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 독립 국가를 세우는 데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참여했다. 그중 좌우를 막론하고 근대 일본의 엘리트 육성장치였던 일본 본토의 제국대학에서 유학했던 조선인은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상당수가 제국 일본의 관료로 복무하며 친일을 했거나, 제국의 첨단 지식과 관료 경험을 밑천으로 해방 후에도 남북한의 행정, 경제, 사법, 지식 체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 이 책은 일제 치하에서 일본으로 유학 갔던 조선인들이 왜 유학을 떠났으며, 가서 누구에게 무엇을 배웠고, 돌아와서는 대한민국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인하대학교 한국어문학부 정종현 교수가 교토에서부터 10년간 여기저기 흩어진 기록을 더듬고 고뇌한 결과물이다.(책 소개)
식민지 유학생의 고뇌, 지사냐 출세냐?
1959년 2월 27일 진보당 사건의 최종 판결. 당시 진보당의 당수였던 조봉암에게 사형이 선고된 재판정에는 진보당의 강령을 기초한 이동화도 피고로 함께 서 있었다. 1907년 평안남도 강동군에서 태어난 이동화는 야마구치山口고등학교, 도쿄東京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북한의 김일성종합대학 교수 등을 거쳐 월남한 후 진보 정치인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법관석에는 변옥주 대법관이 다른 네 명의 재판관과 함께 앉아 있었다. 1906년 전라남도 장흥군 출신인 변옥주는 히로시마廣島고등학교, 교토京都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후 조선총독부 판사, 서울고등법원장을 거쳐 대한민국 대법관으로 진보당 인사들의 재판에 참여했다.
변옥주와 이동화. 심판하는 자와 심판받는 자로 갈렸지만, 이 두 사람은 똑같은 제도 속에서 성장했다. 식민지 조선의 남북에 걸쳐 멀찍이 떨어진 강동군과 장흥군에서 출발하여 ‘현해탄’을 건너 일본의 구제舊制고등학교와 제국대학을 졸업하기까지 이들이 걸었던 길은 거의 같았다. 청년 이동화와 변옥주는 당시 ‘현해탄’을 건너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또 무엇이 이들 삶의 경로를 이토록 다른 결과로 이끌었을까?
교토에 있는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한 시인 정지용은 〈다시 해협〉에서 처음 ‘현해탄’을 건너던 “스물한 살 적 첫 항로에, 연애보담 담배를 먼저 배웠다.”라고 적었다. 지식을 구하러 식민 본국으로 건너가는 식민지 청년의 복잡하고 쓰린 심정을 “담배를 먼저 배웠다.”라는 문장으로 표현한 것이다. 임화는 정지용의 이 시를 인유하여 “아무러기로 청년들이 평안이나 행복을 구하여, 이 바다 험한 물결 위에 올랐겠는가?”라고 반문하며, “첫 번 항로에 담배를 배우고, 둘쨋 번 항로에 연애를 배우고, 그 다음 항로에 돈맛을 익힌 것은, 하나도 우리 청년이 아니었다.”라고 주장했다. 임화는 다시 〈해협의 로맨티시즘〉이라는 시에서 현해탄을 건너는 식민지 청년이 가져야 할 진정한 마음가짐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예술, 학문, 움직일 수 없는 진리……
그의 꿈꾸는 사상이 높다랗게 굽이치는 도쿄東京
모든 것을 배워 모든 것을 익혀
다시 이 바다 물결 위에 올랐을 때,
나는 슬픈 고향의 한 밤,
홰보다도 밝게 타는 별이 되리라.
청년靑年의 가슴은 바다보다 더 설레었다.
임화는 ‘현해탄’을 식민지 청년이 나아갈 길을 가르쳐줄 높은 사상을 배우러 가는 입구로 노래했다. 무수한 청년들이 이곳을 건너며 자기 한 몸의 출세를 넘어서 “슬픈 고향의 한 밤”을 환히 밝히는 “홰보다도 밝게 타는 별”이 되어 돌아올 것을 다짐했다. 실제로 그중에서 적지 않은 청년들이 제국주의 일본에 저항하는 지사의 삶을 살다가 스러져갔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 많은 청년들이 첫 다짐을 잊고 “그다음 항로에 돈맛을 익”혔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유학생들이 출세를 추구한 증거는 차고 넘친다.
임화는 시에서 현해탄을 건너는 식민지 청년들에게 단도직입으로 질문을 던진다. “지사냐, 출세냐?” 현해탄을 건너는 조선인 유학생들은 이 갈림길에서 고민했다. 식민지 유학의 최정점에 있었던 제국대학의 졸업생들은 결과적으로 다수가 ‘출세’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제국대학 입학은 “입신출세의 티켓을 쥐는 것”이었으며, 실제로 졸업생 다수가 식민지 체제에서 출세했다.
그러나 ‘출세한’ 그들이라고 고민이 없었겠는가? 어쩌면 처음부터 그들의 존재 자체가 분열적이었는지도 모른다. 누구 못지않은 수재들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식민지’ 출신이라는 차별의 딱지가 붙어 있었다. 이를테면 당시 제국대학의 학적 관련 문서에는 학생의 출신 지역이 표시되어 있었다. 이름 옆에 부기된 “朝鮮”이라는 두 글자는 식민지 출신 유학생을 묶는 족쇄였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들은 출세가 보장된 ‘제국대학생’이었다. 일본 문부성의 1909년 통계에 따르면, 도쿄제국대학 졸업생 전체의 44퍼센트가 관공청의 관료로 일하고 있었다. 24퍼센트를 차지하는 학교 교원도 대부분 관공립 학교에 재직하고 있었다. 이를 합치면 전체 졸업생의 68퍼센트가 ‘관’ 분야에 종사하고 있었던 셈이다.
제국대학의 조선인 졸업생들은 일본 ‘내지’의 관료 사회에서 출세하는 길은 막혀 있었지만, 총독부 식민 권력 아래에서의 출세는 어느 정도 보장되어 있었다.
식민지(인)/제국(엘리트) 사이의 분열
식민지 엘리트들은 식민지 본국에서 오랜 기간 유학하며 분열이 극대화되었다. 제국대학 유학생들은 중학교부터 대학까지 10여 년이 걸리는 고등교육을 일본에서 일본어로 받았다. 일상생활에서 쓰는 언어도 일본어였다. 긴 유학 생활 동안 그들은 일본의 언어와 문화, 습관 등을 자연스럽게 몸에 익혔다. 도쿄제국대학의 한 졸업생의 표현처럼 그것은 “일본인화의 과정”이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10대 시절을 식민 본국에서 소수자로 지낸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유학생들은 차별을 경험하며 반일 의식을 키웠다. 교토제국대학 졸업생 이관구는 도쿄에서 중학 과정을 유학하며 “뼈저리게 느낀 것은 일본 관헌의 요시찰급의 감시와 민간인까지의 차별 대우 때문에 망국의 한을 되씹으면서 민족적 투지를 드높일 뿐”이었다고 기억한다. 조선인 유학생들은 “하숙집에서도 ‘조선인 사절’이라든가, ‘일본인에 한限한다’는 쪽지를 문 앞에 붙여놓은 데가 많아서 하숙하기도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유학생들은 “조선인 된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조선인 유학생들은 ‘식민지(인)/제국(엘리트)’의 사이에서, ‘출세’와 ‘지사’ 사이에서, ‘일본인화의 과정’과 ‘조선인 된 슬픔’ 사이에서 분열했다. 이런 특성 때문에 식민 권력은 조선 청년들의 일본 유학을 조선 지배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친일적인’ 엘리트의 양성 과정이면서 역설적으로 식민 지배에 대한 저항 세력을 육성하는 “조선 독립운동의 수원지水源池”라며 골치 아파했다.
이처럼 제국대학 조선인 유학생 사회에서 ‘출세’와 ‘지사’, ‘친일’과 ‘저항’은 함께하는 두 요소였을지도 모른다. 또 그것은 한 인간의 내면에 공존하는 것이기도 했다. ‘출세’와 ‘지사’라는 화해하기 어려워 보이는 지향 사이의 갈등을 제국대학의 조선인 유학생들은 어떻게 해결했을까? 그 하나의 논리가 ‘동족을 위한 출세’ 혹은 ‘실력양성론’이었다.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식민지 관료가 된 많은 제국대학 출신들은 자신의 ‘출세’를 고통에 신음하는 식민지 동족을 구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합리화했다. 유능한 행정 관료가 되어 동족의 삶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했고, 올곧은 사법 관료가 되어 억울한 일을 당하는 동족을 보살폈다는 변명은 해방 이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던 알리바이다.
제국대학 출신 관료들의 논리는 일본 유학 자체가 안고 있었던 딜레마를 보여준다. 임화의 시를 다시 떠올려보자. 앞서 본 시 〈해협의 로맨티시즘〉에서 임화는 도쿄를 예술과 학문, 사상 등 근대성이 “높다랗게 굽이치는” 곳으로 선언했다. 자본주의 근대 문명의 상징 도쿄에서 “모든 것을 배워 모든 것을 익혀” 다시 현해탄을 건널 때는 슬픈 고향의 밤을 밝히자고 노래했다. 그 유명한 “네 칼로 너를 치리라.”는 명제다.
임화의 시처럼 제국주의 일본을 그곳에서 배운 지식과 운동의 ‘칼’로 치려 한 제국대학 출신 청년들이 있었다. 이재유·이관술과 함께 경성 트로이카를 조직하고 노동운동을 지도하다 검거되어 옥사한 교토제국대학 경제학부 졸업생 박영출, 조선인학우회를 결성하여 반일운동을 펼치다가 고문으로 죽은 도쿄제국대학 전기공학과의 박화영, 재在교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으로 치안유지법에 걸려 옥사한 교토제국대학 서양사 전공의 송몽규 등 적지 않은 제국대학 유학생들이 식민주의에 저항하다 죽거나 옥고를 치렀다.
하지만 도쿄일본의 자본주의 근대 문명을 직접 대면한 많은 유학생들은 그 빛에 눈이 멀었다. “네 칼로 너를 치리라.”는 임화적 명제는 처음부터 딜레마를 품고 있었다. ‘칼문명’의 용법을 배우다 보면 이미 앞선 일본 문명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많은 학생들이 그 칼을 벼리는 일본에서의 유학 기간에 제국 일본이 먼저 이룩한 문명에 압도되었다.
일본 문명의 세례를 받으며 유학생들은 조선의 식민지화를 뒤처진 자가 감수해야 하는 불가피한 현실로 받아들였다. 급기야 일본의 통치 안에서 그들이 성취한 자본주의 근대 문명을 식민지에 이식하는 것이야말로 “슬픈 고향의 밤”을 밝히는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한종건의 삶은 그 사례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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