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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연에서 주연이 된 최초의 화장품
박가분
대한민국 최장수 기업의
밑바탕이 되다
‘배오개의 거상.’ 지금의 종로인 배오개에서 포목점으로 큰 성공을 일군 박승직을 일컫던 말이다. 보부상으로 시작한 그는 제물포에서 면포 등을 떼어 경기도 산간지방과 강원도까지 오가며 판매한 돈을 밑천 삼아 1896년 ‘박승직상점’을 개설한다. 이때는 1894년부터 시작된 갑오개혁으로 그동안 비단, 면, 종이 등 주요 품목 독점권을 가졌던 육의전이 폐지되면서 일반인들도 자유로운 상업활동이 가능해진 시기였다. 이런 흐름 속에 자신의 상점을 개설한 그는 종로 일대 한인을 대표하는 거상으로 성장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기업인 두산그룹이 출발하는 순간이었다. 사실 엄격히 따지자면 박승직상점을 계승한 두산상사는 1998년 소멸된 법인이기 때문에 기업 자체로만 보면 동화약품이 가장 오래된 기업이어야 한다. 하지만 박승직상점을 토대로 지금의 두산이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대한민국 최고最古의 기업으로 인정하는 데 무리는 없어 보인다. 이런 측면을 감안해 한국기네스협회에서도 가장 오래된 기업으로 인증한 바 있다. 브랜드의 연속성으로 보면, 창립할 때의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는 활명수의 ‘동화’가 더 오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원래 박승직상점은 비단이나 면포 같은 옷감을 주로 취급하는 포목점으로 시작했지만 우연한 계기로 ‘분’을 만들게 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화장품 기록을 쓰게 된다. 지금의 두산은 중공업 중심의 사업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초기에는 오비맥주를 비롯한 식음료와 생활소비재, 유통 중심이었는데, 그 첫 시작은 의외로 화장품이었다.
어느 날 친척집에 방문한 박승직의 아내 정정숙은 할머니께서 흰 가루를 종이봉지에 싸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분가루라는 설명을 듣고 찾는 사람이 많은가 물었더니 할머니는 “예뻐지기 싫어하는 여인도 있나?”라고 대답했다. 어찌 보면 화장품 사업의 본질을 명쾌하게 설명한 한마디인데, 이 말을 들은 정정숙은 부업 삼아 백분을 만들어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포목점 손님들에게 덤으로 끼워주는 정도였는데, 하나둘 사람의 손을 타면서 잘 발라지고 사용하기 간편한 화장품으로 입소문을 타며 인기를 끌자 아예 십여 명의 직원을 고용해 본격적으로 대량생산에 나선다. 그러면서 여기에 남편의 성을 따 ‘박가분’이라 이름 붙였다. 1920년에는 ‘박朴’ 자를 동그라미 안에 넣어 만든 상표와 함께 특허청에 정식상품으로 등록, 국산 화장품 1호라는 기록을 갖게 된다.
박가분 이전에 화장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쌀즙을 말린 가루를 물에 개어 바르던 분백분 등이 있었는데, 접착력이 약해 얼굴에 잘 붙지 않는데다가 비린내까지 풍겼다고 한다. 그나마 아주 오래 전부터 내려온 분꽃의 씨앗을 빻아 만든 가루나 칡을 말려 갈아 쓰던 것보다야 나았지만,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반대로 서양에서 들어온 화장품은 일반 가정집 여인이 쓰기에는 가격이 부담스러웠다. 전통 백분은 사용이 불편했고 외제 분은 귀한 상황에서, 사용하기 편리하게 만들고 품질도 좋으면서 더군다나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었으니 화제와 인기는 당연한 결과 아니었을까.
조선 최고의
메가 히트 브랜드
박가분이 인기를 모았던 것은 화장 효과나 저렴한 가격 때문이기도 했지만, 포장 방식에도 이유가 있었다. 당시에 분은 지금과 같은 액상 혹은 가루 파운데이션과는 달리 두께 3~4밀리미터 정도의 골패짝 같은 고체 형태였는데 박가분은 일반적 백분보다 두 배 정도 두껍게 만들어서 작은 갑에 포장해서 판매했다. 기존 백분이 대부분 흰 종이에 싸서 팔았던 것에 비하면 두꺼운 상자에 담아 당시로서는 멋지게 디자인된 라벨까지 붙어 있는 박가분은 단연 차별화되었던 제품이었다.
여기에 당시 사회 인식의 변화도 한몫했다. 원래 “눈가치 흰” 튀는 화장은 기녀들 같다고 외면 받는 풍토였지만, 1920년대 들어 뽀얗고 창백한 느낌을 주는 일본풍의 화장이 유행을 타기 시작했다. 실제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초 조선의 얼짱 기생으로 꼽히던 장연홍을 검색해보면 마치 일본 전통연극 가부키의 배우처럼 새하얀 얼굴을 한 모습을 찾을 수 있다. 뛰어난 외모와 노래, 춤 실력으로 큰 인기를 끌었던 그녀는 비누 광고에 모델로도 등장했는데, 지금으로 치자면 화장품 광고에 등장한 인기 절정의 연예인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특히 여성 미용 상품의 광고모델이라고 하면 당대 아름다움의 기준을 적용하기 마련이니 당시 흰 얼굴이 어느 정도 유행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런 풍조에 따라 백분을 찾는 수요는 계속 늘었고, 박가분 역시 초기에는 기생들 중심으로 퍼졌지만 빠르게 일반 여염집 여성들에게까지 사랑받는 상품으로 성장해갔다.
한 갑에 50전지금으로 치자면 약 5천 원 정도이라는 비교적 저렴한 가격도 도움이 되었다. 이런 큰 인기로 당시 박가분을 팔기 위해 전국의 방물장수들이 박승직상점으로 모여들었다는데, 잘 나갈 때에는 하루에 1만 갑이 넘게 팔릴 정도였다 하니, 우리나라 최초의 메가 히트 브랜드라 할 만하다.
박가분이 인기를 끌자 이 패키지를 모방해서 ‘촌가분·서가분·장가분·설화분·서울분’ 등 비슷하게 생긴 모방제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 중에 1921년 출시된 ‘설화분’은 신문광고를 집행하며 박가분을 위협했는데 박가분과 마찬가지로 면포를 판매하던 동익사라는 포목점에서 출시했다. 초기 광고에는 한복을 입은 흰 얼굴을 한 여성을 일러스트로 표현했지만 그다음에는 짧은 머리의 서양 여성을 실사로 등장시켰다. 쪽진 머리에 여전히 한복을 입은 여성이 계속 등장했던 박가분에 비해 좀더 서구적인 느낌을 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박가분 광고에서는 두 가지를 신경 썼던 것으로 보이는데, 우선 한자 옆에 한글을 함께 표기해 여성 고객이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했다. “박가분을 바르시면 주근깨와 여드름이 없어지고 얼굴에 잡티가 없어져서 매우 고와집니다”라며 희고 깨끗한 얼굴을 열망하는 여성들의 마음을 콕콕 찌른다. 여기에 “경성생산품 품평회 심사장을 맡은 공학박사 최삼랑 씨의 심사상장을 받았”다는 사실을 더해 공인된 품질임을 강조하며 신뢰감을 주려고 한 것을 볼 수 있다.
국산 경쟁제품 외 품질 좋은 해외상품의 존재는 여전히 위협적이었다. 당시 조선 장업인들이 만든 백분을 흔히 ‘장분’이라고 칭했는데, 해외에서 수입된 백분은 ‘양분, 왜분’ 등으로 통칭했다. 일본 제품이 다수를 차지했는데 ‘별표 미美화장품·구라부グラブ 화장품·레도·호가·금학·자생당’ 등 다양한 상품들이 우수한 품질을 앞세워 조선 시장을 파고들었다. 당연히 이들과의 경쟁도 힘들었지만 박가분이 그 인기를 20년을 채 못 채우고 몰락하게 된 결정적 원인은 외부 경쟁요인이 아닌 내부에서 터져나왔다. 납 성분으로 인한 ‘유해성’ 때문이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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