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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를 탄 유인원들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이라 하더라도, 그의 본성에는 분명히 다른 사람의 고락에 관심을 갖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 (애덤 스미스, 1759)
매년 16억 명의 승객들이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목적지에 가기 위해 비행기를 탄다. 보안검색대 앞에서 침착하게 줄을 서고,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몸을 수색하도록 허락한다. 그리고 거대한 알루미늄 통에 차례차례 들어가, 좁은 좌석에 몸을 욱여넣고, 팔꿈치를 맞대고, 긴 비행시간 동안 서로에게 맞추고 협조한다.
승객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체념한 듯 미소를 지으며 눈을 맞추고, 뒤늦게 탑승해 사람들을 밀치며 복도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길을 양보한다. 배낭을 맨 젊은이가 머리 위에 있는 수납 칸에 소지품을 쑤셔넣으려고 하다 배낭으로 나를 친다. 나는 얼굴을 찡그리고 이빨을 드러내는 대신, 짜증을 감추고 희미하게나마 미소를 짓는다. 기내에서 아기가 울더라도 대부분의 승객들은 크게 짜증스러워하지 않는다. 혹은 짜증나지 않는 척한다. 심지어 몇몇 승객은 고개를 슬쩍 끄덕이고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당신 기분 알겠어요’라고 아기 어머니에게 심정을 이해한다는 신호를 보낸다. 또 아기로 인한 소란이 자기가 상상하는 것만큼 짜증나지는 않다고 아기 어머니에게 위로의 신호를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고 아기의 어머니도 옆자리에 앉은 젊은 남자 승객이 아기 어머니의 걱정만큼이나 정말로 그 모든 상황을 언짢아하는 중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청년은 아기 어머니를 쳐다보지 않고 노트북 컴퓨터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을 뿐이다.
비행기를 자주 타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마음과 의도를 파악할 수 있는 공감 능력, 즉 우리 종의 타고난 재능인 상호 이해의 능력을 빈번하게 쓴다. 인지심리학자들은 다른 사람이 머릿속에서 어떤 생각을 할지를 생각할 수 있는 이 능력을 ‘마음 이론’이라고 부른다. 인지심리학자들은 인간 아이들이 이러한 능력을 몇 살에 습득하는지, 그리고 다른 비인간 동물들이 어느 정도로 마음 읽기더 정확하게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마음을 귀속시키는 것를 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 재치 있는 실험을 고안했다. 또 다른 심리학자들은 이와 관련해 ‘상호주관성’이란 용어를 선호한다. ‘상호주관성’은 자기의 감정과 경험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자 하는 능력과 욕구를 강조한다. 인간에게서 이러한 소양은 발달상 아주 이른 시기에 발생하고 이후 더 정교한 마음 읽기를 가능하게 하는 토대가 된다.
뭐라고 부르건 간에, 타인의 얼굴을 알아보고 관심을 기울이며,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의도를 이해하고, 그들의 목표에 공감하고 관심을 갖는 우리의 경향으로 인해 인간은 주변 사람들과 협력하는 데 있어 다른 유인원들보다 훨씬 더 능숙하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훨씬 더 자주,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감지한다. 그리고 더욱 흥미롭게도, 자신의 정신적 경험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한다.
비행기에서 옆자리에 앉은 두 사람을 상상해보자. 그중 한 명이 비행 중 심각한 편두통이 생겼다. 말이 통하지 않더라도, 옆자리에 앉은 사람은 아마도 젖은 수건을 머리에 얹어주거나 하면서 도와줄 것이고, 또 아픈 여성은 이제 괜찮다고 안심시키고자 할 것이다. 인간은 종종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이해를 얻고, 또 협력하는 데 진심이다. 비좁은 기내에 다닥다닥 붙어 앉은 승객들은 인간의 상호작용에 공감과 상호주관성이 얼마나 자주 관여하는지 잘 보여준다. 이런 일은 너무 자주 일어나서 우리는 이를 당연하게 여긴다. 하지만 만약 이 비행기에 욱여넣어진 짜증난 탑승객이 인간이 아니라 다른 종의 유인원이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지금 같은 순간에 나의 사회생물학적 상상은 무척이나 기괴해서 인간의 마음 읽기가 완벽하지 않다는 게 다행스러울 지경이다. 나는 비행기 안의 승객들이 갑자기 다른 종의 유인원으로 변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해본다. 내가 만약 비행기를 가득 채운 침팬지들과 여행하고 있다면 어떨까? 울던 아기가 무사히 살아있고, 우리 중 누구라도 열 손가락과 발가락이 모두 붙어 있는 채로 비행기에서 내린다면 다행이다. 아마도 유혈이 낭자하고 떨어져 나간 신체 일부가 통로에 가득할 것이다. 매우 충동적이고 낯선 침팬지들을 좁은 공간에 쑤셔넣는 것은 아수라장을 만들기 딱 좋은 방법이다.
일단 한번 시작하면 인간과 다른 영장류들을 비교하는 습관을 떨치기가 매우 어렵다. 머릿속에서 하누만랑구르원숭이의 행동을 관찰한 초창기 보고서가 떠오른다. 랑구르원숭이는 아시아 원숭이의 한 종으로, 내가 젊은 시절에 인도에서 연구한 종이다. 영국 관료이자 아마추어 자연사학자였던 휴즈T. H. Hughes는 본국에서 인도의 식민통치를 돕기 위해 파견된 인물이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1882년 4월, 르와 주 소하그푸르 지역에 있는 싱푸르 마을에 캠프를 쳤을 때 … 하누만원숭이들이 안절부절못하며 모여드는 모습이 나의 주의를 끌었다.” 휴즈가 지켜보는 가운데, 두 마리의 수컷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다. 그중 한 마리는 한 무리의 암컷과 함께 다니던 중이었고, 다른 한 마리는 아마도 낯선 이방인 같았다. “두 수컷의 팔과 이빨이 흉악스럽게 움직이더니, 싸움꾼 중 한 마리의 목이 찢겨 나갔고, 곧 죽었다.” 이어서 휴즈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승리의 파도가 이방인의 편에 있는 듯 보였지만, 곧 암컷 두 마리가 다가왔을 때에는 그 운이 다했던 것 같다. … 암컷 둘이 덤벼들었고, 그가 용감히 맞서 싸웠지만, 암컷 중 한 마리가 그의 가장 소중한 부위를 잡아서 떼버렸다.”
랑구르원숭이, 붉은콜로부스원숭이, 마다가스카르여우원숭이, 그리고 우리와 가까운 친척인 대형 영장류들의 현장 기록에는 온갖 종류의 잃어버린 손가락과 찢겨 나간 귀, 거세에 대한 보고가 산재해 있다. 심지어 평화롭기로 유명한 보노보침팬지 종류 중 하나로 희귀종이라 야생에서의 관찰은 드물고 대부분 동물원에서 관찰된다들 사이에서도 실랑이가 벌어진 후에는 찢어진 음낭이나 음경을 꿰매기 위해 때로 수의사들이 호출된다. 인간이 질투, 분노, 폭력, 외부인 혐오, 살인에 대해 비슷한 성향을 보이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우리와 가장 가까운 유인원들에 비해 인간은 완전한 아수라장을 막는 데 더 능숙하다는 말이다. 우리는 대체로 다른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려고 한다. 침팬지처럼 마구잡이로 낯선 이를 공격하지도 않으며, 침팬지와 달리 다른 사람의 얼굴을 마주보고 직접 죽이는 일은 훨씬 어려워한다. 매년 16억 명의 비행기 승객들이 눌리고 밀쳐지는데도 아직 어떤 종류의 절단 사고도 보고되지 않았다. 이 책의 목표는 이러한 일이 가능하도록 하는 상호 이해, 나눠주고자 하는 충동, 마음 읽기, 그리고 다른 초사회적 경향들의 초기 기원을 설명하는 것이다.
협력의 배선
현대인들은 꽤 어린 나이부터 특별한 훈련 없이도 다른 사람들의 곤경을 동일시하며, 심지어 낯선 사람에게도 자발적으로 도움을 준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다른 유인원과는 구분되는 독특한 계보의 유인원이다. 인도네시아 쓰나미나 허리케인 카트리나를 떠올려보자. 피해자들의 사진이나 영상을 접하고 수많은 기부가 이어졌다. 이들이 밝힌 기부의 이유는 한결 같았다. 기분이 나아지는 유일한 방법은 피해자들을 돕는 것이다. 전 세계로 방송되는 고통스러운 얼굴들을 보고, 또 가족을 잃은 생존자들의 신음소리를 듣고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다른 사람과 동일시하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신의 일처럼 느끼는 것은 단순히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우리의 일부분이다. 신경과학자들은 뇌 스캔을 이용해 다른 사람이 사과를 먹는 것을 지켜보거나, 다른 사람이 사과를 먹는 것을 상상하도록 요청받은 사람들의 신경 활동을 관찰했다. 피험자들은 자신과 타인을 구별하는 것을 담당하는 뇌 영역이 활성화될 뿐만 아니라 사과를 먹는 것과 관련된 근육을 조절하는 것을 담당하는 뇌 영역도 함께 활성화되었다. 사람들이 감정적인 상황에 처한 다른 사람을 상상하도록 요청받은 실험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타난다. 이러한 별난 마음은 연민의 행동뿐 아니라, 모든 문화에 존재하는 환대, 선물 주기, 예절 등의 규범과 온갖 사회적 상황에 사람들이 더 잘 대처할 수 있게 한다.
실험실에서 임의로 짝지어진 낯선 사람들이 ‘죄수의 딜레마’라는 유명한 게임의 변형 버전을 수행하는 동안, 신경과학자들이 자기공명영상MRI를 이용해 참여자들의 뇌 활성도를 모니터링한 결과도 반사적인 이타적 충동을 지지한다. 이 실험에서 두 명의 참여자는 짝을 이뤄 협력하거나 배신하고 이를 통해 보상을 받는다. 만약 반복되는 게임에서 둘 중 아무도 배신하지 않고 계속 협력한다면, 둘 다 게임을 통해 이익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한 참여자가 배신하고 상대방은 협력한다면, 배신자는 그보다 더 큰 이익을 얻고, 상대방은 한 푼도 얻지 못한다. 만약 두 사람 모두 배신한다면, 둘 다 완전히 손해를 본다. 이러한 종류의 실험들은 놀랄 만한 결과를 보여준다. 참여자들에게 이 게임이 단 한 번만 진행되며, 각각의 참여자들이 협력하거나 배신할 수 있는 기회는 한 번뿐이고, 상호 이익을 위해서 다시 서로 협력할 가능성이 없다고 알려주더라도, 무작위로 선정된 낯선 사람들 중 42퍼센트의 사람들이 협력적으로 행동했다.
이러한 관대함은 언뜻 보기에 합리적이지 않다. 특히 개인주의를 찬양하고 이기적인 ‘합리적 행위자’를 가정한 경제학 모델에 익숙한 경제학자들이나, 나 같은 사회생물학자에게는 더욱 그렇다. 나는 가임기 암컷에 접근하기 위한 영장류 수컷 간 경쟁, 같은 그룹에서 자원을 놓고 벌어지는 암컷 간 경쟁, 심지어 같은 가족 안에서도 부모가 주는 음식과 보살핌을 차지하기 위한 자식들 간 경쟁을 연구하는 데 직업적 삶의 대부분을 바쳤다. 하지만 약 180만 년 전부터 기원전 약 12,000년까지 홍적세의 광대한 시간과 변화무쌍한 기후 변화 속에서 인류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고려해보면, 그런 관대한 성향은 “합리적인 것보다 나은” 선택이다. 사람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검증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너무나 많이 의존해야 했기 때문이다.
넓은 지역에 퍼져 서로 연결된 작은 친족 집단 안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상호작용이 계속 반복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자발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일을 하는 성향을 의미하는 친사회적 욕구는 추후에 보답받거나 보상받을 가능성이 높다. 관대한 사람과 그 가족의 안녕은 한 번의 특정한 거래의 즉각적인 결과보다는 좋을 때나 나쁠 때나 한결같이 의존할 수 있는 사회적 관계망에 더 크게 좌우된다. 당신이 이번 해에 관대하게 농기구를 빌려주거나, 음식을 나눠준 상대방은 이듬해에 당신의 우물이 말라버리거나 집 근처에서 사냥감이 사라졌을 때 의지하게 될 사람이다. 평생 동안 사람들은 이웃과 마주치고 또 다시 마주쳤을 것이다. 꼭 자주 마주친 것은 아니더라도, 몇 번이고 다시 마주치곤 했을 것이다. 답례를 하지 못하면 동맹을 잃거나, 더 나쁘게는 사회적으로 배척당할 수 있다.
이제 수천 년을 건너뛰어 오늘날 연구자들이 이와 비슷한 실험을 진행하는 실험실로 가보자. 호의가 보답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없는데도 협력을 선택한 실험 참여자들에게서 보이듯이, ‘일회적 거래’는 인간의 뇌가 일상적으로 처리해왔던 종류의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심지어 말을 배우기도 전에,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 보람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누가 도움이 되고 누가 그렇지 못한지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다른 사람을 도울 때 활성화되는 뇌 영역은 사람들이 다른 즐거운 보상을 받을 때 활성화되는 뇌 영역과 동일하다.
어떤 사람들은 새로 태어난 아기가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좋은 시민이 되도록 사회화가 필요한 작은 이기주의자라고 여긴다. 하지만 이는 어느 모로 보나 인간 종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다른 특성들을 간과한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이 다른 사람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지 각별히 주의를 기울인다. 17세기 스피노자의 말이 인간이 자라면서 겪는 수많은 긴장을 잘 담아내고 있다는 데에 점점 더 많은 신경과학자들이 동의한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평화롭게 지내고자 하는 노력은 자기 자신을 영위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새로 발견되는 증거들에 따라 심리학자들과 경제학자들도 우리의 뇌가 상호 협력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보상하거나, 처벌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도록 배선되어 있다”고 결론 내리고 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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