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것들
인간에게는 부족 본능이 있다. 우리는 집단에 속해야 한다. 우리는 유대감과 애착을 갈구한다. 그래서 클럽, 팀, 동아리, 가족을 사랑한다. 완전히 은둔자로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수도사나 수사도 교단에 속해 있다. 하지만 부족 본능은 소속 본능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부족 본능은 배제 본능이기도 하다.
어떤 집단은 자발적이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다. 어떤 부족은 즐거움과 구원의 원천이고 어떤 것은 권력을 잡으려는 기회주의자들의 증오 선동이 낳은 기괴한 산물이다. 하지만 어느 집단이건 일단 속하고 나면 우리의 정체성은 희한하게도 그 집단에 단단하게 고착된다. 가령 개인적으로는 얻는 것이 없다고 해도 내가 속한 집단 사람들의 이득을 위해 맹렬하게 나서고, 별다른 근거가 없는데도 외부인에게 징벌적인 위해를 가하려 한다. 또한 집단을 위해 희생하며 목숨을 걸기도 하고 남의 목숨을 빼앗기도 한다.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집단 정체성은 ‘국가’가 아니라 인종, 지역, 종교, 분파, 부족에 기반을 둔 것들이다. 미국의 안보에 매우 큰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곳들에서도 그렇다. 그런데 미국은 이런 유의 집단 정체성에 대해 너무나도 아는 것이 없다. 적어도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국의 외교정책은 부족적 동학이 정치에 미치는 영향력을 놀라울 정도로 간과했다. 미국은 세계를 상호배타적인 영토를 가진 국민국가들이 ‘자본주의 대 공산주의’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 ‘자유세계 대 악의 축’과 같은 거대 이데올로기에 따라 대립하는 장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덧씌운 렌즈로 세상을 보면서, 미국은 세계 수십억 명의 사람에게 매우 강력하고 가장 유의미하며 모든 곳에서 정치적 격동의 주요인인, 더 원초적인 집단 정체성들을 번번이 간과했다. 이런 사각지대는 미국 외교정책의 아킬레스건이었다.
미국 역사상 (아마도) 최대의, 그리고 최고로 불명예스러운 패배였던 베트남전쟁을 생각해 보자. 이제는 잘 알려져 있듯이, 냉전 이데올로기의 안경을 쓰고 있던 미국은 당시 베트남 사람들이 ‘공산주의’에 맞서 싸우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하게 ‘민족국가의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과소평가했다. 하지만 전문가, 일반인 할 것 없이 대부분의 미국인이 오늘날까지도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 베트남 사람들 사이에서 맹렬히 증오를 사고 있었던 화교가 인구 비중은 1%밖에 안 되면서도 베트남 역사 내내 경제적 부의 70~80%를 장악해왔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베트남 ‘자본가’의 압도적인 다수가 화교였고 이들은 남베트남과 북베트남 모두에서 엄청난 혐오의 대상이었다.
정세 판단에서 인종·민족적ethnic 측면을 완전히 놓친 나머지, 미국은 베트남에서 미국이 친자본주의적 조치를 취하는 족족 거의 확실하게 베트남 대중의 분노를 촉발하게 되리라는 것을 보지 못했다. 베트남 사람들을 미국에 적대적으로 만드는 게 목적이었다면,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이는 미국 외교정책의 일관된 패턴이었다. 치명적이었던 사례를 한 가지만 더 들어 보자. 이라크전쟁 직전에 워싱턴은 이라크가 수니파와 시아파로 나뉘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분열의 중요성을 줄곧 과소평가했다. 또 이라크에서 부족 집단이 얼마나 중요하며 이라크가 국가로서 어느 노선을 가게 될지를 결정하는 데 얼마나 핵심적인 요인인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2017년에 전 미국 국무장관 콘돌리자 라이스는 미국이 “부족의 역할을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고 인정했다. 미국의 이라크 정책은 이라크에서 민주주의가 확산되고 시장경제가 부를 창출하면 인종, 부족, 분파적 분열이 자연스럽게 흩어져 없어지리라는 확신에 기반해 있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자유와 민주주의는 언제나, 또 어디에서나 증오의 슬로건보다 호소력이 크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라크는 격화되는 분쟁과 폭력의 소용돌이 속으로 떨어졌고 지금도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소수이나마 이런 위험을 경고하며 미국의 외교정책을 비판한 사람들이 있었다. 나도 그중 하나다. 2003년에 나는 《불타는 세계》라는 책에서 이라크에서는 “모든 것이, 심지어 자유와 부도 인종적, 분파적 파급 효과를 낳으므로” 인종적, 분파적 동학을 예의주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당시 이라크 집권당이던 사담 후세인 대통령의 바트당은 수니파였고 인구의 60%는 오래도록 억압을 받아 수니파에 매우 적대적이던 시아파였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도입되면 오랜 적대를 자극하는 촉매 역할을 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럴 경우, 민주적 선거는 통합된 이라크를 가져오기는커녕 수니파를 배척하는 시아파 정부가 들어서서 수니파에 대해 보복을 가하는 상황을 초래할 수 있었다. 나는 이런 상황이 온다면 ‘강한 반미 성향’을 가진 ‘막강한 근본주의 운동’을 일으키기에 매우 좋은 조건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불행히도, 정확히 그렇게 되고 말았다.
국내에서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지배 엘리트는 평범한 미국인 상당수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집단 정체성을 놀라울 정도로 무시하거나 간과한다. 자신이 돕고자 한다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렇다.
예를 들면,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운동은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한 운동이었지만 사실상 가난한 사람을 포함하지 않은 운동이었다. 주동자도 참여자도 상대적으로 특권층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노동자 계급 미국인은 ‘점령하라’ 운동에 참여만 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많은 이는 (다는 아니라 해도) ‘활동가 운동’에 매우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농촌 지역의 한 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보기에, 저항 운동이라는 건 거의 대부분 엘리트 계층의 지위 상징status symbol인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이 집회에 나간 사진을 노상 페이스북에 올리는 것이다. 자신이 저항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친구들이 다 알도록 말이다. 엘리트 계층이 가난한 우리를 대신해 저항에 나서준다고 할 때, 우리가 보기에는 도움이 안 되는 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를 또 하나의 ‘밈meme’으로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우리도 자존심이 있고, 그들의 자아 고결성을 입증하는 데 소품으로 쓰이고 싶지 않다.
‘점령하라’ 운동을 실제로 미국의 저소득층과 하층 계급에서 광범위하게 호응을 얻고 있는 운동들과 비교하면 엄청난 아이러니가 드러난다. 가령 ‘번영 복음prosperity gospel’은 미국에서 가장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운동에 속한다. 번영 복음은 부자가 되는 것이 신의 뜻을 따르는 것이며 정확하고 올바르게 기도를 하면 (그리고 십일조를 잘 내면) 신이 당신을 부유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가르친다. 오늘날 흑인과 히스패닉 노동자 계급 사이에서 번영 교회 신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미국에서 히스패닉 기독교 신자의 4분의 3이 ‘충분한 신앙심을 가진 모두에게 신이 건강과 금전적인 성공을 주실 것’이라고 믿는다.
내가 가르치고 있는 학과의 한 멕시코계 미국인 학생이 최근에 이런 이메일을 내게 보내왔다. 그의 가족은 지금 트럼프 행정부에 의해 추방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제가 보기에 번영 복음은 히스패닉인 제 가족이 명백하게 자신의 이익에 배치되는데도 불구하고 얼마나 반反오바마적, 친親트럼프적이 될 수 있는지를 설명해 주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생존 메커니즘입니다. 몇 주 전에, 엄마가 가장 좋아하시는 목사님이 트럼프 취임 연회 장면을 스냅챗으로 보내왔다며 그것을 제게 보내 주셨어요. 엄마는 엄마가 ‘신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트럼프가 환영받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셨어요. 저는 그 모습이 너무나 허탈하고 좌절스러웠지만요.
하지만 미국 엘리트 계층이 놓치고 있는 부족적 정체성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자 계급 사이에서 형성되고 있는 강력한 ‘반기득권 정체성’이다. 트럼프 당선에 크게 일조한 것도 바로 이 반기득권 정체성이었다. 그런데 선거 막바지까지도 양쪽 정치 진영 모두에서 엘리트학자, 여론조사 전문가, 언론인, 경제 분석가 등들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인종은 미국의 빈민을 갈랐고 계급은 미국의 백인을 갈랐다. 지금도 트럼프 당신의 배경이 된 부족적 정치를 많은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고 다음과 같이 어리둥절해한다. 어떻게 이토록 많은 미국의 노동자 계급이 트럼프에게 ‘사기를 당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저소득층 미국인들이 트럼프가 자신과 같은 부류가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할 수 있었을까?
미국 엘리트들이 놓친 점은 트럼프가 취향, 감수성, 가치관의 면에서 실은 백인 노동자 계급과 비슷했다는 사실이다. 부족 본능은 ‘동일시’가 시작이자 끝인데, 트럼프 지지자들은 본능적인 감정의 수준에서 자신을 트럼프와 동일시했다. 그들은 말하는 방식라커룸 토크, 옷차림, 직설적인 반응, 계속 들통나는 실수, 진보 매체로부터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고 충분히 페미니스트가 아니고 독서량이 많지 않다고 계속해서 공격받는 것 등 트럼프의 모든 것에 대해 동일시할 수 있었다. 백인 노동자 계급은 트럼프의 적이 곧 자신의 적이라고 느꼈다. 또한 트럼프의 막대한 재산도 동일시의 요인이었다. 그것이아름다운 아내와 자기 이름이 박힌 거대한 빌딩들도 함께 바로 그들이 원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노동자 계급 미국인에게, 기득권에 반대하는 것과 부자에게 반대하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었다.
부족 정치는 집단을 드러내는 표식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엘리트 계층과 나머지 사람들 사이에서 차이를 드러내 주는 표식은 늘 미학적인 요소와 관련이 있었다. 오늘날 미국의 엘리트, 특히 진보 쪽 엘리트는 자신이 얼마나 다른 이들에 대해 가치 판단을 내리려 하는지를 잘 인식하지 못한다. 그들은 조잡하고 싸구려 같은 것을 질색한다. 그런데 그 조잡하고 싸구려 같은 것들가짜 선탠, 화려한 머리, 프로레슬링, 큰 트럭 뒤에 매달린 크롬으로 만든 황소 성기 등은 대개 저소득층과 관련이 있고, 이는 우연이 아니다.
많은 엘리트 계층이 보기에 ‘애국심’도 그런 조잡한 취향이다. 적어도 ‘USA’를 연호하고 버드와이저를 마시면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 트럼프가 대선 때 사용한 구호 – 옮긴이 만들자고 외치는 데서 드러나는 애국심이 그렇다. 미국 엘리트 계층은 자신이 ‘부족적’인 것과는 정반대라고 믿는다. 그들은 자신이 보편 인류를 찬양하고 전 지구적, 코즈모폴리턴적 가치를 받아들인 ‘세계 시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바로 그 코즈모폴리턴주의가 얼마나 부족적인 것인지를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고학력이고 세계 여러 나라를 다녀 볼 수 있었던 사람들의 코즈모폴리턴주의는 사실 매우 배타적인 부족적 표식이다. 이 표식은 부족의 외부인을 매우 분명하게 가려낼 수 있게 해 주는데, 여기에서 외부인은 성조기를 흔드는 촌뜨기들이다. 전 하원의장공화당 뉴트 깅그리치Newt Gingrich는 2009년에 ‘나는 세계의 시민이 아니다’라고 말해서 즉각 비난의 대상이 됐다. 《허핑턴포스트》에 올라온 어느 글은 그가 ‘우월주의자’이고 ‘퇴행적’이며 ‘엘리트주의자’에다 ‘인종주의자’라고 비난하면서 이렇게 글을 맺었다. ‘깅그리치 씨, 당신이 이 세계의 시민이 아니라면, 젠장, 여기서 꺼져 버려요.’ 결코 포용적인 태도라고는 보기 어려운 말이다.
엘리트 계층이 촌스럽고 평범하고 ‘애국적’인 사람들에게 보이는 경멸보다 더 부족적인 것은 없을 것이다. 미국 엘리트 계층은 종종 미국의 빈민보다 세계의 빈민에 더 공감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들이 세계의 빈곤에 막대하게 일조한 부분들은 어느 것도 없애려 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아마도 세계의 빈민이 더 낭만화하기 쉽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평범한 미국인들은 또 그들대로, 엘리트 계층을 ‘진짜 미국인’에 대해서는 아는 것도 없고 관심도 없는 채로 저 멀리서 권력의 지렛대를 통제하는 소수 집단이라고 생각해서 몹시 혐오한다. 어느 면에서 미국의 엘리트 계층은 대다수의 미국인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고 심지어는 그것을 멸시했기 때문에 2016년 대선에서 판도를 완전히 잘못 파악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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