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는 글
이 책을 왜
쓰고자 하는가?
우리 교육이 흔들리고 있다. 아이들은 좌절과 분노로 학교생활을 채우고, 그런 아이들과 만나야 하는 교사와 학부모들은 어찌해야 할지 몰라 망연해하면서 검증되지 않은 주변 소문들에 휘둘리고 있다. 강남 아이들은 어떤 과외를 받고 있다느니, 돌만 넘으면 영어유치원에 다녀야 한다는 소문이 그런 대표적인 예다. 사실 이런 소문들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고등학교 입시가 중요했던 1970년대에도 지역 명문고가 있던 도청소재지 학생들은 어떤 참고서로 공부하고, 서울 아이들은 어떤 과외를 받는지 같은 검증되지 않은 소문들이 있었다.
그 시절의 고통은 지금에 비해 훨씬 덜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고입에 낙방하고 맛보아야 했던 열여섯 살의 좌절감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학교가 생긴 이후 이른바 그 지역 명문고에 한 명도 보내지 못한 면소재지 중학교 출신인 내게 일류고는 그 후 한동안 열등감의 원천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대입도 한 번에 성공하지 못하고, 재수학원을 거쳐 겨우 들어간 대학은 최소한 나보다는 나아보이는 동기들과 군부독재정권이 보낸 전경들로 가득했다
우리 인간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는 존재자들이다. 자칫 자만심과 오만으로 이어지거나, 아니면 불필요한 열등감에 시달리면서 삶의 중요한 순간들을 낭비하기도 한다.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거울이 내 안에 있다는 생각을 정착시켜온 우리 전통의 성리학과 선불교는 21세기 들어와서 인지과학 등의 성과에 힘입어 그 유효성을 상당 부분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몸에 근거해서 외부의 사물과 사건을 받아들이고, 그 과정이 축적되면서 세상과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인지적 틀을 형성한다는 것이 그 성과의 핵심이다. 그런데 그 과정이 늘 온전할 수 없기 때문에 불완전한 틀만을 가진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다.
우리 교육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주로 자신이 받아온 교육경험을 토대로 교육문제를 바라본다. 그 경험은 몸소 겪은 것이기 때문에 강렬하기도 하지만, 기억이 축적되는 과정에서 상당한 정도의 왜곡과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가 포함될 수밖에 없다. 보수나 진보정권을 구분하지 않고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입시에서 성공했을 가능성이 높고, 수십 년도 더 지난 자신의 그 경험을 토대로 현재의 학교와 교육을 바라보고자 한다. 과목별로 암기한 지식의 양을 주로 측정하던 학력고사가 가장 깔끔하고 공정한 시험이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사람들이 전형적으로 그런 사례에 속할 가능성이 높다.
영어와 수학은 각각 그 시대에 유행했던 특정 참고서를 몇 번 반복해서 보느냐에 따라 당락이 결정되었고, 다른 과목들도 열심히 암기해서 어느 하루를 잡아 치르는 시험에서 잘 쏟아놓으면 그 이후의 인생은 보장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들이 현재의 권력층을 형성하고 있다. 나 자신도 권력과는 거리가 멀지만 다른 측면에서 그런 과정을 거쳐 혜택을 누리고 있는 사람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조금 돌아오기는 했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알아주는 대학을 나왔고, 그 학력을 기반으로 선호되는 직업 중 하나인 교수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 학력고사 형태의 수능시험 체제로 바꾸면 대입을 정점으로 하는 우리 교육 문제가 단박에 해결될 수 있을까? 입시제도의 다양화와 그것을 통한 보다 많은 기회 보장을 이유로 도입된 수시입학이 준비를 해줄 수 있는 배경이 있는 학생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고, 그나마 넓혀지고 있다는 다양성도 허울뿐이라는 비판을 감안하면 수능시험 점수로만 치르는 정시입학이 대안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수학능력시험은 그 자체로도 한계에 도달해 있다. 난이도 문제가 상시화되었고, 그 난이도를 맞추기 위해 출제했다는 문제는 수험생들의 실수를 유도해내는 ‘못된 문항’이라는 비판을 받은 지 오래되었다. 언제까지 이 시험방식을 고수해야 하는지를 놓고 회의적인 시각이 점점 더 커지고 있는 상황인데, 그 시험 점수만으로 대입을 치르자는 의견이 온전히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러는 가운데 잊을 만하면 터지는 고교 내신 관련 부정 사건은 어느 한 곳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흉흉한 소문과 함께, 학부모와 교사를 비롯한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의 마음에 짙은 어둠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내신도 아니고 수능도 아니라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일까? 물론 대입이 학교 교육의 모든 문제일 수는 없다. 아니 그것의 극히 작은 한 부분에 불과한 것인지 모른다. 우리 학교 교육의 목적은 개인적으로는 스스로의 삶을 자율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품성과 역량을 길러주는 것이고, 사회적으로는 시민사회를 주체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시민을 육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입은 그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여러 국면 중 하나일 뿐이다.
살아가는 과정에서 만나야만 하는 문제가 얽혀서 어찌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을 때 필요한 자세는 어쩌면 그 문제로부터 한발 물러서는 것일지 모른다. 얽힌 문제를 계속 붙들고 씨름해봐야 점점 더 얽혀서 결국 버려야만 하는 실타래처럼 되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대입으로 집중된 우리 교육문제는 그 어떤 묘안을 찾고자 하고 어떤 사람을 대통령이나 교육부 장관으로 데려다 놓아도 쉽게 해결될 수 없는, 심하게 엉킨 실타래 같은 것임을 직시하고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일단 그렇게 받아들이고 나면 한발 물러서서 그 얽힘의 양상을 관찰할 수 있게 되고, 이 관찰은 다시 분석과 토론, 실천적인 대안 모색 등의 선순환 과정으로 들어서는 디딤돌이 된다.
이 책을 써보고 싶다는 열망은 꽤 오래된 것이다. 전 국민이 전문가여서 전문가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교육전문가’라는 타이틀을 박사학위 명칭으로부터 부여받게 된 1990년대 중반 이후, 우리 교육을 어떻게 바라보고 실천적 대안을 모색해야 하는지와 관련된 화두話頭를 놓은 적이 거의 없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어느 시점부터는 ‘인성교육 전문가’, ‘민주시민교육 전문가’와 같은 이름이 더해졌고, 교사나 학부모 대상의 관련 강좌를 의뢰받는 일 또한 흔한 일상이 되었다. 최근에도 어느 고등학교 교장, 교감을 비롯한 그 학교의 모든 선생님과 만나 인성교육 특강을 했고, 어느 중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우리의 민주시민은 누구일까’를 주제로 삼아 특강을 했다. 방학 때면 그런 기회는 더 늘어나곤 한다.
그런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어쩔 수 없는 마음의 갈등을 겪는다. 도대체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떤 이야기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는 생각과 그럼에도 교육을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 교사들과 만나는 일 자체를 포기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교차하며 찾아들기 때문이다. 유치원과 초등학교, 중고등학교를 포함하여 나처럼 대학에 있는 교수까지 모든 교사는 그 어느 누구도 교육 자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때의 교육은 당연히 인격체들 사이의 만남을 전제로 하는 목적으로서의 그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오랜 시간 동안 ‘교육敎育’이라고 생각해왔고,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교육은 그 교육에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받아들인 것이다.
교육은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일 수 있지만, 그 자체로 목적이기도 하다. 수단으로 교육이 활용될 경우에도 어떤 방식으로든지 목적 자체로서의 교육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왜곡되거나 변질될 가능성이 늘 존재한다. 왜냐하면 교육의 주체와 대상이 다른 존재자가 아닌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늘 목적으로 대우받아야 한다는 칸트적 의미의 정언명법定言命法은 어떤 윤리적 관점을 택하더라도 바탕에 깔아야 하는 전제이다.
그렇다고 해서 교육에 주어지는 현실적인 요구들을 무시할 수 있다거나 무시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인간은 먹고살아야 하고, 그 먹고사는 문제를 기본적으로는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에 부여되는 이러한 생존에의 요구로부터 인간 또한 결코 자유로울 수 없고, 그러한 요구를 받아들여 교육이 생존력을 길러주는 것을 기본목표로 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인간에게 요구되는 이 생존력이 지니는 복잡성과 모호성에서 생긴다.
생존生存을 대부분 본능에 의존하는 동물들과는 다르게, 인간은 본능과 함께 이성에 근거한 사유와 실천의 영역을 통해 생존과 함께 실존實存의 차원을 확보하는 차별적인 진화의 역사를 축적해왔다. 그것이 문명으로 정착했고, 특히 자연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도시 중심의 생존과 실존이라는 새로운 차원의 삶의 영역을 개척해왔다. 도시 중심의 생존이 자연물을 채취하거나 가공하는 수준을 배제하지는 않지만, 사람이나 공산품을 대상으로 하는 일자리를 통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취직을 하거나 창업을 함으로써 돈을 벌어 생존하는 ‘도시적인 삶’을 일반적인 유형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다른 한편 인간의 생존은 사회라는 형태의 공동체적 양상과 관계를 토대로 보장된다. 그 공동체가 근대를 넘어서면서부터는 ‘시민사회’로 정착했고, 우리도 20세기 중반을 넘어서면서 이러한 시민사회 속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 시민사회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시민이고, 이 시민은 다시 사유재산권과 정치적 자유를 보장받으면서 공공적 영역으로서의 사회를 보존해가는 주체라는 의미의 공화共和를 전제로 살아가도록 요구받는다. 21세기 초반 현재의 한국사회는 시민사회이고, 그 주체는 시민이다. 그는 민주주의와 공화주의 모두의 주체로서의 자격을 지녀야 한다는 요청을 받고 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스스로 이끌어가는 정치·경제 체제의 주체임과 동시에, 공공의 것에 대해서도 충분히 책임질 줄 아는 공화적 주체이기도 해야 한다는 기대를 모으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요구와 요청들은 인간의 생존과 실존의 영역에 걸쳐 있다. 생존과 실존이 온전히 분리되지 않는 것이 인간 삶의 특성이다.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하지만, 그것으로 온전한 삶이라고 느낄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어떤 방식으로든지 우리는 자신의 삶이 지니는 의미를 물을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배부르게 먹고 화려한 침실에서 잠을 자면서 느낄 수 있는 행복감은 오래가지 못하고, 그 틈새를 어느새 파고드는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 것일까’라는 물음은 우리를 생존이 아닌 실존의 차원으로 자연스럽게 이끈다.
교육은 이러한 인간 삶의 고유한 특성에 기반하여 펼쳐져야 마땅하다. 교육의 일차적 목적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생존력의 획득이지만, 그 생존력이 우리 인간에게서는 가치와 당위의 차원을 포함하는 실존의 영역까지 포함하는 것임을 전제로 하는 교육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지적 지능뿐만 아니라 정서적 지능 같은 다중지능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치는 미국의 인지심리학자 가드너H. Gardner는 ‘실존지능existential intelligence’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이런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다른 지능들을 포괄하면서도 삶의 어느 지점에서 의미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답할 수 있는 지능이 바로 실존지능이다.
이러한 차원의 실존은 다른 사람과 바람직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시민으로서의 능력과 직결된다. 관계를 형성하고 이어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하면 그의 삶이 제대로 전개될 수 없고, 그런 점에서 그것은 자기 스스로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과도 연결된다. 이런 관계들을 통해서 생존문제도 대부분 해결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은 관계능력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바람직하다. 시민사회에서 그것은 누구로부터 부당한 지배를 받지 않는 비지배자유와 평등한 인격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관계망으로 이어지고, 따라서 시민교육으로서의 교육은 바로 이 관계능력을 중심으로 펼쳐져야 한다.
우리 시민사회가 21세기 초반 현재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 것은 외형과 절차의 문제가 아닌 그 구성원인 시민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객관적으로 성찰하는 바탕 위에서 펼치는 관계 맺기 및 유지 능력이다. 그것은 다시 시민의 교양과 윤리 문제로 구체화되고, 이 교양과 윤리의 결여는 불필요한 갈등과 불쾌감은 물론 공공영역의 지속적 악화를 불러와 시민사회 자체를 위협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내가 제기하고자 하는 주장의 핵심이 시민의 교양과 윤리를 확보해낼 수 있는 교육인 이유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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