, 또는 1대4대4대1 정도로(의견이 통일된 국가는 대체로 침략이나 학살에나 장점을 보인다). 애초에 다른 존재들끼리 한집에 살기 위해 최소한의 타협을 하고 살아가는 것이 사회다. 그래서 서로의 존재 자체를 싸움의 대상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약속 위반을 따지는 게 낫다. 그 모두의 약속이 헌법이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나라가 미국이다. 우리보다 훨씬 복잡하고도 심각하게 분열된 사회인 미국에서 사회적 갈등이 발생할 때 논쟁의 기준이 되는 것은 항상 연방헌법이다. 영화나 미드에서 ‘수정헌법 제1조’를 외치는 대사를 참 많이 보지 않나? 법정에 선 변호사 역의 톰 행크스만 외치는 것이 아니다. 걸인 차림으로 길바닥에 선 모건 프리먼도 외치고, 싸구려 포르노 잡지 발행인 역을 맡은 우디 해럴슨도 외친다. 그만큼 이 조항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수정헌법 제1조(표현의 자유)는 미국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근간이다. 해마다 끔찍한 총격 사건이 이어지는데도 총기 소유를 금지하지 못하는 이유도 수정헌법 제2조가 무기 휴대의 권리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미국 연수 시절, 지금은 정치인이 된 엘리자베스 워런 교수의 파산법 강의를 듣다가 깊은 인상을 받았던 순간이 있다. 파산면책제도 정당성의 근거로 수정헌법 제13조를 강조하는 것 아닌가. 수정헌법 제13조는 노예제 폐지에 관한 조항이다. 인간을 평생 감당할 수 없는 빚의 굴레 속에 살게 하는 것은 헌법이 금지한 노예로 만드는 일이라는 논리다. 언제 폭동과 내전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을 만큼 심각한 분열 상태인 미국에서 헌법만이 모두가 인정하는 고스톱 룰이다. 전쟁중에도 지키는 제네바협약인 셈이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온갖 사회적 갈등과 논란이 쉴새없이 벌어지지만 자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헌법을 들먹이는 사람은 찾기 힘들다. 큰 관심도 없는 것 같다. 그저 각자의 프레임을 들고 와서 상대를 악마화하기에 바쁘다. 이래서는 제자리를 맴돌 뿐이지 않을까.
헌법은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약속일 뿐 아니라, 오래된 약속이라는 점이 특별하다. 오래된 이유는? 고치기 어렵기 때문이다. 법률은 보다 쉽게 제정하고 개정할 수 있다. 재적 의원 과반수 출선과 출석 의원 과반수 찬성으로 의결된다. 선거에 의해 다수당이 변화하면, 또는 정당끼리 특정 사안에 대해 정책 연대를 하는 데 성공하면 법은 바뀐다. 며칠 네티즌 여론이 들끓으면 발 빠른 의원 누군가가 급히 개정안을 발의하고 페이스북에 자랑글을 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헌법은 쉽게 바꾸기 어렵다. 국회의원 과반수의 발의 또는 대통령의 발의가 있어야 개정안이 제안되고, 단순 과반수가 아닌 국회의원 3분의 2 이상의 동의가 있어야 개정안이 의결되며, 이를 다시 국민투표에 부쳐 선거권자 과반수의 투표와 투표자 과반수의 찬성을 얻어야 헌법 개정이 확정된다. 이렇게 헌법 개정 절차가 법률보다 어렵게 되어 있는 헌법을 경성헌법rigid constitution이라고 한다.
왜 이렇게 까다롭게 해놓았을까? 사람들이란 변덕스럽기 때문이다. 다이어트 결심할 때를 생각해보면 쉽다. 다이어트 시작하는데 나중에 맘 바뀌어 아이스크림 퍼먹을지 모르니 그저 뜯어말릴 꼴통같이 고집 센 인공지능 냉장고가 필요한 것이다. “주인님! 전에 ‘내가 아무리 졸라도 밤 10시 이후에는 냉장고 못 열게 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꼭 열어야 하신다면 사모님과 합의하셔서 지시사항을 개정하십쇼!” (…헌법 개정보다 어려울 거다.)
이렇게 까다로워야 소수자가 보호받는다. 애들끼리 놀 때도 목소리 큰 애가 변덕스럽게 자꾸 규칙을 바꾸기 마련이다. 다수자의 편의를 내세워 소수자의 생존을 짓밟는 법을 입법할 때, 가장 강력한 반대 논리는 그건 헌법에 위반되니 정 바꾸고 싶으면 헌법부터 바꾸라는 주장이다.
심지어 저 까다로운 헌법 개정 절차를 다 밟는 데 성공해도 바꿀 수 없는 ‘헌법 개정의 한계’도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제정 당시의 국민적 합의사항, 즉 민주공화국이라는 정체성을 구성하는 자유민주주의적 기본질서를 부정하는 개정은 불가능하다. 조선왕조 코스튬의 팬이어서 군주국 부활을 꿈꾸는 덕후라면 아무리 많은 동호인들을 모아봤자 헌법 개정으로는 불가능하니 혁명을 꿈꾸어야 할 것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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