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지난 5년간 우리는 40년 전 촬영된 사진 속 한 사람을 찾았다. 1980년 5월 광주에 있었던 그는 중앙일보 이창성 기자가 촬영한 사진 27장, 합동통신 최종현 기자의 사진 6장, 동아일보 황종건 기자의 사진 5장, 경향신문 정남영 기자의 사진 2장, 전남일보 신복진 기자의 사진 1장, 일본 『세카이』世界 지에 실린 촬영자 미상의 사진 1장, 그리고 2019년 12월 처음 일반에 공개된 계엄군 보안사령부 사진첩에 실린 촬영자 미상의 사진 5장에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누군가의 표현에 따르면 그는 5·18 항쟁 당시 가장 유명한 무명인이었다.
사진 속 인물의 성이 ‘김’ 씨였다는 것을 기억해 낸 사람은 광주 동구 서석동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주옥 선생이었다. 2015년 5월, 사진을 본 주옥 선생은 사진 속 인물이 동네에서 ‘김군’으로 불린 넝마주이 청년임을 알아봤다. 공교롭게도 불과 며칠 전, 사진 속 인물의 정체를 둘러싼 논쟁이 점화된 터였다. 우리는 주옥 선생의 증언과 이창성 기자가 촬영한 사진을 기반으로 사진 속 인물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북한특수군 ‘제1광수’라는 낙인이 붙여진 채 온라인을 떠도는 사진 속 얼굴에 제 이름을 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30여 년이라는 시간의 변수를 간과한 우리의 탐문 과정은 처음 생각처럼 녹록치 않았다. 사진 속 얼굴이 낯익다고 말하는 이들은 꽤 많았지만,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만날 수 없었다. 퍼즐의 몇 조각을 겨우 맞추고 나면 한동안 방향을 잃고 정처없이 헤매야 했다.
지난한 탐문 과정에서 영화 제작진은 100여 명의 생존자들을 만났다. 그들 가운데는 반복적인 언론 인터뷰 응대에 익숙해져 증언록의 내용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5·18의 기억에 대해 지난 수십 년간 침묵의 태도를 고수해 온 이도 있었다. 우리는 생존자들을 만날 때마다 어김없이 항쟁 당시 촬영된 옛 사진들을 보여줬다. 사진을 묵묵히 바라보던 중년의 얼굴을 보면서, 그들의 더듬거리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우리는 김군이 당시 마주했던 1980년 5월 광주의 풍경과 그가 느꼈을 감정을 어림잡아 헤아릴 수 있었고, 여전히 그때를 현재로 살아가는 생존자들의 아픔을 미약하나마 느낄 수 있었다.
김군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만난 여러 생존자들의 마음이 관객에게 조금이나마 가 닿길 바라며 영화 〈김군〉을 완성했고, 영화에 미처 담지 못했거나 드러내지 못한 이야기들을 정리하는 작업의 필요성을 일깨워주신 강소영 편집자님의 제안으로 책을 썼다.
2014년 봄, 처음으로 우리를 맞아 주신 주옥 선생님부터 2018년 봄, 어렵게 마지막 증언을 해주신 최진수 선생님에 이르기까지, 내밀하고 고통스러운 기억을 용기 내어 공유해 주신 모든 생존자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귀중한 사진 자료를 흔쾌히 제공해 주신 이창성 기자님과 나경택 기자님, 함께 영화를 만든 제작진, 영화와 책이 완성되기까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께도 감사드린다. 앞으로도 오월의 기억을 환기하는 작업들이 계속되길 바란다.
1부
한 장의 사진
2014년
내가 언제 5·18을 처음 알게 됐는지는 확실치 않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닐 무렵 체포된 전두환, 노태우 씨가 하늘색 옷을 입고 재판 받는 모습을 텔레비전에서 접했던 기억은 나지만, 즐겨 보던 드라마나 만화를 보기 위해 시야에 넣을 수밖에 없었던 배경화면 정도로 남아 있다. 중학생 때 박정희 정권이 추진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험 범위에 포함돼 공부한 기억은 나지만, 교과서 말미에 몇 줄로 등장했을 5·18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억이 남아 있지 않다. 오히려 어릴 때부터 집 서가에 있었던 사진집 『광주, 그날』에 실린 피 흘리는 사람들, 총 든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이상하고 무섭다는 느낌을 받았던 순간이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여기에 ‘김군’의 얼굴도 포함돼 있었다는 사실을 안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었다.
2014년 3월 10일, 나는 독일의 창작 집단 리미니 프로토콜의 공연 〈100% 광주〉의 제작 과정을 기록하는 촬영 스태프로 고용돼 광주에 갔다. 2014년 4월 광주에서 초연된 이 공연은 도시에 사는 시민들의 인구통계학적 자료성별·연령·계층·계급·혼인 여부를 바탕으로 선정된 100명의 시민들이, 자기 자신으로 출연하는 다큐멘터리 연극이었다. 나는 안지환 씨영화 〈김군〉의 조연출와 함께 실질적인 공연 준비 과정과 공연에 참여한 광주 시민들의 일상을 기록하는 일을 맡아 촬영했다. 우리는 이 작업이 매일 반복적으로 이뤄지는 각자의 사소한 몸짓들을 연결해 도시를 조망하는 작업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4월의 첫째 날 아침, 조선대학교병원 근처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주옥 씨를 만났다. 20여 년간 세탁 일에만 전념해 온 그는 희끗희끗한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손님들이 맡긴 옷을 세탁기에 돌리고 바짓단이나 치맛단 등을 수선하는 평소 모습을 그대로 찍을 생각으로, ‘평소 혼자 있을 때처럼’ 일해 달라고 부탁했다. 얼마간 일에 전념하던 주옥 씨는 곧 카메라 뒤에 선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처음에는 관조적인 촬영 원칙을 흔든 그의 목소리가 당황스러웠지만, 우리는 이내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는 소금 간을 한 주먹밥을 빚어 시민군들에게 전했던 1980년 5월의 기억부터,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조선대학교 축제 때면 들려오는 폭죽 소리가 총소리처럼 느껴져 이불을 뒤집어쓰고 운 일까지, 누구에게도 터놓지 못했던 이야기를 낯선 우리에게 들려줬다. 어쩌면 영화 〈김군〉의 촬영 방식은 주옥 씨가 우리에게 말을 건 이날,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결정된 것 같다.
그로부터 2주 뒤, 광주에서 촬영을 이어 가던 어느 저녁, 세월호가 바다에 가라앉았다는 뉴스를 접했다. 이날 이후 한동안 광주 시민들의 일상은 이전 같지 않았다. 그즈음 만난 주옥 씨의 보험설계사인 주서윤 씨는 이런 분위기에서 사람들을 찾아가 보험 상품을 소개하는 일이 두렵다고 말하면서, 5·18 당시 수십 명의 사람들과 지하에 숨어 있을 때 들었던 군홧발 소리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때 그 기억 때문인지 그는 지금도 좁은 골목이나 공간에 들어서면 숨을 쉬기 어렵다고 말했다.
주서윤
이번에 큰 사건〔세월호 참사〕을 보면서도 마음이 안 좋은 게, 내가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않지만, 내가 직접 겪은 일은 아니지만, 광주에 큰 아픔이 있잖아요. 5·18 때도 젊은 친구들이 많이 그랬잖아요.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광주 사람들이 느끼는 게 타지 사람들보다 더 심하지 않을까 싶어. …… 이번에 전체적인 사무실 분위기가, 50, 60명 되는 사람이 밖으로 활동을 못 나가는 거야. 고객들하고 약속이 되어 있어도. 그런 아픔들이 있는 거야. 마음이 많이 안 좋죠. …… 어렸을 때 눈으로 직접 본 건 아니지만 5·18 때 저는 할머니랑 국민학생 때 아마 화순 쪽에 가깝게 갔던 것 같애. 더 위험했던 거지. 가서 보니까 지하실인 것 같애. 앞뒤는 다 기억이 안 나고 캄캄한 데서 사람들이 많고 구둣발 소리가 들리고, 그다음에 어른들이 무슨 얘길 했었냐면 아마 대학생들이 있었나 봐. 와서, 누구 집 아들을 찾으면 일단은 계엄군에 갔다고 해라, 왜냐면 그쪽에서 찾으러 오나 봐. 대학생들은 대부분 시위대로 나갔겠지. 근데 계엄군에 나갔다고 얘기하라고. 우리가 안에서 갇혀 있을 때, 『안네의 일기』 그런 느낌 아니었을까 싶어요. 캄캄하니까, 답답하니까 애들이 꼬맹이들이 울어. 우는 소리. 그러다 어느 순간 잠이 들었던 것 같애. 근데 그런 공포가 지나 놓고 내가 거기를 들어가고 나갔던 과정은 전혀 생각이 안 나요. 다만 그 짤막하게 잠깐의 한 시간 정도였겠죠. 그 생각밖에 없겠죠. 아침에 엄마가 오셨어. 오셔서 우리가 더 위험한 쪽으로 왔다. 광주천 쪽에 사람들 시체가 많이 널브러져 있다더라. 전 정말 어렸을 때 전쟁 난 줄 알았어요. 보지는 못했어. 어떻게 집에까지 왔는지는 생각이 안 나. 다만 그 장면만 생각이 나는 거지. …… 제가 폐쇄된 공간에 대해서 공포증이 있어요. 익숙한 공간은 괜찮은데 문이 닫힌 공간에 혼자 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크게 있어요. 한번은 제가 어디 캄캄한 델 멋모르고 들어갔다가, 아 이렇게 사람이 죽겠구나 싶더라. 심장이 두근두근하고 현기증이 나는데, 저는 제가 왜 이런 공포증이 있는지 몰랐어요. 좁은 골목길을 못 지나가. 절 같은 데 가면 바위와 바위 사이에 동굴 같은 데도 못 지나가. 한 번도 내가 왜 그런 공포가 있는지는 생각을 못 해봤어. 근데 이번에 100인 촬영을 하면서, 내가 왜 도대체 이런 공포가 있는지를 우연히 안 거야. 폐쇄된 공간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하면, 그 기억밖에 없는 거지. 아마 그때부터 시작된 게 아닌가 싶어.
― 인터뷰, 2014/04/22
주옥 씨는 세월호 참사 당일 셋째 아들이 제주도행 세월호 탑승권을 예매했다가 일정이 지연돼 타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참사 한 달 뒤인 2014년 5월 16일, 주옥 씨 부부와 함께 망월동 묘역에 처음 방문했다. 이날 묘역을 향해 걸어가던 주옥 씨가 갑자기 묘지를 등지고 서더니 눈물을 흘렸다.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마음을 진정시킨 그는 30년이 지나도록 한번도 이곳을 찾지 못한 것이 너무 미안하다고 말했다. 돌아가신 분들의 영정이 놓인 유영봉안소에서 꽤 오랜 시간 액자 속얼굴들을 살펴본 그는 그중에 기억나는 얼굴은 없다고 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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