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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키에씨가 그레구아르에게 들려주는 책과 문학에 관한 말은 대학의 문학 교양 수업 교재로 손색이 없다. 책은 나와 타자의 만남이고, 문학 텍스트들은 바깥 사회와 관련을 맺는 것만큼 또는 그 이상으로 선행 텍스트들의 영향과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이 소설에서 상황과 청자聽者에 맞게 낭독 대상으로 선정된 작품들은 일종의 추천 도서로도 구실할 만하다. (한겨레신문, 2020-02-07)
위층으로 올라가기 전에 설명을 충분히 들었다. 지나치게 허물없이 대해서는 안 된다. 반말투여도 안 된다. 깍듯이 존댓말을 써야 하는 건 물론이고 그들을 부를 땐 이름이 아닌 성으로 부르되, 반드시 ‘부인’이나 ‘씨’라는 호칭을 붙여야 한다. 그들의 약병에 성, 이름, 방 번호 등이 기입되어 있을 것이다. 그 외에 간호사들을 위한 더 암호화된 정보들도 적혀 있을 테지만, 그건 네가 신경쓸 필요 없다.
한 달 전 이곳 주방에서 일하기 시작한 이후로 거주자를 직접 상대하는 일을 맡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오전 열한시 십칠 분. 28호실. 조엘 피키에. 수레국화 요양원. 운하를 따라 죽 늘어서 있는 건물의 삼층. 문이 닫혀 있다. 문 위에는 무슨 글귀가 붙어 있다. 필기체. 이탤릭체로 Pauca Meæ.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나는 배식 카트를 벽에 붙여 세우고 브레이크 두 개를 발로 밟아 딸깍 소리가 나게 고정시킨 뒤, 문을 두드린다. 세 번. 아주 확실하게. 그 즉시, 잔뜩 쉬었지만 깜짝 놀란 듯한, 거의 우렁차게 들리기까지 하는 목소리로 누군가 대답한다.
“아, 벌써? 잠깐만 기다려줘요.”
나는 잠시 기다린다. 카트 위에 놓인 식사 쟁반 네 개도 기다린다. 따뜻한 요리들을 각각 덮은 네 개의 투명한 뚜껑 안 위쪽에 작은 물방울들이 맺힌다. 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 안에서 급히 종이들을 정돈하는 소리를 듣는다.
“자! 자! 됐어! 그래! 들어와……”
나는 문을 연다. 그는 나를 보자 눈살을 찌푸리며 머뭇거리다가, 내가 평소에 음식을 가져다주던 주방 보조가 아니라는 걸 확인한다.
“아, 새로 온 친구로군! 베아트리스는 어디 아픈가?”
“그건 아니고요, 아마 딸이 조금 아프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오늘 하루 휴가를 냈고요. 만나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피키에 씨. 저는 그레구아르라고 합니다.”
“아, 그건 거기다 놔.” 그는 종이와 책이 잔뜩 쌓여 있는 탁자의 한쪽 구석을 가리키며 내게 말한다. “내가 반말을 한다고 언짢아하진 말게. 나는 이곳 사람들 모두와 말을 놓고 지내니까.”
“예, 괜찮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쟁반 하나를 두 손으로 받쳐들고 그의 방 안으로 들어간다.
박스. 또다른 박스. 바닥부터 천장까지 책으로 온통 뒤덮인 사방 벽. 8제곱미터의 공간 안에 탁자, 침대, 의자, 소파, 서랍장, 붙박이장과 침대 머리맡 테이블 사이로 삼각대 다리 폭 두 개 정도밖에 안 될 만큼 좁디좁은 유일한 이동 통로. 방안에 들어서자 내 뒤쪽으로, 한쪽 벽에 휠체어가 가지런히 접힌 채 세워져 있다. 그 옆엔 샤워와 세면, 화장실 공간을 구분 짓는 접이식 문. 내가 있는 쪽에서는 읽을 수 없는 포스트잇 메모와 신문에서 오려낸 기사조각들로 반쯤 가려진 창문을 통해, 운하를 따라 이어진 정원의 불빛들이 찔끔찔끔 새어들어오고 있다. 마치 그 공간에 짜 맞춰진 것처럼 내 앞에 서 있는 노인의 관 입구. 흠잡을 데 없이 잘 차려입고 자신의 영지 한가운데 서 있는 영주. 자만하지도 거드름을 피우지도 않고, “그저 스스로에게 위엄을 갖추고 있을 따름”이라고, 그는 놀라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그는 질 좋은 짙은 색 면양말과 검은색 가죽 모카신을 신고 있다. 사실 그는 끈을 매는 신발을 더 좋아한다. 다만 이제 더 이상 스스로 끈을 맬 수 없을 뿐이다.
동료들이 미리 귀띔해주긴 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깜짝 놀란다. 놀라서 멍해 있다. 그의 방은 깔끔하고 단정하며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다. 그런데 나는 숨이 막힌다. 세척제 냄새, 오래된 종이 냄새, 난방기구, 글쎄 무엇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질식할 것 같다. 노인은 그런 내 모습을 즐긴다.
“놀랐나? 서두를 것 없어, 천천히 해” 그리고 그는 식사 쟁반으로 다가가 보온뚜껑을 들어올리면서 따뜻한 음식에 눈길을 던진다. “그래, 오늘은 ‘위대한 셰프’께서 무슨 요리를 정성껏 만들어주셨나?” 그는 퓌레로 반쯤 뒤덮인 넓적다리 고기 두 조각을 보면서 빈정거린다.
접시에서 피어오르는 냄새에, 나는 복도에 남겨진 나머지 세 개의 쟁반들을 떠올린다.
“맛있게 드십시오, 피키에 씨, 배식을 다 끝내고 다시 오겠습니다.”
“늙은 암탉들을 조심해! 그들은 여우에겐 잔뜩 겁을 먹지만 빨강머리 남자는 좋아 죽거든. 틀림없이 자네의 말간 얼굴을 보면 홀딱 반할 거야.”
나는 건성으로 웃음을 터뜨린다.
“늙은이의 유머에 자네도 익숙해져야 할 거야!”
늙은이의 유머, 나는 그것에 익숙해졌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거주자들을 아무개 씨라고 불러야 하지만, 우리끼리 있을 때는 자연스럽게 농담도 오간다. 그렇게 많은 별명들이 만들어진다. 대부분은 듣기에 썩 기분좋은 것들이 아니다. 하지만 가끔씩 세심하고 정감 가는 별명, 각자의 이런저런 장점이나 결점을 부각하면서 썰렁하지 않은, 시적 감성이 묻어나는 별명도 생겨난다.
피키에 씨, 모두가 그를 ‘책방 할아버지’라고 부른다. 그 별명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잘 알지 못한 채 왜 그를 그렇게 부를까 의아해하는 사람들은 뜨내기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전설 같은 그 예우의 표현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피키에 씨, 책방 할아버지.
칠 년 전, 그는 모든 걸 다 팔아치웠다. ‘곁가지 문학’ 서점은 이제 ‘퀵버거’라는 햄버거가게가 되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곳에 관한 기억이 전혀 없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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