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도킨스
2004년부터 2007년(2006), 내가 쓴 《만들어진 신》(2006), 그리고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2007)이다. 한동안 샘, 대니얼, 그리고 나는 ‘삼총사’로 불렸다. 그런 다음 크리스토퍼의 저서가 등장했을 때 우리는 ‘네 기사’로 확장했다. 우리는 언론에서 붙이는 이러한 명칭에 책임이 없었지만 관계를 부인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서로 공모하지도 않았으며, 조직적으로 총을 든 적도 없다. 하지만 함께 묶이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고, 아얀 히르시 알리, 빅터 스텐저, 로렌스 크라우스, 제리 코인, 마이클 셔머, 앤서니 그레일링, 댄 바커 같은 존경받는 저자들과 기꺼이 함께했다.
2007년 9월에 무신론자국제연합Atheist Alliance International의 연례회의가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연고지인 워싱턴 D.C.에서 열렸다. 로빈 엘리자베스 콘월이 리처드 도킨스 이성과 과학 재단을 대표해 네 기사가 한자리에 모이는 것을 계기로 공동 대담을 준비했고, 우리 재단의 전속 촬영기사가 그것을 찍기로 했다. 원래 계획은 아얀 히르시 알리가 다섯 번째이자 유일한 여성 기사로 참석해 ‘삼총사’에서 ‘네 기사’를 거쳐 ‘지혜의 다섯 기둥’이 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네덜란드 국회의원이던 아얀이 긴급히 네덜란드로 가게 되었다. 우리는 그녀가 빠져서 아쉬웠고, 2012년 멜버른에서 열린 세계무신론대회Global Atheist Convention에서 공동 대담이 다시 성사되었을 때 그녀가 생존한 세 기사와 합류하게 되어 기뻤다. 놀라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참석으로 그날의 대화 주제는 어느 정도 이슬람교로 옮겨갔다.
2007년의 만남으로 돌아가면, 9월 30일 저녁 우리 네 사람은 크리스토퍼와 그의 아내 캐럴이 사는, 책으로 둘러싸인 널찍한 아파트에 모여 한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우리는 칵테일을 권하며 두 시간에 걸친 대화를 나누었고, 대담이 끝나고는 기억에 남을 만찬을 같이했다. 우리가 대화를 하는 모습을 찍은 영상은 리처드 도킨스 이성과 과학 재단의 유튜브 채널에서도 볼 수 있다. 또한 리처드 도킨스 이성과 과학 재단은 녹화한 영상을 두 장의 DVD로 제작했으며, 이 책에 실린 텍스트는 그 대화를 받아 적은 것이다.
나는 토론에 사회자가 꼭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며, 흥미를 유발하고 결실을 맺는 데 기본적인 의견 차이나 논쟁이 항상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날의 대화로 내 생각이 옳았음이 입증되었다. 우리는 준비한 의제조차 없었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그렇지만 아무도 대화를 독점하지 않았고, 우리는 상당히 많은 주제를 넘나들며 매끄럽게 얘기를 이어갔다. 두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고 우리의 흥미는 식을 줄 몰랐다. 이런 식의 흐름에 맡기는 대화가 제3자에게도 재미있을까?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지금, 혹은 10년쯤 뒤 우리가 대화를 한다면 어떻게 다를까? 물론 그냥 넘길 수 없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기억에 남는 그날의 저녁 모임을 주관한 친절한 집주인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이제는 없다. 강하고 감미로운 저음의 목소리, 굉장한 학식, 문학과 역사를 인용하는 박식함, 신랄하면서도 예의 바른 위트, 새로운 문장의 첫 단어를 시작하기 전이 아니라 후에 극적으로 한 박자 쉬어 가는 것 같은 수사적 기술이 만들어내는 말의 리듬이 우리는 앞으로 얼마나 그리울까. 4자 대화를 그가 주도적으로 이끌었다고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는 확실히 대화의 흐름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나는 이 지면에서 지난 주제를 되풀이하는 대신, 지금 우리가 그러한 대화를 다시 한다면 내가 어떤 새로운 점을 지적할 것인지 생각해보기로 했다.
우리가 2007년에 논의한 많은 주제 가운데 하나는 겸손과 오만의 관점에서 종교와 과학이 어떻게 다른가였다. 종교는 독보적으로 확신해 넘치고 기함할 정도로 겸손이 부족하다고 비난받고 있다. 팽창하는 우주, 물리법칙, 미세 조정된 물리상수, 화학법칙, 느린 속도로 진행되는 진화, 이 모든 것의 결과로 140억 년이라는 오랜 시간에 걸쳐 우리가 존재하게 되었다. 우리가 원죄를 지니고 태어난 비참한 죄인이라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주장도 사실 뒤집어보면 일종의 오만이다. 우리의 도덕적 행위에 어떤 우주적 의미가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대단한 자만이 아닐 수 없다. 마치 우주의 창조주는 벌점을 매기고 가산점을 더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하지 않는 것처럼 들린다. 우주의 신경이 온통 내게 쏠려 있다니, 이거야말로 이해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는 오만이 아닌가?
칼 세이건은 《창백한 푸른 점》에서 먼 과거의 우리 조상들이 그러한 우주적 나르시시즘을 벗어나지 못한 것에 대한 변명을 한다. 머리 위를 덮는 지붕이 없고 인공조명도 없던 시절, 우리 조상들은 밤이면 머리 위를 맴도는 별을 관찰했다. 그 중심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당연히 관찰자가 있었다. 그들이 우주의 ‘중심은 나’라고 생각한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다시 말해, 우주는 실제로 ‘나를 중심으로’ 돌았다. 하지만 그러한 변명은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가 등장하면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러면 이번에는 신학자의 지나친 확신을 보자. 자기 확신으로 17세기 대주교 제임스 어셔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연대기에 너무도 확신한 나머지, 우주가 생긴 정확한 날짜까지 제시했다. 바로 기원전 4004년 10월 22일이었다. 10월 21일이나 23일이 아니라, 정확히 10월 22일 저녁이었다. 9월이나 11월이 아니라 10월이라고 교회의 막강한 권위로 확실히 못 박았다. 4003년이나 4005년도 아니고, ‘기원전 4000년대나 5000년대의 어느 시점’도 아니고, 한치의 의심도 없이 기원전 4004년이라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우주의 기원 시점에 대해 그렇게 정확하게 말하지 않는다. 무작정 지어내는 것은 신학자의 특징이다. 그들은 마음대로 지어내고 무한해 보이는 권위로 타인에게 그것을 강요한다. 때로는 ― 적어도 이전 시대에는, 그리고 이슬람의 신정국가에서는 지금도 ― 지키지 않으면 고문과 죽음의 처벌이 따른다고 위협한다.
그러한 독단적 정확성은 종교 지도자가 추종자들에게 부여하는 권위적 생활 규율에도 나타난다. 그리고 광적인 통제에 관한 한 이슬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란의 존경받는 ‘학자’ 아야톨라 오즈마 사이드 모하마드 레다 무사비 골파이가니가 전한 《이슬람의 간략한 계명Concise Commandments of Islam》에서 엄선한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한다. 아기의 유모가 되는 일에 대해서만도 ‘쟁점issue’으로 번역되는 매우 구체적인 규칙이 스물세 개나 존재한다. 첫 번째로 쟁점 547을 보자. 나머지도 똑같이 정확하고, 독단적이고, 명백한 논리적 근거가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쟁점 560에 명시된 조건에 따라 한 여성이 어떤 아이의 유모가 된다면, 그 아이의 아버지는 유모의 친딸과 결혼할 수 없고, 젖의 소유자인 유모 남편의 친딸과도 결혼할 수 없다. 자기 소유의 젖을 먹고 자란 여성과도 결혼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유모의 젖을 먹은 여성과는 결혼할 수 있다.
유모 항목에 나오는 또 다른 사례인 쟁점 553을 보자.
한 남성은, 만일 그의 아버지의 아내가 아버지 소유의 젖을 어떤 여자아이에게 먹였다면 그 여자아이와 결혼할 수 없다.
‘아버지 소유의 젖’이라고? 그게 무슨 말인가? 여성이 남편의 재산인 문화에서라면 ‘아버지 소유의 젖’이라는 표현이 생각만큼 이상하지 않다.
쟁점 555도 의아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번에는 ‘형제 소유의 젖’에 관한 규정이다.
한 남성은 누나 또는 여동생이 젖을 먹인 여자아이, 또는 형제의 아내형수 또는 제수가 형제 소유의 젖형 또는 남동생 소유의 젖을 먹여 키운 여자아이와는 결혼할 수 없다.
유모에 대한 이 소름 끼치는 집착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나는 모르지만, 《성경》에 근거가 없지는 않다.
《코란》이 처음 계시되었을 때, 한 아이를 가족으로 만드는 수유 횟수는 열 번이었지만, 그런 다음에 이것이 폐기되고 잘 알려져 있는 다섯 번으로 대체되었습니다.(https://islamqa.info/en/27280)
이것은 또 다른 ‘학자’가 최근 소셜 미디어상에서 (그럴 수밖에 없는) 혼란에 빠진 여성에게 받은, 다음과 같은 진심 어린 호소cri de coeur에 대해 답변한 내용의 일부였다.
저는 시동생의 아들에게 한 달 동안 젖을 먹였고, 제 아들은 시동생 부인동서의 젖을 먹었습니다. 제게는 동서의 젖을 먹은 아이보다 먼저 태어난 아들과 딸이 있습니다. 동서도 제 젖을 먹은 아기보다 먼저 태어난 두 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를 가족으로 만드는 수유의 종류를 설명해주시고, 나머지 자식들에게 적용되는 규칙을 알려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다섯 번’의 수유와 같은 정확한 규칙은 종교가 보이는 광적 통제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그것은 2007년에 카이로의 알아즈하르대학교 강사인 이자트 아티야 박사가 제출한 파트와fatwa에서 기이한 형태로 드러났다. 아티야 박사는 남성과 여성 동료가 단둘이 있는 것을 금지하는 규정에 대해 고민하다가 독창적 해법을 내놓았다. 여성 동료가 남성 동료에게 “자신의 유방으로부터 직접” 적어도 다섯 번 젖을 먹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두 사람은 ‘친족’이 되므로 그들은 일터에서 단둘이 있어도 된다. 네 번은 충분하지 않다는 점에 주목하라. 그는 농담으로 이런 말을 한 게 아니었다. 어쨌거나 그는 격렬한 항의에 부딪혀 자신의 파트와를 철회했다. 대체 어떻게 이렇게 비상식적이고 명백히 부적절한 규칙에 얽매여 살 수 있을까?
이제 한시름 놓고 과학을 보자. 과학은 모든 것을 안다는 오만한 주장을 한다고 종종 비난받는다. 하지만 이러한 비난은 표적을 한참 빗나간 것이다. 과학자들은 답을 모르는 질문을 좋아한다. 그것이 할 일과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떳떳하게 말하고,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뭘 해야 하는지 신이 나서 떠들어댄다.
생명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나도 모르고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싶다. 그래서 열심히 가설을 교환하고. 그 가설을 조사할 방법을 제안한다. 약 2억 5,000만 년 전 페름기 말에 대멸종을 일으킨 원인이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그 답을 모르지만, 생각해볼 만한 흥미로운 가설들을 세웠다. 인류와 침팬지의 공통 조상은 어떻게 생겼을까? 그것은 모르지만 몇 가지 단서가 있다. 공통 조상이 살던 대륙다윈은 아프리카라고 추측했다을 알고 있고, 공통 조상이 대략 언제600만~800만 년 전 살았는지 알려주는 분자 증거도 있다. 암흑 물질은 무엇인가? 이 역시 모르지만, 물리학계의 상당수가 그것을 알고 싶어 한다.
과학자에게 무지란 긁어주기를 바라는 가려움증과 같다. 당신이 만일 신학자라면, 무지는 뻔뻔하게 뭔가를 지어내어 없애버려야 할 어떤 것이다. 만일 당신이 교황처럼 권위 있는 인물이라면, 그렇게 하기 위해 혼자 조용히 생각에 잠겨 머릿속에 답이 떠오르기를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답이 떠오르면 그것을 ‘계시’로 공표한다. 아니면, 당신보다 더 모르는 사람이 쓴 청동기시대 문헌을 ‘해석’할지도 모른다.
교황은 자신의 사적인 의견을 ‘도그마’로 널리 알릴 수 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에 걸쳐 상당수 가톨릭 신자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 과학자로서는 이해할 수 없지만, 한 의견에 대한 믿음에 오랜 전통이 있다는 것은 그 의견이 진리라는 증거로 간주한다. 1950년에 교황 비오 12세는 (사람들은 그를 ‘히틀러의 교황’이라고 부른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죽어서 영혼만이 아니라 육신도 함께 하늘나라로 들어 올림을 받았다는 교의를 보급했다. 육신도 승천했다는 것은 마리아의 무덤을 열어보면 텅 비어 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교황의 이러한 추론은 증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그는 〈고린도전서〉 15장 54절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를 인용했다. 이 구절에는 마리아에 대한 언급이 없다. 〈고린도전서〉의 저자가 마리아를 염두에 두었다고 추정할 만한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이번에도 우리는 텍스트를 가져다 다른 어떤 것과 모호하고 상징적이고 그럴듯한 관계가 있는 것처럼 해석하는 신학자의 전형적인 수법을 보게 된다. 수많은 종교적 믿음이 그렇듯이, 비오 12세의 교의도 마리아처럼 신성한 존재에 적합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느낌에 적어도 얼마간은 의존했을 것이다. 하지만 일리노이대학교의 존 헨리 뉴먼 가톨릭사상연구소 소장인 케네스 하월 박사에 따르면, 교황이 이 교의를 보급한 동기는 다른 의미의 적합성에서 비롯했다. 1950년 당시 전 세계는 제2차 세계대전의 폐허에서 회복하는 중이었고, 따라서 치유와 위안의 메시지가 절실히 필요했다. 하월은 교황의 말을 인용한 다음, 자신의 해석을 제시했다.
비오 12세는 성모승천에 대한 묵상이 신자들로 하여금 인류가 하나의 가족으로서 똑같이 존엄하다는 사실을 더욱 자각하게 만들기를 바라고, 이러한 희망을 분명하게 표현한다. …… 어떻게 하면 인간이 자신의 초자연적 최후에 시선을 고정하고 동료 인간의 구원을 바라게 될까? 성모승천이 인류의 존엄을 되새기고 그런 마음을 지니도록 촉진한 것은 성모승천이 마리아의 지상에서의 삶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신학자의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면 정말 신기하다. 무엇보다도 사실적 증거에 관심이 없다는 점이 그렇다. 그들은 실로 사실적 증거를 경멸한다. 마리아의 육신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증거가 있느냐 없느냐는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이 그렇다고 믿으면 그만이다. 신학자들이 일부러 거짓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마치 진실이 무엇인지 개의치 않고, 진실에는 관심이 없으며, 심지어 진실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 같다. 그들은 진실을 상징적 또는 신비적 의미보다 못한 지위로 강등시킨다. 그런데 한편으로 가톨릭교도들은 이러한 지어낸 ‘진실’을 억지로 믿을 수밖에 없다. 그들은 억지로 믿는 것이 분명하다. 비오 12세가 승모승천을 교의로 공포하기 전에도 18세기 교황 베네딕토 14세가 마리아의 승천은 “유망한 견해로서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불경스럽고 신성모독적”이라고 선언했다. “유망한 견해”를 부정하는 것이 “불경스럽고 신성모독적”이라면, 확실한 교의를 부정할 때는 어떤 처벌이 따를지 불 보듯 훤하다! 그리고 역사적 증거가 전혀 없음을 스스로도 시인하는 ‘사실들’을 주장할 때 종교 지도자들이 보이는 뻔뻔한 확신에 다시 한번 주목하라.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