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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미안한
《사랑과 인식의 출발》
구라다 하쿠조 지음, 김봉영 옮김, 창원사, 1963년
절판된 책 찾아주는 일을 하며 돈 대신 책에 얽힌 사연을 수수료로 받겠다는 아이디어를 처음으로 떠올렸던 한 사건이 있다. 금호동에 있는 규모가 제법 큰 헌책방에서 직원으로 일하던 시절 이야기니까 꽤 오래전 일이다. 지금 금호동엔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깔끔한 아파트가 들어서 있지만, 20년 전 즈음만 하더라도 그곳은 야트막한 주택들이 산등성이를 따라 들판처럼 퍼져 있는, 서울에선 보기 드문 예스러운 풍경이 남아 있는 동네였다.
내가 일하던 헌책방은 장사가 잘돼서 직원이 열 명이나 있었다. 지금처럼 인터넷으로 헌책을 사고파는 게 아직 활발하지 않던 때였기 때문에 방문 손님도 적지 않았다. 직원들은 온종일 땀에 젖어 천장까지 쌓인 책들과 씨름했다. 그래서 손님이 와서 뭘 물어봐도 친절하게 응대하기 힘들었다. 나는 그게 좀 불만이었다. 아무리 책 다루는 일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책방 일꾼이 책을 사러 온 사람에게 신경을 쓰지 못할 정도라면 문제가 아닌가. 그러니 나라도 손님을 반갑게 맞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매일 수천 권의 책들과 싸우다 보면 웃으면서 사람 대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어느 날 오후, 나이 지긋한 어르신 한 분이 헌책방 지하 매장으로 내려왔다. 나이는 70대 정도로 보였는데 허리가 곧고 차림새가 말끔해서 처음부터 뜻 모를 호감이 일었다. 어르신은 찾고 있는 책이 있는데 혹시 알아봐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다행히 당시 그 헌책방은 일찌감치 대부분의 책을 컴퓨터 데이터베이스에 입력해두었기 때문에 홈페이지를 통한 인터넷 통신 판매도 겸하고 있었다.
“좀 오래된 책이긴 한데…….” 어르신은 양복주머니에서 잘 접힌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말끝을 흐리는 거로 봐서 책을 찾기 위해 이미 여러 헌책방에 방문했던 것 같다. 여기에 그 책이 있을 거라는 희망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말씀해보세요. 여기 있는 책이 대략 10만 권이 넘거든요. 전부는 아니지만, 컴퓨터에 책 제목을 입력해두었으니 검색해보겠습니다.”
“《사랑과 인식의 출발》이라는 책입니다. 구라다 하쿠조라는 일본 사람이 쓴 책이지요.”
처음 들어보는 책 제목이다. 게다가 어르신이 찾고 있는 건 1963년에 출판된 책이다. 혹시 모르니 기대를 하고 컴퓨터로 검색해봤지만 역시 이곳엔 없는 책이었다.
책이 없다고 하니 어르신은 담담한 목소리로 “그렇군. 고마워요.”하며 몸을 돌려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계단이 가팔라 어르신의 걸음이 위태로워 보였다. 나는 그 뒷모습이 조금 쓸쓸해 보여서 곧 뒤따라가 성함과 연락처를 알려주시면 혹시 책이 들어왔을 때 연락드리겠다고 했다. 어르신은 처음으로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내가 건넨 작은 종이에 전화번호를 적었다.
고백하자면, 사실 나는 그때 진짜로 책을 찾아드릴 생각은 없었다. 어르신에게 조금이라도 위로를 드리고 싶었기에 책을 찾게 되면 연락하겠다는 헛된 약속을 한 것이다. 정말로 그 책을 찾게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책은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책 스스로 나타나주어야 한다. 헌책방에서 일하다 보니 책을 찾는다는 게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알게 됐다. 어떤 책은, 분명히 세상에 존재하는 책이라는 걸 아는데도 몇 년 동안 만나지 못한 채로 살아간다. 정반대의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도저히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책인데 며칠 만에 나타난다. 그건 어떠한 자연법칙이나 심리학 개념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 책이 제 의지로 사람을 찾아오는 것이다. 믿기 힘들겠지만,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어르신이 찾고 있던 책도 그렇게 나타났다. 마치 인연처럼. 나조차 거의 잊고 있었는데, 반년 정도가 지난 후 정말로 그 책이 우리 헌책방에 입고된 것이다. 그날 트럭에 실려 가게로 쏟아져 들어온 수천권의 책들 속에서 손바닥만 한 작은 책 한 권이 내 눈에 보일 확률은 또 얼마나 될까? 서지 면을 보니 1963년 창원사에서 펴낸 초판, 바로 그 책이다! 책을 집어 드는 순간 몸에 전율이 일었다.
천만다행으로 어르신이 남긴 연락처도 아직 갖고 있었다. 갖고 있었다기보다는 그저 책상 구석 한쪽에 밀어둔 채로 잊고 있었다고 해야겠지만. 하지만 그마저도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라 말하고 싶다. 일을 마치면 매일 청소를 하는 게 헌책방 일과의 끝인데, 어떻게 그 작은 종잇조각이 여섯 달 동안이나 살아남았단 말인가?
《사랑과 인식의 출발》은 나쓰메 소세키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작가이자 학자 구라다 하쿠조倉田百三, 1891~1943가 사랑에 관해서 쓴 짧은 글을 모아 엮은 책이다. 작가는 탐미주의가 유행하던 일본의 문학계에서 냉정한 이성과 실존을 강조한 ‘시라카바白樺’ 동인의 한 사람으로 활동했다. 일본의 지식인과 청년들 사이에서 널리 읽힌 이 책은 1921년에 초판이 나왔고 우리나라에서는 1950년대부터 꾸준히 번역됐다. 알아보니 우리나라에서도 독자가 많아 번역 판본이 여러 종 있었는데 왜 어르신은 유독 1963년 판을 찾고 계셨던 것일까? 그 사연은 책을 찾으러 오신 어르신에게 직접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젊은 시절 일본에서 공부했어요. 우리 집이 큰 부자는 아니었지만, 부친이 사업가여서 크게 부족한 것 없이 살았죠. 한국전쟁 직후였으니 당시 우리나라에는 공부할 수 있는 여건 자체가 부족했어요. 아버지가 나를 일본으로 보내셨죠.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면 앞으로 할 일이 많을 거라고 했어요. 하지만 돌아와 보니 상황은 오히려 안 좋았어요. 군사정권이 들어섰으니까.”
어르신은 《사랑과 인식의 출발》을 손에 들고 가볍게 표지를 만지면서 말했다. 책만큼이나 오래된 이야기였다.
일본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청년은 번역 문학을 펴내는 출판사에 취직했다. 청년은 아버지의 말을 기억하며 책이야말로 앞으로 이 나라를 위해 꼭 필요한 사업이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았어요. 우리 회사에서 펴내는 책들 대부분이 정부에서 금서 처분을 받았거든요. 대단한 내용도 아니었는데 말이죠. 외국 사람이 쓴 가벼운 철학 개론서나 역사책, 경제학책도 이상한 기준에 트집이 잡혀 서점에 나가보지도 못한 채 폐지가 되는 일이 허다했어요. 속상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더군요. 너무나도 큰 벽이었어요. 그때는 그랬답니다. 그 시절을 어찌 살았는지 몰라…….”
“맞서 싸우거나, 그런 성격은 아니셨군요?”
“싸우다니?” 어르신은 눈을 크게 떴다. “1960년대랍니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는 시절이었어요. 나는 한국전쟁 때보다, 차라리 그때가 더 공포스러웠어요. 싸운다는 건 생각조차 못 해요. 머리를 비우고 바보처럼 산다면 그보다 편했던 때도 없었을 거예요. 하지만 공부한 사람이 살아내기에는 너무 비참했어요. 읽고 쓰는 자유가 전혀 없었으니까요.”
옛 생각을 하는지 어르신은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책을 내게 보여주면서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책이 없었다면 나는 자살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귀한 책이에요, 나한테는.”
어르신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나도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힘든 시기에 이 책을 읽고 기운을 얻으신 거로군요?”
어르신은 내 말을 듣더니 껄껄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아니, 아니지. 미안합니다. 내가 너무 거창하게 말을 했구먼. 사실 그 정도로 대단한 책인지 나는 잘 몰라요. 집중해서 읽은 것도 아니니까.”
이번에는 내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좀 이상하네요? 그러면 이 책을 오랫동안 찾아다닌 이유가 뭔가요? 제대로 읽은 책도 아니라고 하시면…….”
“이제부턴 좀 재밌는 이야기니까 들어보시구려.” 어르신은 여전히 책을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말을 이었다.
“출판사 일을 그만두고 한동안 두문불출했어요. 우선은 부모님이 걱정이 많으셨죠. 방 안에서 뒹굴며 불효자식이 될 수는 없으니까 은행원으로 취직했습니다. 사실 이건 나와는 맞지 않는 일이었어요. 종일 의자에 앉아 주판을 튕기고 있자니 이 또한 괴로웠습니다. 하루하루가 고역이었지요. 그렇게 한 1년 지냈을 거예요. 내게도 봄날이 찾아왔지요.”
‘봄날’이란 연애를 의미하는 말이었다. 청년이 서서히 은행 생활에 적응하고 있을 무렵, 같은 지점에서 일하는 예쁜 여직원이 호감을 보인 것이다. 당연히 청년의 오해일 수도 있다. 그 여직원이 모든 사람에게 한결같이 친절한 성격일 수도 있다. 청년은 즐거운 고민에 빠졌다. 죽을 것같이 힘들었던 출근 시간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그 여성분에게 마음을 전하고 싶은데 도무지 방법이 없는 거예요. 지금이야 휴대전화가 있으니까 가볍게 전화번호를 물어보거나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때는 직접 얘기하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잖아요? 고민을 거듭하다가 연애편지를 쓰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무리가 있었어요. 연애편지라는 걸 써봤어야죠. 퇴근하고 집에 와서 며칠 동안 종이를 얼마나 많이 버렸는지 몰라요. 시작하는 첫 문장조차 못 쓰겠더군요. 밤에 썼다가 아침에 찢어버리고, 점심시간에 몇자 끄적거렸다가 퇴근하고 읽어보면 너무 바보 같은 문장이라 자신에게 화가 날 지경이었어요.”
청년은 머리를 식힐 겸 일이 없는 주말 시내 서점에 나갔다가 운명처럼 《사랑과 인식의 출발》이라는 책을 발견했다. 첫 장을 펼치는 순간 책에 빠져들었다. 책 내용이 좋아서라기보다, 자기가 연애편지에 쓰고 싶었던 멋진 사랑의 문장이 거기 다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책은 마치 초보자를 위한 연애편지 참고서 같은 느낌이었어요. 누가 볼까 부끄러워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얼른 책을 계산해서 집으로 뛰어왔죠. 연애편지라는 건 원래 첫 부분 시작하는 게 어렵잖아요? 나는 그 책에 있는 문장 몇 개를 첫 부분에 인용하면서 편지를 쓰기 시작했어요. 그랬더니 다음 부분은 술술 써지더라고요. 새벽까지 편지를 쓰고 잘 접어 양복 안주머니에 넣었지요. 출근하면 기회를 보다가 슬쩍 꺼내 건네줄 생각이었어요. 결론은, 작전 성공이었어요. 그날 점심시간이 지나고 나서 휴게실에 둘만 있게 됐을 때 편지를 여성분 손에 쥐여줬어요. 깜짝 놀라면서도 기쁨이 가득한 그 표정이라니! 수십 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잊히지 않아요.”
어르신은 책을 펴더니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청년은 바로 그 문장을 편지에 인용했다. 어르신은 그 부분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르신은 작은 목소리로 그 문장을 읽었다.
“둥그스름한 푸른 하늘은 우리들 머리 위에 덮여 있고 햇빛을 받은 흰 구름은 정처 없이 떠돈다. 영원의 시간이 발걸음을 죽이고 사뿐히 옮겨 가는 것을 느낄 때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걷잡을 수 없는 쓸쓸함이 그림자처럼 드리울 것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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