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1950년대: 손창섭 《비 오는 날》
한국전쟁의 폐허가 낳은 ‘너절한 인간’들의 한계와 가능성
1950년대를 대표하는 동시에 가장 이례적인 작가
20세기 후반 한국현대문학사에서 중요한 작가로 꼽히는 손창섭은 195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동시대의 작가들로는 황순원, 이범선 등 몇 사람이 더 언급되긴 하지만 가장 눈에 띄는 작가가 바로 손창섭이다. 《비 오는 날》, 《잉여인간》, 《신의 희작》 등 그의 대표작들은 한국전쟁 이후 폐허가 된 현실과 가장 맞아 떨어졌다. 1970년대 초반에 일본으로 건너가 다시 돌아오지 않은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 손창섭은 한국 문단에서는 수수께끼 같은 존재로 통한다.
1962년 장편소설을 쓰기 시작한 손창섭은 이때부터 단편이 중심이었던 초기와는 확연히 다른 작품세계를 보여준다. 문학사에서는 주로 단편을 발표했던 초기에 주목한다. 장편소설은 거의 별개로 봐도 될 정도로 구별이 된다. 그래서 손창섭 문학의 여전에 있어서 중요한 시기는 정확히 1961년까지로 한정된다. 손창섭이 단편소설을 발표한 시기는 1952년부터 1961년까지 대략 10년간이므로 195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로서 자격을 갖추고 있다. 손창섭은 1958년 발표한 《잉여인간》으로 1959년 동인문학상을 받는다. 이전에도 신인상 등 몇 가지 상을 받긴 했지만 한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동인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문단의 주요한 작가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한다.
그가 일본으로 건너간 뒤 마지막 장편소설을 연재한 때가 1977년이다. 이때 한국의 여러 작가들이나 지인들, 출판업자들이 접촉을 시도했지만 손창섭 자신이 만남을 거부하며 소식이 두절되어 생사조차 분명치 않은 상황이었다. 2010년 6월 뒤늦게서야 손창섭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전부터 문단에서는 손창섭의 도일渡日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추측이 있었는데 생활고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었고, 유신체제와 맞지 않아서 떠났다는 의견도 있었다. 손창섭이 사망할 즈음 그의 일본인 아내와 인터뷰했던 자료를 살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인터뷰에서는 손창섭이 일본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 했던 아내의 의사에 순전히 따랐던 것일 뿐이라고 밝히고 있다. 한편으로는 장편소설을 계속 발표하던 현역 작가로서 나름대로 어떤 결단의 의미가 있지 않았을까 추측해볼 따름이다.
아내가 자궁암으로 투병 중에 있었기에 손창섭은 슬하에 양녀 하나만 두고 있었다. 이런 안타까운 사연은 그의 작품세계와도 비슷한 측면이 있다. 손창섭의 문학에서 가족상은 전혀 긍정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손창섭의 개인사와 가족사를 살펴봐도 그렇다. 연보를 봐도 부친이 언제 죽었는지 알 수 없고 고등학교 때는 어머니가 재가하는 바람에 칠순의 할머니와 어렵게 생활했다는 기록만 남아 있다. 할머니에 대해서는 각별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손창섭의 가족사는 자전소설로 알려진 《신의 희작》에서 단서를 얻을 수 있다. 이 작품의 부제가 ‘자화상’이다. 이 작품이 논란이 됐던 것은 발표된 당시 독자나 평자가 실제로 손창섭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사私소설’이라는 전통도 있고, 작품의 서두에서도 “삼류작가 손창섭씨는”이라는 표현이 나오기 때문에 작가와 소설의 주인공을 완전히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나중에 소설의 내용이 작가의 실제 삶과 많이 다르다는 것이 밝혀졌다. 작가 자신도 완곡하게 과장된 것이라 이야기했다. 자신의 성장기와 가족사를 소설의 기법으로 창작한 작품인 것이다.
《신의 희작》이 실제 자서전이 아닌 가공의 이야기로 밝혀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작가가 본인의 이름까지 넣어가며 쓴 ‘자전소설’이기 때문에 작가의 삶과 연결시키는 작업이 완전히 무의미하지는 않다. ‘희작戲作’이라는 한자어에서 ‘희戲’는 ‘희극戲劇’에 쓰이기도 하는데 이것이 하나의 힌트이기도 하다. 작품에 등장하는 ‘자기’라는 존재가 신이 만들어 놓은 우스꽝스러운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자조 섞인 표현일 수 있다. 동시에 ‘작가라는 신’이 만들어 놓은 희화화된 자전적 이야기로서 읽을 수 있다.
‘제로’에서 다시 시작한 한국현대문학
손창섭은 1922년생으로 서른 살 때 등단했다. 1920년대나 1930년대에 태어난 이들은 일제 치하에서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겪고 한국전쟁까지 치러야 했던 불운한 세대다. 그러한 질곡 속에서 살아온 이들에게 삶을 쉽게 긍정하거나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오히려 이상한 일로 비춰졌을 것이다.
손창섭의 문학은 전쟁으로 망가지고 뒤틀린 한국 사회의 현실과 함부로 내팽개쳐진 인간성, 그로 인해 발생하는 모멸감과 허무를 압축해서 잘 보여준다. 물론 전혀 다른 경험을 내세울 수도 있겠지만 손창섭이 보여주는 정서야말로 당시 사람들의 평균치의 경험 내지는 대표적인 경험이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가치의 영도零度’라는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가치의 영도란 모든 것이 ‘0’으로 돌아간 ‘제로지대’ 내지는 ‘제로 시점’을 뜻한다.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한 1945년을 일본현대사에서는 ‘0년’이라고 부른다. 이는 제로에서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는 해방 후 한국전쟁을 겪기 때문에 휴전된 이후에 들어서야 제로부터 시작한다. ‘제로’는 모든 것이 폐허로 돌아가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 그 자체를 일컫는다.
한국현대문학을 주도해온 작가들은 시대적인 변화에 따라 세대가 구분된다. ‘분단 세대’라고도 불리는 1950년대 ‘전쟁 세대’, 그다음이 1960년대 4·19세대에 속한다. 1941년생인 김승옥 역시 어릴 때 전쟁을 겪긴 했지만 막 성년이 된 시기에 찾아온 4·19가 더욱 압도적인 체험이었다. 특정한 역사적 사건이 시대와 세대를 규정하고 그들은 시대의 틀 안에서 판단하고 사고한다. 손창섭에게는 한국전쟁이 가장 압도적인 경험이므로 거기서 크게 벗어나기 어렵다. 전쟁은 그 자체로 ‘가치의 영도’다. 그것은 삶의 의미를 빼앗는 동시에 회색의 공백지대를 창조한다. 이러한 역사의 등가물에 해당하는 문학이 바로 손창섭의 단편소설들이다.
반면에 그의 장편소설은 성격이 매우 다르므로 ‘풍속소설’에 해당한다. 최근에 재평가하려는 경향도 있긴 하지만, 그의 장편소설은 주로 신문 연재를 통해 발표했던 작품이므로 작가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을 것이라 보고 문학사에서 크게 중요하게 다루지 않고 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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