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시작
『겐지 이야기』를 읽는 소녀
‘책은 혼자서 묵묵히 읽는다. 자발적으로, 대개는 자신의 방에서.’
이것을 지금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독서라고 한다면, 이렇게 책을 읽는 방식이 일본에서는 언제 시작되었을까?
아마도 이때쯤이라고 그 시기를 짐작케 하는 기록 두 개가 남아 있다.
하나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의 「서재기書齋記」라는 짧은 수필로서 9세기 말 무렵, 헤이안平安, 지금의 교토으로 천도한 지 100년 후에 쓴 것이고, 또 하나는 잘 알려져 있는 『사라시나 일기』更級日記, 헤이안 시대 중기에 쓰인 회상록. 작자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5세손인 스가와라노 다카스에의 차녀 스가와라노 다카스에노무스메다. 시골에서 자란 중급 귀족의 딸이 친척 여성에게서 『겐지 이야기』源氏物語, 일본 헤이안 시대 중기에 쓰인 장편소설. 작자인 무라사키 시키부의 생애 유일한 작품이다. 주인공인 히카루 겐지를 통해 연애, 영광과 몰락, 정치적 욕망과 권력투쟁 등 헤이안 시대의 귀족 사회를 그렸다 전질을 받아 넋을 잃고 탐독한 후 가장 사랑하는 한 구절을 포함한 회상록을 집필한 것이 11세기 중엽이었다.
이 두 개의 문장을 보면, 지금 우리가 보통 ‘독서’라고 부르는 행위가 일본에 뿌리내리기 시작한 것은 대략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혈족인 스가와라노 다카스에노무스메菅原孝標女, 다카스에노무스메는 ‘다카스에의 딸’이라는 뜻으로 본명 대신 이 지칭어로 알려져 있다에 이르는 150년 사이의 기간이지 않을까 추측된다. 나는 전문가가 아니므로 엄밀하게는 말할 수 없다. 우선 헤이안 시대 중기쯤이라고 가늠해두자. 우선이라고 말한 것은, 안타깝게도 일본 내에는 초보자인 나를 확실히 도와줄 만한, 전문가가 쓴 독서 통사류의 서적이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는 나중에 다루기로 하고, 먼저 『사라시나 일기』에 나오는 내용, 즉 생각지도 않게 염원하던 『겐지 이야기』를 갖게 된 열세 살 소녀가 “낮에는 온종일, 밤에는 잠이 들지 않는 한 등불을 밝혀” 그것을 탐독했다는 바로 그 장면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나 자신도 그랬지만, 중학교나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저 구절을 처음 대하고서 사람들은 대부분 ‘흠, 나하고 똑같구나’ 하고 살짝 감동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아무 생각 없이 오늘까지 그냥 그대로 흘러오지 않았을까? 선생님들도 그 이상의 것은 특별히 가르쳐주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저 작은 명장면이야말로 일본인이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책을 읽게 된, 가장 이른 시기의 독서 현장의 기록이다. 아래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는 곳을 다케니시 히로코竹西寛子의 현대어 역에서 인용해둔다.
지금까지 띄엄띄엄 아주 조금씩 읽었을 뿐 그다지 납득도 가지 않아 안달복달하던 겐지의 이야기이지만, 그것을 제1권부터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방 안에 파묻혀 한 권 한 권 꺼내 읽어가는 그 기분, 황후의 자리 같은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이 문장을 쓴 스가와라노 다카스에노무스메가 『겐지 이야기』를 읽은 때가 1021년 무렵이다. 10년 가까운 시간을 들여 써온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의 대장편소설이 겨우 완결된 것이 그보다 약 10년쯤 전이었다.
무라사키 시키부는 쓸 때마다 한두 장씩 친한 지인들에게 읽혀서 그 반응을 보아가며 써내려갔다고 한다. 그것이 너무나 재미있다고 소문이 나, 같은 직장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道長의 딸이자 이치조 천황一条天皇의 황후였던 아키코彰子의 처소에서 일하던 시녀女房들이 자신이 직접 필사하거나 글씨를 잘 쓰는 지인들에게 부탁하여 잇달아 사본이 만들어졌다.
다만 당시에는 독자들이라고 해봐야 이치조 천황이나 극소수의 귀족 등으로서, 평소에는 중국에서 도래한 유교 서적이나 불교 서적, 역사서나 한시문만 읽느라 여성용인 히라가나로 쓰인 부드러운 이야기 등은 바보 취급하던 남자들을 포함해 겨우 100명 정도였다. 하지만 그 재미가 시녀 집단의 바깥에까지 소문이 났고, 그 무렵이 되면 『사라시나 일기』의 작자와 같이 지방에서 생활하는 중급 귀족의 딸까지 그 평판을 듣고 가슴이 설레곤 했던 것이다.
중급 귀족이라 한 것은, 아버지 다카스에가 실무 관료로 출세했다고 할 수는 있지만 기껏 수령지방장관에 그쳤고 그다지 화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관직의 지위는 그다지 높지 않았지만 사실 다카스에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로부터 5대째가 되는 ‘학자 집안’의 후예로서, 그 자신도 학자나 한시인으로 널리 세상에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게다가 그의 아내, 즉 다카스에노무스메의 큰어머니는 『청령일기蜻蛉日記』헤이안 시대의 여성 일기, 954~974년의 일이 쓰여 있고, 975년 전후에 나왔으리라 추정된다로 유명한 후지와라노 미치쓰나노하하藤原道綱母, ‘미치쓰나의 어머니’라는 뜻으로 다카스에노무스메처럼 지칭어로 알려진 경우. 더욱이 또 한 사람의 아내다카스에노무스메의 계모의 숙부는 다름 아닌 무라사키 시키부의 외동딸인 가타이코賢子와 결혼했다고 하니 실로 대단한 집안이었다. 『사라시나 일기』의 서두에는 “분명히 아주 많이 촌스러웠을 것”이라고 자주 비하하고 있지만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적어도 문학적으로는 보통 사람 이상으로 혜택 받은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다. 작자 자신도, 내가 이처럼 이야기를 좋아하는 여자가 되어버린 것은 아무래도 어릴 적부터 계모와 요절한 언니에게 받은 영향이 매우 큰 것 같다, 라고 쓰고 있다.
음독인가
묵독인가
하지만 그런 소녀를 현재 우리 독서 스타일의 ‘원조’라고 간주하기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그중에서 가장 큰 것이 ‘묵독’이다.
앞의 인용문에서 본다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방 안에 파묻혀”라는 한 줄. 그걸 읽으면 다카스에노무스메가 ‘혼자서 묵묵히 읽는’ 타입의 여성이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여겨진다. 그렇지만 그녀는 도대체 어느 정도로 당시의 ‘독서하는 여성’ 들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을까? 바꾸어 말하면, 그녀가 살던 사회에 묵독의 습관은 어느 정도의 넓이와 깊이로 정착되어 있었을까?
이 점을 둘러싸고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郞나 엔치 후미코円地文子의 『겐지 이야기』 현대어 번역에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진 헤이안 시대 문학 연구자 다마가미 다쿠야玉上琢弥가 『겐지 이야기 연구源氏物語硏究』에서 펼친 ‘겐지음독론’을 계기로 195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쳐 연구자들 사이에서 큰 논쟁이 벌어졌다.
물론 다마가미는 음독파다. 본래는 ‘구술로 이야기되는 것’이었던 이야기를, 9세기 후반에 『다케토리 이야기』竹取物語, 헤이안 시대 초기에 성립된 일본의 이야기물. 작자 및 연도 모두 미상가 나올 무렵부터 남성 지식인들이 문자로 표기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정교사 역을 하던 시녀가 자기가 일하던 댁의 따님에게 구술로 읽어주었다. 그 전통이 『겐지 이야기』의 시대에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을 것이라고 다마가미는 강하게 주장했다. 즉, 이야기는 묵독이 아니라 음독이 기본이다. 그런 이상, 혼자서 묵묵히 읽는 『사라시나 일기』의 저자를 ‘이야기 애독자의 전형’이라고 간주해버리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오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듯 대담한 논의였기 때문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사람도 적잖았다. 그중 한 명이 사이고 노부쓰나다. 그는 『일본고대문학사日本古代文學史』와 『겐지 이야기를 읽기 위하여』源氏物語を読むために, 이 책은 훨씬 더 후에 쓰인 것임 등의 저작에서 헤이안 시대의 이야기 문학을, 다마가미가 말하는 전대의 ‘구전하는 이야기물’의 연속으로서가 아니라 생겨난 지 얼마 되지 않은, 히라가나를 사용하여 여성들이 쓴 “산문문학의 맹아”라고 규정했다.
시녀들의 음독에 의해서는 간단한 스토리 정도밖에 전해지지 않는다. 그에 비해 새로운 산문문학, 특히 무라사키 시키부가 만들어낸 형식의 이야기에서는 스토리뿐 아니라 종종 그 이상으로 복잡한 심리의 표현, 섬세하고 우아한 감각, 일상생활의 세부 내용, 때로는 간통을 포함한 잡다한 풍문, 비트는 의미가 담긴 문학 담론 등이 주요한 포인트가 된다. 요컨대 “헤이안 시대의 이야기의 본성”은 음독이 아니라 “그것이 문자로 쓰인 문예이고, 아무튼 방 안에서 그 문자를 좇아 읽히는 것”이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사이고는 이어서 이렇게 주장한다.
(즉) 문제는 흔히 작품의 질에 있으므로 그러한 질을 생각하면 (…) 『사라시나 일기』의 작자야말로 오히려 『겐지 이야기』를 읽는 독자의 전형이었다고 하는 편이 적확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또는 그 여성은 그러한 독자로서 『겐지 이야기』를 발견하고 경험한 것이라고 바꾸어 말해도 좋다.
단순히 수동적으로 듣고만 있던 것이 아니다. 이런 개인적이고 집중적인 독서 방식이 아니면 충분히 즐길 수 없는 새로운 성격의 문학이 일본에, 그뿐 아니라 더 널리 인간세계에 처음으로 출현했다. 이것이 사이고의 관점이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