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에서 ‘여성혐오’는 매 시기 가족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국가가 새로운 가족이데올로기를 형성해가는 과정에서 생겨난 결과다.
들어가며
〈엽기적인 그녀〉2001를 세 번 봤다. 당시 대학 졸업반이었던 나에게 여주인공으로 등장한 ‘엽기적인 여대생’은 살면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신기한 캐릭터였다. 10대 여학생과 ‘데이트’를 즐기는 중년 남성을 혼내주고, 무술 실력을 뽐내며 악당을 물리치는 여성 히어로가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상대방이 누구인가에 상관없이 자신의 의견을 명확히 주장하는 당당함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쉽게 성희롱의 대상이 되는 상황, 열심히 공부해 대학에 들어갔음에도 결혼만을 요구받는 현실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엽기’를 선택했다. ‘그녀’는 엽기적이었지만 경이로웠다. 현실에 부재하지만 어디선가 ‘그녀’ 같은 존재가 나타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녀’가 남성의 판타지에 의해 구성된 존재인 한편으로, 동시에 2000년대 젊은 여성에게도 닮고 싶은 이미지로 재현되었다는 점이다. 1980~1990년대에는 ‘청순한’ 외모를 한 젊은 여성의 이미지가 질투와 선망의 시선에서 미디어에 형상화되었다. 사실 ‘그녀’는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남성과의 애정관계에 매몰되어 있는 존재였을 뿐이다. 20년 가까이 지난 현재의 시점에서 돌이켜볼 때,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든다. 영화에서 ‘그녀’의 욕망은 과연 그녀의 욕망이었을까. ‘그녀’를 향한 나의 욕망은 과연 나의 욕망이었을까. 순수하다고 여겨지는 개인의 욕망도 사실은 구성되는 것이 아닐까.
2001년의 〈엽기적인 그녀〉에서 ‘그녀’의 ‘엽기’가 통쾌하게 이미지화되었다면, 2016년의 〈굿와이프〉에서 ‘김단’의 ‘독기’는 대중을 불쾌하게 만들 수 있다. 김단은 자신의 속마음을 타인에게 말하는 법이 없고, 진정한 친구 만들기에도 관심이 없다. 그녀는 직장에서 높은 임금을 받고, 실력을 인정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그 과정에서 김단은 자신을 위장하고, 서류를 위조하며, 법을 위반한다. 그녀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타인에게 거짓말을 하고, 쉽게 친구가 되었다가 금방 돌아서 다른 표정을 짓기도 한다. 그러나 김단의 ‘독기’가 그녀의 ‘엽기’보다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굿와이프〉에서 김단은 어떤 면에서 음험한 범죄자의 형상으로 이미지화된다. 2010년대에 우리가 선망하는 대상은 김단이 아니라 그녀가 보조하는 변호사 김혜경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전문직에 종사하면서 두 자녀를 훌륭하게 키우고 있는 4인 핵가족의 워킹맘 김혜경. 그녀는 표면상 ‘딸들의 빛나는 미래’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드라마에서 모든 것을 가진 듯한 김혜경의 이미지는 허상에 불과하다. 워킹맘으로서의 김혜경은 여전히 남편의 내조자이자 가족을 위해 헌신함으로써 아내·어머니·며느리로서의 의미를 획득하는 존재일 뿐이다.
현실에서 사회에 나선 여성이 실질적으로 갖게 될 존재성은 ‘김혜경’보다는 ‘김단’일 가능성이 크다. 〈굿와이프〉에서 김단의 어두운 모습은 한국사회에서 비혼 여성이 혼자 힘으로 살아남기 위해 가질 수밖에 없는 ‘독기’에 대한 비유일 수 있다현실에서 비혼 여성이 정말 법을 위반한다는 것이 아니라, 초짜의 여성 변호사가 백전노장의 남성 검사를 단시간에 압도하는 이야기가 현실에서 과연 가능할까. 그런데 오늘날 2010년대에는 갑자기 가정일과 직장일을 동시에 하면서 자아실현까지 하는 ‘워킹맘’이 현모양처로 떠올랐다. 이제 미디어에서만큼은 현모양처의 존재성이 전업주부에서 워킹맘으로 전환되었다. 부모가 자신의 딸을 특정 분야에서 두각을 보이는 인물로 키우고 싶은 욕망은 2000년대 이전까지는 개인에게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지만 2000년대 이후에는 그렇다고 할 수 없다. 자아실현을 위해 일하는 여성을 이단아처럼 여겼던 사회는 이제는 여성이 일하기를 욕망한다. 사회는 더 이상 여성이 가정 안에서 자아실현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실제로 사회에 진입한 여성이 갖게 될 모습은 ‘김혜경’이 아니라 ‘김단’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보게 될 실제는 ‘김단’이지만, 사회는 표면상 ‘김혜경’을 여성들이 추구해야 할 욕망의 대상으로 내세운다. 그래서 개인이 추구하는 욕망은 결코 성취될 수 없는 것이 되고 우리는 현실과 환상 사이의 틈 안에서 감정의 균열을 맛보게 된다.
《한국의 가족과 여성혐오, 1950~2020》은 표면상 한국 가족이데올로기의 변모 양상을 추적하고 있지만, 결국 말하고자 한 것은 가족에게 요구된 ‘욕망’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개인이 아버지로서 가족의 생계 부양 등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은 아버지인 내가 원해서 혹은 아버지가 갖는 윤리적 당위성 때문이라 여길 수 있다. 그러나 한 개인이 아버지로서 어떻게 행동해야겠다는 의도는 사회의 욕망에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사회적 상황에 따라 가족이데올로기는 달라지고, 아버지, 어머니, 여대생, 내연녀, 취업주부, 전업주부, 이혼녀 등의 위치는 그 속에서 배치·재배치된다. 여성/여성집단에 부여된 ‘혐오’도, 아버지의 ‘윤리’가 사회의 욕망에 따라 만들어지듯, 구성되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가 숭고하게 생각하는 가족제도는 사실 ‘환상’을 기반으로 해 운영되며, 여성혐오의 메커니즘도 상황에 따라 구축·재구축된다. 우리는 모두가 시기 상황에 따라 특정 역할을 요구받는 존재인 것이다.
이 책은 한국전쟁 이후부터 현재까지를 세 시기 ― 전후 시기인 1950~1960년대/1970년대, 산업화 시기인 1980~1990년대, 신자유주의 시기인 IMF 외환위기 이후부터 현재2020 ― 로 나누어 미디어에 재현된 여성혐오 양상을 살펴볼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여대생’, ‘전업주부’와 ‘취업주부워킹맘’, ‘이혼녀’를 중심으로 한국사회의 여성혐오 현상을 사史적으로 추적한다.
첫째, 1950~1960년대에 남성은 남성으로 태어났다는 생득적生得的 자신감이 있었고, 그 자신감을 바탕 삼은 남성의 폭력·축첩 등으로 여성이 힘겹게 살아가는 상황이 지적되기도 했다. 아버지의 외도로 인해 그 가족 구성원이 경제적·정신적으로 어렵게 되는 상황을 막기 위해 남성의 부도덕함이 사회적으로 공론화된 것이 그러한 양상이다. 그렇기에 이 시기 일반 부녀자들이 혐오적 존재로 위치되기는 어려웠다. 바람 난 취업주부는 엄중하게 비판되고 계도되기보다 대중의 말초적 흥미를 충족시키는 존재로 대상화되었다. 그러나 ‘여대생’은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이 상대적으로 드문 상황에서 호기심과 질투심의 대상이 되어 혐오 집단으로 배치되었다. 아직 여성이 대학 졸업 후 사회적 성취를 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으나, 여대생은 사회 질서를 위반할 수 있는 잠재적 존재였다. 그래서 여대생은 바람 난 취업주부보다 더 정숙하지 못한 형상으로 이미지화되었다. 또한 1950~1960년대/1970년대는 여성이 홀로 경제활동을 하는 것이 어려웠던 시기라 주부는 이혼을 선택하기 어려웠고, 남편에게 이혼을 당한 여성은 동정의 대상으로 그려졌다.
둘째, 1980~1990년대에는 한국사회가 성평등이 이루어지지 않았는데도 마치 여성이 남성보다 우위에 놓인 것 같은 분위기가 주조되었다. 이와 함께 모든 사회문제의 근본 원인을 가부장 권위의 추락과 여권신장에서 찾으려는 경향성이 나타났다. 그래서 무너진 사회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모범적’ 가부장을 중심으로 성별분업에 입각한 가족 질서가 강화되었다. 특히 중산층 전업주부는 시간적 여유를 누리면서 경제권까지 획득한 부러움의 대상으로 이미지화되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가족을 등한시하거나 성적으로 방종했던 아버지가 존재했던 과거를 가족 질서가 바로잡혔던 노스탤지어의 시공간으로 역전시키면서 가부장제가 구축되었다는 점이다. 그 안에서 가족 구성원에게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직장에서 시달리는 현재의 아버지는 위로의 대상이 되었고, 무너진 현재의 가부장제 질서는 회복시켜야 하는 것이 되었다.
1980~1990년대에는 아버지 중심의 가부장제가 가족의 정석이라는 사실이 ‘환상’임을 들출 수 있는 여성/여성집단에 혐오 이미지가 부여된다. 여대생은 1950~1960년대에 정숙한 가족이데올로기를 위협하는 금기 위반의 주인공이었으나 1980년대 이후 청순가련한 외모에 허영심 많고 애정에 집착하는 존재로 전환된다. 동시에, 고학력 주부는 혐오의 대상에서 1990년대에 능력 좋은 전업주부인 ‘미시’로 호명되면서 가족제도 안으로 포섭된다. 여성의 경제력을 억제하기 위해 취업주부는 가정을 불행하게 하는 여성으로 배치되었고, 이혼녀는 1950~1960년대/1970년대에 연민의 대상에서 1990년대 들어 가족에 대한 희생을 거부한 최악의 존재로 형상화되었다.
셋째, IMF 외환위기 이후에는 여성혐오 현상을 단순히 성대립의 결과로 간주하는 양상이 나타난다. 성평등이 이루어졌다고 여겨지는 2010년대 한국사회에서 젊은 남성은 자신들이 취업 등에서 젊은 여성에게 역차별을 당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2010년대 이후의 여성혐오는 국가가 가족이데올로기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현상이다. 국가의 경제적 상황이 악화되면서, 가장 한 명만에 의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전통적 가부장제는 불가능하게 되었고, 자녀의 교육과 자신의 노후 등에 대한 불안감으로 출생률이 급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미디어에서 기존의 가부장제와 성별분업 체계를 폐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은폐되고 있다. 표면적으로 미디어에서는 아버지가 가정일과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중장년 남성이 ‘개저씨’가 되어 비판받는 상황이 강조되고, 기혼 여성의 경력 단절을 막고 여성의 사회활동을 권장하는 사회의 분위기가 부각된다. 그러면서 사실상 한국사회의 결혼제도가 여성에게 불평등하다고 발언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외환위기 이후 가족 질서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여성의 적으로 여겨져온 가부장제가 미디어상에서 사라진 것이다. 미디어에서 갑자기 아버지의 권위가 약화되고 여성의 사회활동이 왕성해지는 것처럼 언급되면서 젊은 남성의 분노가 사회가 아닌 ‘여성’을 향하게 되었다. 실질적으로는 성평등이 이루어지지 못한 한국사회에서 남성이 경쟁에서 진 상대는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지만, 미디어의 ‘효과’로 인해 남성은 여성 때문에 자신의 사회활동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것처럼 여기게 될 것이다.
미디어에서 여성의 취업과 경제활동이 긍정적으로 이미지화되는 이유는 출생률을 높이면서 여성에게 가정의 유지와 계층 상승의 의무를 공식적으로 부과하기 위해서다. 사회적·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핵가족 체계를 유지하기 위한 결과로 여성혐오의 양상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2010년대의 여성혐오 현상은 ‘사회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여성에 대한 환상’이 주조되면서 생겨났다. 허영심의 대명사였던 ‘골드미스’는 따뜻한 모성과 충분한 경제력을 모두 갖춘 현모양처로 가족제도에 편입되고, 그동안 여성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자리에 위치되었던 중산층 전업주부는 ‘된장아줌마’ 혹은 ‘맘충’이 되었다. 2000년대 이후, 자기만 아는 이기적 어머니이자 문란한 여성으로 그려지던 이혼녀의 존재성 또한 달라졌다. 그 이유는 가난을 관리하기 위해 이혼한 어머니의 생활력이 부각되고, 출생률을 높이기 위해 재혼의 이데올로기가 긍정적으로 전환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가족과 여성혐오, 1950~2020》은 다음의 질문에 대한 답을 하고 싶었다. 21세기인 오늘날 한국사회는 성평등한 사회인가? 한국사회에서 전후 이후 여성이 남성보다 우위에 있다고 말하지 않았떤 시기는 있었는가? 한국사회는 전후부터 단계적으로 여권이 신장되었는가? 왜 혐오적으로 인식되는 여성/여성집단은 시기마다 달라지는가? 가족의 가치와 가족 구성원의 존재성은 고정된 것인가, 구성되는 것인가? 저자로서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 위 질문들에 고민해보기를 소망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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