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지배·강제 연행과
조선인 원폭 피해자
시작하며
본래 원폭 피폭자原爆被爆者는 일본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히로시마広島와 나가사키長崎에서 피폭된 사람 중 약 10%는 조선인이었다는 사실이 민간의 숱한 조사를 통해 밝혀진 바 있다. 일본 국민이 이러한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지 못하는 현실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바로 조선인 원폭 피해자가 일본의 조선 침략에 따른 희생자라는 역사 인식의 부족이다. 즉 조선의 식민지 지배와 강제 연행 정책의 결과로서 다수의 조선인이 원폭에 피폭되었다는 인과 관계를 먼저 깊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일본인 피폭자의 참화慘禍도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일본인 피폭자의 증언은 전부 ‘그날원자폭탄이 투하된 날’부터 시작되는 반면, 조선인 피폭자는 반드시 히로시마나 나가사키에 오게 된 ‘또 다른 그날’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점에 주목하면, 그 원통하기 짝이 없는 인과관계의 중대성을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1981년부터 본격적으로 나가사키 조선인 피폭자의 실태조사를 했던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長崎在日朝鮮人の人權を守る會, 이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의 대표 고故 오카 마사하루岡正治 씨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물리적인 피해는 똑같았을지라도, 조선인의 피폭은 (일본인의 그것과) 질적인 차원에서 다르다”고 지적한 바 있다. 여기서 “질적인 차이”란 “일본인 피폭자는 침략전쟁을 자행한 국가의 국민이라는 입장을 비껴갈 수 없지만, 조선인 피폭자는 아무런 전쟁책임도 없는데 원폭 지옥에까지 내던져진 완전한 피해자다”라는 오카 씨의 말 속에 단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인권을 지키는 모임’의 실태조사 보고서 『원폭과 조선인原爆と朝鮮人』 제1~7집도 원폭 피해의 참상에 관한 조사이기에 앞서, 강제 연행을 비롯해 조선인이 일본으로 오게 된 도일渡日 배경에 필연적으로 중점을 두며 결론을 도출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나 해당 지자체인 히로시마현県과 히로시마시市, 나가사키현과 나가사키시 모두 조선인 피폭자의 실태조사를 본격적으로 실시한 적이 없다. 일본인 피폭자와의 ‘질적인 차이’를 감안하면, 역사적 측면에서도 인도적인 측면에서도 무책임하기 이를 데 없으며, 이는 민족 차별의 결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폭 피폭자 원호援護 정책에서도 오랜 세월에 걸쳐 재외 피폭자在外被爆者를 배제해온 역사와 현상을 볼 때 이 점은 더욱 분명해진다. 재외 피폭자의 최대 다수가 남북한의 피폭자라는 사실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 같은 관점에서 강제 연행을 비롯한 도일 사정의 실태를 개관하고, 한국·조선인 피폭자가 싸워온 차별 철폐의 투쟁을 되짚어본 후, 그 도달점과 앞으로 남은 과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단계적으로 강화된 강제 연행
조선인 강제 연행은 1939년의 각의閣議 결정 ‘노무 동원 실시 계획労務動員実施計画’ 안에 포함된 ‘조선인 노무자의 내지 이주에 관한 건朝鮮人労務者內地移住に関する件’같은 해 7월, 내무성·후생성 양 차관 통첩에 따라 개시되었으나 중일전쟁의 격화로 인해 노동력 부족에 빠진 산업계가 강력하게 요청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일본인 청년을 대량으로 전장에 보내는 한편, 그로 인한 결손을 보충하기 위해 국가권력과 기업이 결탁해 조선인 청년을 강제 연행하고 탄광, 광산, 철강, 조선, 토목, 건설, 군사 등의 시설에서 강제 노동을 시킨 것이다. 일본으로의 도항 제한을 폐지하면서 개시한 강제 연행이었는데, 그 형태는 ‘모집’, ‘관 알선’, ‘국민징용’의 3단계를 밟으며 강화되었다.
1. 도항 제한 정책 시기의 도일
재일조선인의 증가를 실업문제의 원인으로 규정한 부당한 정책 때문에 1925년 이후 조선인의 일본 도항은 엄격하게 제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항자는 매년 증가했고 대다수는 농민이었다. 1910년대의 ‘(조선)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토지를 빼앗기고, 1920년대의 ‘산미증산계획’에 의해 더 심하게 토지와 쌀을 수탈당한 농민은 극도의 빈곤에 빠졌고, 살기 위해 잇달아 고향을 떠나 일본이나 중국 동북부, 시베리아 지방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막상 일본에 와보니 ‘내선일체’나 ‘황국신민’과는 모순되게 조선인에게는 이동의 자유도 없었고 ‘도항증명서’까지 요구받았다. 이 증명서는 주재소에 여러 번 찾아가 부탁해도 손에 넣기 쉽지 않았다. 또 일본 정부는 일본으로의 도항을 억압하기 위해 주로 위만주국偽滿洲國이나 중국 동북부 간도間島 지방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강력하게 밀어붙였고, 이로 인해 여러 비참한 사건을 초래한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2. ‘모집’이라는 이름의 강제 연행
1939년 7월부터 시행된 ‘모집’은 감언일 뿐, 결코 정당한 행위가 아니었다. ‘계약’이라는 형태는 취했지만 계약은 지켜지지 않았다. 대체로 사기죄나 유괴죄가 성립하는 불법해위였다는 것을 다수의 증언이 증명한다. 또 기업의 모집인은 장소를 불문하고 자유롭게 ‘모집’한 것이 아니다. ‘모집’ 희망 인원을 후생성에 신청하여 허가를 받으면 할당된 지역에 한정하여 ‘모집’이 이루어졌다. “일본에 가면 놀면서 밥도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감언과 사기는 생활고에 허덕이던 농촌에서 당초 절대적인 효력을 발휘했으나, 가혹한 노동 현장과 열악한 생활환경, 그에 더하여 일상화된 폭력적 지배 상황이 알려지면서 ‘모집’에 응하는 사람도 점차 감소했다. ‘모집’ 인원을 채우지 못하면 관헌이 개입하여 대상자를 압박하는 방식으로 일을 진행한 것도 악질적이라 할 수 있다.
3. ‘관 알선’에 의한 강제 연행
1942년이 되자 ‘모집’은 완전히 교착상태에 빠졌다. 그리하여 2월부터 시작된 새로운 단계가 ‘관 알선’이다. 면사무소가 경찰과 결탁해 직접 지명하여 조선 청년들에게 일본에서의 노동을 강요한 정책이다. 면사무소는 당연히 가족 구성원을 전부 파악하고 있었다. 대상자는 독신 청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알선’은 사실상 명령을 의미하며, 실체를 숨기기 위한 표현에 불과했다. 관리와 경찰관이 트럭으로 다짜고짜 연행했다는 증언이 끊이지 않았다. 이 시기의 강제연행과 익숙지 않은 중노동, 고문, 도망 그리고 남겨진 가족의 생활고에 대한 증언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학살 사건도 적지 않았다는 사실이 증언과 연구자의 추적에 의해 밝혀지고 있다.
4. 징용에 의한 강제 연행
‘관 알선’은 사실상의 명령이었고, 납치 같은 방식의 연행도 빈발하였지만 법적인 강제력은 없었다. 그런데 1944년 9월부터 최후의 수단으로서 징용령은 출두 시기와 장소를 영장으로 지정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그러나 이 절대적 명령 방식인 징용만이 가장 가혹하며, 이 시기 이후의 징용에 대해서만 강제 연행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연행의 실태를 고의적으로 축소하는 잘못에 해당한다. “징용은 빠져나갈 구멍이 있다”는 말처럼 출두를 거부하고 도주할 틈도 있었기 때문에, 징용이 가장 가혹했던 것이 아니다. 모집, 관 알선, 징용의 3단계 모두 강제 연행에 해당하며, 단계를 불문하고 ‘징용’이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나가사키로의 강제 연행도 그 냉혹한 실태를 증명해준다. 14세에 하시마端島 즉, 군함도로 연행된 서정우 씨는 ‘관 알선’의 시기에 농사일을 하던 중 관리와 경찰관에게 즉각 연행을 통보받고 뒤따라 온 할머니와도 강제로 생이별을 당했다. 미쓰비시三稜 조선소로 징용 시기에 연행된 김순실 씨는 영장을 보고 외가로 피신했다. 하지만 수색에 나선 관헌에게 붙잡혀 구타를 당하고 머리도 빡빡 밀리는 굴욕을 당하며 기업으로 인계되었다. 이는 징용을 피해 도망치는 일도 결코 쉽지는 않았다는 증거다. 경찰관에게는 징용령 위반자에 대한 수색, 체포, 기소 등의 권한만 있었다. 관리가 불법한 인계 과정에 관여하는 것은 월권행위였다. 관헌의 이러한 직무 권한을 벗어난 일탈행위는 강력한 모집과 관 알선 사례에서도 현저히 눈에 띄며 이 경우는 체포, 협박, 강요 등의 범죄를 관헌 스스로 범한 것이 된다. 그러나 처벌받은 사람은 없다. 이와 같은 이상한 실태는 위법행위를 ‘직무’의 일환으로 생각한 무법 상태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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